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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30화 (130/171)

130화. 노우라 주세타의 변절

나는 노우라의 겁먹은 표정을 보다가 조용히 함을 내 쪽으로 끌어왔다.

“안 돼요!”

그리고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함을 열었다.

코 끝을 얼얼하게 할 만큼 강렬한 허브향.

내겐 아주 익숙한 향이었다.

탁!

나는 신경질적으로 함을 닫고는 멀리 밀어버렸다.

노우라는 내 손이 함이 아니라 자신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얼이 빠져 있다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노우라 님은 뭔가 알고 있죠?”

“제발,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부인.”

노우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웅얼거렸다.

희게 질린 얼굴빛이 옮겨간 듯 여위어 핏줄이 불거진 손등도 창백했다.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황태자비 전하와 노우라 님이 작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여윈 손 틈새로 노우라가 경악한 눈을 빛냈다.

“맙소사, 맙소사!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려서……!”

“도리스가 노우라 님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게 처음이 아니죠? 이런 선물을 전달하는 일 말고. 요즘 이상한 일을 참 많이 하진 않았나요?”

노우라의 눈에 선명한 공포가 떠올랐다.

거침없이 도리스의 이름을 말하는 내 입술을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윽고 그녀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난 시키는 일을 다 했으니 갈 거예요. 온천욕을 하고 가라는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바쁜 몸이에요. 언제고 이렇게 있을 수 없단 걸 이해해줘요. 그리고 내게 더는 묻지 말아줘요. 그냥 내가 하란대로 해요. 부인을 위한 조언이니까!”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가 벗어둔 숄을 두르고 발을 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것은 그것대로 불안한 듯 힐끔대던 노우라는 이윽고 입술을 꾹 깨물고 현관으로 향했다.

저택은 워낙 협소해서 채 스무 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딱 멈춰버렸다.

“이런, 선약이 있었던 모양이네.”

때마침 현관에서 검은 인영이 등장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노우라의 뒤로 걸어갔다.

“오랜만이네, 주세타 자작부인. 자네 보석점 사업은 잘 되고 있는가?”

키가 크고 하얀 백발을 우아하게 틀어올린 노부인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신전에서 오래 머물렀던 사람처럼 일견 성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귀부인은 젊었을 적 엄청난 미인이었을 게 분명한 눈으로 눈앞의 노우라를 내려다보았다.

빈센토의 것과 똑같은 연하늘빛 눈동자가 노우라를 지나, 뒤에 선 내게까지 옮겨왔다.

나는 허겁지겁 뒤따라 들어오는 빈센토를 확인하곤 눈앞의 카리스마 넘치는 노부인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로아드네스의 외할머니이자, 아내상속법으로 남편의 작위를 물려받은 카뉼라 윈스터 후작이었다.

그제야 그녀의 정복 재킷에 달린 윈스터 후작가 문양의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노우라 역시 알아본 것은 마찬가지인지 나와 비슷한 속도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후작이 짚고 선 길쭉한 지팡이가 보였다.

반짝이는 보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팡이는 당당한 자세에 비해 다소 느린 그녀의 걸음을 보조하는 듯 보였다.

“그대가 이 저택의 주인인 아카시아 백작이겠군. 요망한 요부라는 소문과는 달리 생각보다 귀염상인걸.”

“할머님, 미리 연락조차 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와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빈센토, 밖에서 할머니라 부르지 말랬지 않니. 너 때문에 후작이라는 내 명예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빈센토가 말없이 카뉼라를 에스코트했다.

카뉼라가 노우라와 아드리엔을 지나쳐 제 집처럼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거기 그러고 서 있을 텐가, 부인들?”

***

싸늘한 정적이 로비를 휘감았다.

빈센토는 로아드네스 없이 나 혼자 후작을 맞이한 게 불안해보였고 노우라는 감히 후작의 앞이라 등을 보이지 못한 채 결국 자리에 도로 착석하고야 말았다.

“수도에서 한참 바쁠 자네가 이리 험한 곳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내 곁에 앉은 노우라가 불안하게 손을 꼼지락댔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제게 선물을 주셔서 가지고 왔다합니다, 후작님.”

나는 함을 태연히 후작의 앞으로 밀었다.

“귀한 향이라 다른 사람들 없을 때 저만 피워보라고 지시하셨다지 뭐예요? 후작께서는 귀한 손님이시니 한번 봐주시겠어요? 저는 향에 대해서는 무지한지라.”

“원한다면.”

카뉼라가 고개를 까딱하자 빈센토가 함을 열었다. 카뉼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주세타 자작부인.”

“예, 예?”

카뉼라의 엄중한 목소리에 노우라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 위험한 것을 이곳까지 가져온 저의가 뭔가?”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한 노우라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었다.

“이게 뭔지나 알고 갖고 왔나?”

“저, 저는……. 저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카뉼라의 형형한 기세에 기가 팍 눌려버린 노우라가 겁에 질린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으며 겨우 답했다.

“그 향을 받은 카스타냐 공작 각하께서, 다음날 바로 쓰러지셨어요. 제, 제 추측일지는 모르지만 이 향이…….”

“자네의 추측이 맞네.”

카뉼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어릴 적 윈스터 저택으로 놀러왔던 바르데날도에게 알려줬던 약초야. 윈스터 영지에서 나고 자라는 허브지. 향이 꽤 좋지만 사람을 서서히 말려죽이는 독초야.”

다소 기세가 등등하던 분위기의 카뉼라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빈센토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 노쇠한 몸으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으니 바르데날도의 만행을 어느 정도 들은 뒤일 테다.

카뉼라라면 어렵지 않게 바르데날도가 도리스에게 은근히 이 허브에 대해 알려주었을 것이라 짐작했으리라.

“후작님. 제발 부탁이니 그저 모르는 척해주세요. 황실을 웃전으로 모시는 귀족이라면 다들 어두운 면 하나쯤은 갖고 살기 마련이지요? 저는 황태자비 전하를 오래 모셔왔고 어찌되었든 그분은 남편이 다치고 생계가 막막했던 저를 도운 은인이세요.”

노우라는 독초라는 말에 몸을 벌벌 떨다가 돌연 기세가 올라 말을 쏟아냈다.

“그분께서 시키시면, 저는 해왔어요. 지금도 그런 일의 일환일 뿐이에요.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 이 향을 가져온 건 아니에요. 부인, 내가 말한 대로 향을 피우는 척하고 다 버려요. 알겠죠? 저는 이 향을 전달하라는 황태자비 전하의 명도 수행했고, 부인의 죽음에 일조하지도 않은 거예요. 그럼 모두가 좋잖아요. 안 그래요?”

카뉼라의 가라앉은 시선이 노우라에게 향했다. 노우라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 숄을 다시 고쳐 입고 벌떡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후작님. 부인, 나는 이만 가볼게요.”

노우라가 상기된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주세타 자작 부인.”

카뉼라가 잠긴 목소리로 노우라를 붙잡았다.

“자네 진정 도리스 카스타냐가 자네의 은인이라 생각하나?”

노우라의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주세타 자작이 다리 한쪽을 잃고 칩거한 지 어언 몇 년째더라.”

“후작님.”

노우라가 경고하듯 낮게 카뉼라를 불렀다.

반란군을 토벌하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자작은 노우라의 역린이자 아픔이었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내 손주 며느리여서 수상한 짓거리를 해도 그동안 입다물고 있었네만. 자작이 그렇게 된 건 우연이 아니야.”

마침내 노우라가 서서히 뒤를 돌았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카뉼라를 보는 노우라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날것의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애초에 반란군은 없었네, 부인. 주세타 자작은 그저 사교계에서 발이 넓고 보석점을 운영하던 자네가 탐이 난 도리스에 의해 희생된 희생양이지. 실제로 그가 다치고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자네가 그걸 이어받고 도리스가 그대를 적극 돕지 않았나?”

카뉼라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노우라가 무서운 기세로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반란군이, 없다고요?”

“로아드네스를 수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대공 노에비안이 수를 좀 썼다더군. 황태자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장소 제공은 카스타냐 공작이. 도리스는 반란군이 가짜라는 건 몰랐겠지만 무관도 아닌 자네의 부군을 차출해 반란군 진압 작전에 투입시킨 것은 확인했네. 그때 반란군 앞에 진을 치던 마물에게 다리가 뜯겨 나갔댔나.”

이번에는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란군이 없다는 걸 모른 척하던 황태자의 가증스러운 얼굴이 불쑥 떠올라 속이 역겨웠다.

“카스타냐 공작은 피해자가 아닌가요?”

“피해는. 득세하기 시작하는 가신들의 영지만 골라 짓밟도록 교묘하게, 적극 협조했지. 그런 비밀이 있으니 대공과 맨날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황태자 아래로 뭉친 게 아니겠는가.”

“후작님!!”

노우라의 비명이 로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는 목부터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쥐고 있던 숄이 바닥에 널브러지고 잘 관리된 기다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말아쥔 상태였다.

“겨우, 겨우 저 같은 귀부인 하나를 제 사람으로 두기 위해…… 제, 제 남편을…….”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 하지만 겨우 귀부인 하나를 완전한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도리스는 기꺼이 그리할 아이라네.”

“아아-!!”

노우라가 제 양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후작께서도 그것을 알고 묵인하신 건가요? 어째서!!”

“황실을 웃전으로 모시면, 누구나 어두운 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지. 나도 자세한 내막은 최근 조사를 시작하며 알게 됐고. 반란군은 솔직히 좀 충격이더군.”

“아아아-!!”

해갈하지 못한 분노가 노우라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나는 그 누구보다 노우라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인.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제 뺨을 때리는 그녀의 손을 나는 꼭 잡아주었다.

“도리스 카스타냐에게 복수 하고 싶나요?”

그녀를 달래며 나는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망에 빠졌던 노우라가 나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제가…….”

절망하면서도 머뭇거리는 노우라의 입술이 열린 건 그로부터 몇 분이나 흐른 뒤였다.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죠?”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버린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제가 어떻게 도리스 카스타냐에게 복수할 수 있죠?”

노우라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주 간절하게 씹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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