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욕탕으로 가자
도리스가 딸려 보낸 하녀 때문에 노우라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아까와는 달리 가지 않고 버티려는 그녀 덕에 윈스터 후작이 직접 그녀를 돕겠다며 달래서 겨우 보냈다.
“뒤늦게나마 내 집안을 단속해야겠으니, 자네는 일단 수도로 돌아가. 갑자기 자네가 변절하려 하는 걸 도리스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노우라는 입고 있는 숄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잡고 부들거리다가 겨우 말을 듣고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마차까지 배웅하는 나와 빈센토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대신관이 도리스 카스타냐를 성녀로 만들려고 하는 건, 제 덕분이에요.”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제 사업자금으로 기부했거든요.”
어찌나 입술을 꾹 깨물었는지 핏물이 살짝 배어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바보같이 당한 자신을 경멸하듯 몸을 부르르 떨곤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분명 황태자비가 기부금을 명목으로 그런 신탁을 말해달라 부탁한 거예요. 그리고 최근에는 형사취수제를 폐지한 주역인 레일론 백작과 도리스가 자주 만났죠. 욕심 없이 물러나는 척, 성녀 행세를 하다가 2황자 전하께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반대 세력이 생기면 못 이기는 척 본인이 그분과 결혼하려 하는 게 뻔하다고요!”
노우라는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로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녀가 화난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혔다.
열린 창문 틈으로 노우라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향은 반드시 하녀들 앞에서 피우고, 모조리 버려야 해요. 도리스는 의심이 많은 여자예요. 당신을 경계하게 두지 말아요.”
“걱정 말아요, 노우라 님.”
“부인, 아니 블리에 님.”
창틀에 얹힌 내 손등을 그녀가 감쌌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창백하고 차가웠지만, 손길은 퍽 부드러웠다.
“고마워요, 정말. 날 철천지원수를 위해 헌신하는 멍청한 여자로 만들지 않아 줘서.”
노우라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복잡하게 일렁였다.
다친 남편으로 인해 가문을 책임져야 했던 지난 세월.
도리스에게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괄시받았던 세월을 반추하는 눈이었다.
“도리스 카스타냐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이제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 생각이에요.”
또다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급하게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내 손을 마지막으로 토닥였다.
“내가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리고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천천히 멀어지는 마차 안에서 서러운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
나는 대신관에 대한 이야기를 곧장 후작에게 전했다.
카뉼라는 도리스에 대한 분노보다는 대신관에 대한 배신감이 큰지 한참 몸을 떨었다.
빈센토는 내가 카뉼라의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곧장 말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굳은 얼굴만 유지하고 있었다.
“기부금이라면 이미 내가 넘치도록 주고 있었는데, 대신관 그자가 감히…….”
본래 후작가의 후계였던 아들, 그리고 레티나 황후까지 떠나보내고 더 기도에 매달렸던 카뉼라로서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빈센토. 당장 대신관을 불러와. 젠장, 그 늙은이가 늘그막에 욕심이 생겼나 보군. 신실했던 시절을 모조리 잊은 게 분명해!”
“대신관 예하를 이곳에요……?”
론타는 신권이 황권을 압도하는 나라는 아니지만, 대신관은 주신의 대리인으로서 신전의 수장인데 어떻게 그런 대단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또 빈센토는 군말 없이 전서구를 찾아 밖으로 나섰다.
분노를 속으로 삭이는 듯 보이는 카뉼라의 눈치를 잠시 살피는데, 곧 빈센토가 나간 문밖에서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로아드네스가 돌아오는 소리였다.
***
나는 두 사람의 해후를 위해 잠시 자리를 피했다.
분노하던 카뉼라는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등장한 로아드네스를 보자마자 먹먹한 눈을 했고, 로아드네스 역시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놀란 눈치였다.
2층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카뉼라가 울먹이며 ‘로안, 내 자랑스러운 손자. 네게 미안하구나.’라는 말을 들었으니 아무래도 카뉼라는 그동안의 바르데날도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보단 로아드네스를 적극 지지하며 도울 생각인 듯 보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를 뒤따르는 도리스의 하녀들이 신경 쓰일 무렵이었나.
로아드네스가 마물을 해치우고 올 때마다 강박적일 만큼 오래 씻는다는 걸 알기에 손님방 욕탕에 물을 받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욕실 밖에서 또다시 소란이 들려왔다.
둔탁한 무언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들의 비명이 욕실까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욕실 밖으로 나갔다.
하녀 하나가 끈질기게 들고 따라다니던 함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이 쏟아져 나와 바닥에 말린 허브 가루들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로아드네스가 있었다.
“감히 내가 있는 곳에 검열도 하지 않은 걸 들이다니. 정신이 나갔군.”
그 앞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도리스의 하녀들이 있었다.
“로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부인.”
로아드네스는 피 묻은 군홧발로 보란 듯이 가루들을 짓이겼다. 이미 저게 무엇인지 카뉼라 에게 들은 게 분명했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살기를 누르지 못한 붉은 눈은 하녀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전하! 이건 비 전하께서 제게 특별히 내리신 귀한 것이라고요!”
나는 덜덜 떨고 있는 하녀들 앞을 막아서고는 과장된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멋대로 쏟아버리시면 어떡해요? 이러면 제 체면이 뭐가 되냐고요?”
“부인…….”
단번에 살기가 날아간 눈이 잠깐 서러운 빛을 띠었다.
나는 하녀들에게 몸을 돌려 가장 앞에 있는 하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궁에서 익히 보아온 아이들이구나. 제발 비 전하께는 비밀로 해주겠니? 내가 어떻게든 이 향을 주워 담아 오늘 피울 테니. 비 전하께 미움받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니?”
울먹이듯 말하는 내 얼굴을 암흑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처럼 올려다보던 하녀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깨너머로 로아드네스를 힐끔대던 하녀들은 히끅! 소리를 내며 쫓겨나듯 방을 벗어났다.
닐이 끌끌 혀를 차며 그녀들을 데리고 나가자 정적이 일었다.
“……리엔.”
“로안. 후작님께 전부를 설명하지 않은 건 내 탓이니 뭐라 하고 싶진 않지만. 너무 경솔했어. 이게 위험한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도리스를 속이려고 잠자코 있었던 거란 말이야.”
로아드네스는 내가 말하는 동안 피가 묻은 망토며 갑옷을 벗어내고는 곧장 내 팔을 끌어당겼다.
“로안!”
“어떻게 그렇게 쉬워.”
피가 약간 묻은 안쪽의 튜닉 셔츠 사이로 그동안 강박적으로 씻어온 로아드네스의 깨끗한 체향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내 뒤통수와 허리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누가 무슨 계략을 펼치든. 저딴 위험한 물건이 너랑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미칠 것 같은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수리에 쏟아졌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네가 그런 노력까지 하지 않아도 내가 널 지킬 거야. 그러니 너는 내가 안전하게 만든 곳으로 오기만 하면 돼.”
겨우 그의 품에서 떨어진 내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촉촉한 붉은 눈 안에 꾹꾹 눌러놓은 절절한 감정의 빛이 새어 나왔다. 내 죽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그는 즉각 이렇게 반응했다.
“내일 당장. 수도로 떠날 생각이야.”
나를 다시 끌어당겨 안으려 하며, 그가 낮게 말했다. 나는 안기지 않으려 버텼다.
“당장? 우리는 엘라콘으로 가던 중이었잖아.”
“본래 목적은 엘라콘 왕을 보는 게 아니라 대주술사를 보기 위해서였으니, 빅토르 왕자가 대신 말을 전하기로 했어. 그쪽에서 좀 화가 날지도 모르지만 내가 새로운 후계자가 되기 위해 행렬을 수도로 돌렸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해줄 거라고 하더군.”
카뉼라와는 이야기가 끝난 듯했다.
“너는 여기 있어. 할머님과 함께 온 기사들이 여길 지킬 테니 이번만은 위험한 곳 근처에도 오지 말고. 우리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다 제거되면 그때 돌아와.”
로아드네스가 천천히 내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도 수도로 가서 널 도울 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내 옆이 되었을 때. 그때 와.”
“로안…….”
“네가 안전하게 평온한 상태로 내 품에 안기는 거.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자연스럽게 모로 기운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내게 훌쩍 가까워졌다.
잠깐의 이별을 말하면서도 떨어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감추듯 황금으로 빛나는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눈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잠시 몸을 굳히자, 로아드네스 역시 코끝이 스칠 만큼 다가온 상태로 몸을 굳혔다.
그는 번쩍 정신이 든 듯 몸을 물렸다.
“아, 미안.”
이곳에 있는 며칠 동안, 그는 오는 내내 들러붙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를 안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토록 피로한 일을 수행하고도 매번 몇 시간씩 욕탕에 앉아 피 냄새를 빼기 위해 씻고서야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와 짧은 굿나잇 키스로 아쉬움을 대신하곤 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내게 마물의 피 한 방울 옮겨 묻는 게 싫은 얼굴이었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저 되도 않는 물건을 네게 줬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서 내 몸 상태를 잠시 잊었어. 씻고 올게. 시종을 불러 이 향을 치우게 할 테니 너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횡설수설 말하는 그에게, 나는 그가 물러난 만큼 한 번 더 다가갔다.
“로안, 욕탕으로 가자.”
“그래…… 응?”
그는 쉽게 수긍하다가 일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대담하게 피가 묻은 그의 셔츠 매듭을 풀었다.
“잠깐, 아드리엔. 지금 뭐 하는 거야?”
“욕탕에 물을 받아뒀어. 내일 아침에 곧장 떠난다며?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없는데 목욕할 시간도 아까워.”
실로 그러했다. 이대로 마물의 피 때문에 내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그를 그냥 보낼 순 없었다.
“리엔?”
스르륵.
매듭이 풀린 셔츠 끈이 내 손에 완전히 쥐어졌다.
“오늘은 내가 특별히, 네 목욕 시중을 들어줄게.”
“……뭐?”
벌어진 셔츠 틈새 선명하게 솟은 쇄골부터, 바깥 공기에 차게 식어 있던 그의 단단한 두 뺨까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극적인 표정 변화였다.
나는 쥐고 있던 셔츠 끈을 바닥에 떨구었다.
느리게 떨어지는 끈에 잠시 옮겨갔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내 입술로 곧장 옮겨왔다.
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은근히 종용했다.
“싫어?”
그런 내 목소리에 반응해 선명하게 솟아오른 곳은 셔츠 틈새의 빗장뼈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