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목욕 시중
로아드네스의 굵은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그는 내가 이끄는 대로 욕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돌로 만든 거대한 욕탕 한가운데 온천이 퐁퐁 솟아나 하얀 김이 공간을 꽉 채웠다.
로아드네스가 망설임 없이 상의를 벗어 던지고 아래까지 벗어 내렸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성난 근육이 꿈틀거리고, 빈틈없는 조각상 같은 거대한 남자의 몸이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수증기 사이로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나를 기다리듯 주시했다.
잡아먹기 직전의 초식동물을 탐색하는 맹수의 것처럼 번들거리기 시작하는 눈이었다.
“네가 힘든 건 싫어. 굳이 피 냄새를 맡으며 나를 씻겨줄 필요는 없어, 리엔.”
갈망하는 눈과는 정반대의 착한 입이 의견을 표출했다.
잠시 멈칫했던 나는 오기가 생겨서 입고 있던 드레스를 빠르게 벗었다.
실내용 가벼운 드레스는 혼자서도 충분히 벗을 수 있었기에 허물처럼 벗겨진 옷이 그대로 내 발치에 툭 떨궈졌다.
로아드네스가 말을 덧붙이려다 입을 꾹 다무는 게 보였다.
다시 한번 목젖이 꿀렁이는 걸 확인한 나는 하얀 이너드레스만 입은 상태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 연인은 말이 많네.”
“!”
연인이라는 단어에 로아드네스가 크게 움찔했다.
나는 욕탕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
몸을 깨끗하게 해주는 약초를 푼 물이 로아드네스의 몸에서 마물의 피를 거두고 옅은 혈향을 풍겼다.
특수한 욕탕은 스스로 오염을 정화하는 시스템을 갖추었기에 옅은 분홍빛으로 변했던 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깨끗한 물로 갈아져 맑아졌다.
너르고 단단한 어깨에 남은 피를 젖은 손으로 살며시 문질러 지우자 로아드네가 속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리엔. 장난은 이제 됐어.”
“네가 깨끗해지도록 돕고 있잖아. 칭찬해 주면 안 돼?”
“…….”
그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이 완전히 깨끗해지자 나는 입욕제를 풀어 거품을 내고 그의 어깨에 치덕치덕 발라주었다.
내가 말없이 정말 시중에만 열중하자 약간 불만 섞인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가볍게 내게 물을 튀겼다.
“장난은 네가 치고 있잖아, 로안!”
평소처럼 곧장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튀어버린 물방울 때문에 찡그린 내 눈매를 지나 뺨, 그리고 목덜미로 점점 옮겨갔다.
물방울이 타고 흐르는 궤적을 따라 일렁이던 시선은 그 물방울이 내 앞섶으로 툭, 떨어지자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애써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로아드네스는 내가 어깨에 거품을 다시 바를 무렵 내 손을 턱 잡았다.
“아!”
내 몸이 입욕제를 푼 거대한 욕탕에 풍덩 빠졌다.
“로안!”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뜨겁게 젖은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곧장 공기 중에 드러난 내 앞섶으로 향했다.
떨어진 물방울이 남긴 궤적을 역행하여 움직이는 숨결이 목덜미를 지나 뺨을 핥아올렸을 땐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함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내가 저번에, 나 자극하지 말라고 했지.”
깊게 잠긴 목소리를 끝으로 욕심을 채운 입술이 내 입술을 베어 물고 곧장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로아드네스는 어느새 욕탕 가장자리에 몸을 담그고 앉아 나를 끌어안았다.
씨근덕대는 로아드네스의 가슴을 쓰다듬을 때마다 입안에서 그의 앓는 소리가 퍼졌다.
그가 나를 거침없이 더듬으며 입술을 탐할 때마다 거품과 뜨거운 물이 출렁거렸다.
뜨겁게 비벼지는 몸 사이로 후끈한 열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내가 겨우 그의 벗은 가슴을 밀어내고 헐떡였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붉은 눈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젖은 내 입술을 쏘아보고 있었다.
“로안.”
“나한테 이런 거 해줄 필요 없어, 아드리엔.”
열심히 시중들어 줬던 일이 도루묵이 된 것 같아 불쑥 불만이 차오르는데, 내 등을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헐렁한 어깨끈을 잡아 밑으로 끌어 내리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 몸을 굳히니 로아드네스의 붉어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번들거리기 시작하는 눈을 감추기라도 하듯 약간은 음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양새였다.
“엘라콘으로 가면 욕탕에서 씻고 싶다고 했었지.”
“뭐?”
“네 충실한 시종장은 모시는 주인을 혼자 씻게 둘 생각이 없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목욕 시중은 네가 아니라 내가 들 거야.”
낮게 씹어뱉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몸이 갑자기 불쑥 들렸다.
내 몸을 들어 욕탕 가장자리에 앉힌 로아드네스가 물살을 가르고 다가와 망설임 없이 치마가 말려 올라간 내 무릎을 씹어 물었다.
찌릿하게 솟아나는 자극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그의 젖은 백금발을 다급하게 콱 잡아 비틀고 고개를 천장으로 쳐들었다.
손님을 위해 커다란 창문을 내어놓은 천장으로 아름다운 밤하늘이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 경치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맛을 보듯 게걸스럽게 안쪽 허벅지살을 씹어 물기 시작하자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진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극이 지나쳐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숨결이 그대로 내 허벅지 안쪽까지 쏟아지자 귓전까지 소름이 돋아났다.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그의 집무실에서와는 달리, 거대한 욕망을 학습한 몸이 놀랄 만큼 빠르게 달아올랐다.
가장 안쪽 허벅지까지 씹어 삼킨 입술 끝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쏘아보는 듯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감미롭게 휘었다.
“내가 깨끗하게 해줄게, 리엔.”
“로안…….”
“입으로.”
해일처럼 덮쳐오는 강렬한 욕망에 나는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뜨거움. 오싹함.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가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쑤시고 들어와 곤죽으로 만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그의 입술에서 시작된 짜릿함이 머리끝은 물론이고 발끝까지 들불처럼 옮겨붙어 모든 것을 불태웠을 때쯤.
천장에 반짝이던 별들이 비처럼 내게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내 평생 그토록 오래 욕탕에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손발이 퉁퉁 불어 터질 때까지 로아드네스와 함께한 지난밤을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새벽 태양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그동안 못 들러붙었던 한을 제대로 푸는 로아드네스 덕분에 나는 살기 위해 거한 아침 식사를 해야만 했다.
로아드네스는 여기서 머물렀던 기간 중 가장 반짝거리는 얼굴로 내가 빵을 입에 넣을 때마다 꿀이 뚝뚝 흐르는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이 어찌나 노골적인지 카뉼라 입에서 ‘중요한 일을 하러 수도로 가는 마당에 미친놈 같은 얼굴은 이제 집어치워라.’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물론 얼굴이 붉어지는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잠은 좀 주무시지 그러셨습니까. 황태자비 전하의 하녀들은 고이고이 마차를 태워 성 밖까지 직접 배웅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개화…… 2황자 전하의 악명이 이럴 때 꽤 쓸모가 있으니 허튼소리는 못 할 겁니다.”
로아드네스를 배웅하러 나온 길에 닐이 내게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도리스의 하녀들이 줄행랑친 것 때문에 내가 불안해 잠을 못 이룬 줄 철석같이 믿는 얼굴은 내게 퍽 충성스럽게 빛났다.
간신배처럼 내게 속살거리는 닐이 꼴 보기 싫었던지 곧이어 갑옷을 갖춰 입고 저택을 벗어난 로아드네스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툭 쳐서 쫓아 보냈다.
나에게만 보일 만큼 로아드네스를 살짝 흘겨본 닐이 빈센토에게로 쪼르르 도망갔다.
“리엔.”
거대한 군마 앞에서, 로아드네스가 날 불러세우곤 내 이마에 빠르게 입 맞췄다.
끌어안고 싶은 것을 꾹 참는 듯 양어깨를 쓰다듬는 손이 진득했다. 주변의 시선을 늘 의식하는 나를 위해 참는 행동이었다.
“벌써 보고 싶은데 어떡하지.”
귓가에 감미로운 숨결이 흩어졌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주변을 의식하는 것도 잊고 그를 끌어안았다.
팔에 감긴 허리는 두껍고, 뺨에 닿은 가슴은 차가웠다.
단단하고 두꺼운 갑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는 수도가 또 다른 전장이나 다름없다는 게 확연히 피부로 와닿았다.
갑작스러운 내 포옹에 잠시 움찔한 로아드네스가 낮게 웃었다. 옅게 진동하는 가슴에 귀를 기울이자 듣기 좋은 심장 소리가 쿵쿵대며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만 들리는 내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심해, 로안. 무리하지 말고.”
“그런 말보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날큼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약간의 아쉬움을 표했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카뉼라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에게서 물러났다.
“사랑해, 리엔.”
한걸음 멀어지기 무섭게 그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가볍게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친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나는 귀를 감쌌다.
“로안, 이쪽은 걱정 말거라. 황제께서 너를 황태자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순간 들고 일어날 준비를 할 테니까.”
“반란군이나 할 법한 말씀을. 불청객으로 오셨으면서 부인을 괴롭게 하지나 않으시면 됩니다.”
“저런. 저, 저, 저 말하는 본새 좀 보라지!”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로아드네스가 피식 웃으며 군마에 훌쩍 올라탔다.
“에페로, 부인을 부탁한다.”
“형님. 절 보필해야 하는 건 부인이라고요.”
에페로의 볼멘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로아드네스가 말 머리를 저택의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정비를 마친 2 기사단의 말 머리가 일제히 같이 향했다.
“조금만 기다려줘.”
리엔.
내 이름은 입 모양으로만 읊조린 로아드네스가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말 옆구리를 발뒤꿈치로 툭 쳤다.
2황자 로아드네스를 상징하는 깃발이 그의 양옆에서 펄럭거렸다.
잠시 내 쪽을 한 번 더 돌아본 로아드네스가 미련을 감추고 말을 달렸다.
그들이 멀어져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본 남은 사람들이 등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려 하던 무렵.
“망할 영감이 때맞춰 와줬군.”
화려한 지팡이를 바닥에 툭툭 강하게 두드리며, 카뉼라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찍이서 새하얀 마차가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새하얀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마차를 에워싼 채 가까워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하게 멈춘 하얀 마차 문 앞으로 하얀 망토의 기사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하늘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마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높다란 모자를 쓴 남자가 쏟아지듯 나왔다.
카뉼라를 발견하자마자 돌처럼 굳은 남자가 황급히 의전을 물리고 뛰어왔다.
“후작님!”
대신관 텔른이 정말로 이 척박하고 자그마한 영지로 직접 행차한 것이었다.
***
사안이 사안인지라 대신관 텔른과 카뉼라, 그리고 나와 에페로만이 따로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갔다.
카뉼라는 일찍 연락을 받았던지 이미 그곳에는 신전에서 자주 주는 떫은 차가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차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긴장한 얼굴의 텔른만이 연신 그 차를 들이켰다.
“내가 아주 역겨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하. 감히 신성한 신탁을 청탁을 받아 조작했다는 소문!”
쨍-!
텔른의 찻잔이 받침대에 떨어지듯 놓였다.
양손을 맞잡은 텔른이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후, 후작님.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저는 절대로! 신께 맹세코 그런 청탁은…….”
“이미 다 알아보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그동안 신전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가난했던 예하의 어린 시절을 책임졌던 이 카뉼라 윈스터의 호의를 이렇게 짓밟아도 유분수가 있지!”
“오해십니다!”
“예하, 그렇다면 예하께서는 노우라 주세타의 기부금을 받고, 황태자비 전하를 알현한 적이 주신께 맹세코 없다는 뜻인가요?”
내가 중간에 불쑥 끼어들었다.
텔른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턱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가져다 바친 기부금을 몽땅 토해내지 않으려면 똑바로 말하세요, 예하.”
카뉼라가 사나운 기세로 씹어뱉었다.
텔른의 얼굴에서 핏기가 죄다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