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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33화 (133/171)

133화. 신의 뜻

지켜보고 있던 에페로가 말을 보탰다.

“황후 폐하께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 참인데 말입니다.”

“전하!”

“제 어머니께서 먼저 아바델리아로 떠나보낸 여섯 황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대신전에 쏟아붓고 기도를 드렸는지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예하.”

기억할 수밖에 없을 테다.

대외적으로 신전을 지원하는 곳은 황후가 관리하는 내궁이다.

그레이스 황후가 아무리 힘없는 황후라도 신전에 대한 지원만큼은 역대 어느 황후도 이뤄내지 못했던 수준의 지원을 하고 있고 말이다.

황후 개인에게 지급된 품위 유지비까지도 모조리 신전에 기부했기 때문에 대신전과 그레이스 황후의 관계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에페로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팔랑거렸다.

“어머니께서는 예하의 신실함만을 믿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습니다. 이번 상황을 제대로 해명하고 바로잡지 않는다면 내궁의 예산은 몰라도 황후께서 개인적으로 기부하신 돈은 모조리 재판을 통해 돌려받을 생각이십니다.”

그새 황후께 모조리 고해바친 에페로의 얼굴이 심술궂게 빛났다.

대신관은 카뉼라뿐만 아니라 그레이스 황후까지 나서자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꽉 쥐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짧은 순간 엄청난 번뇌를 거치는 얼굴이었다.

“아, 알현은 한 적이…….”

“있으시군요.”

내가 기다렸다는 듯 확언을 해버리자 에페로가 혼잣말로 욕을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카뉼라의 보석 지팡이가 휘둘러지기 직전처럼 움찔움찔했다.

“제, 제 말도 한번 들어보십시오!”

대신관 텔른이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기부금은 신전을 위한 돈이었고, 후작님을 봐서라도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를 보아서라도 알현을 요청하는 황태자비 전하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사적으로는 후작님의 손주 며느리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그래서 돈을 날름 받고 거짓을 말했다? 이 카뉼라 윈스터가 그런 것을 용인할 줄 알고?”

“거짓이 아닙니다! 비 전하께서 신탁을 받으시는 걸 제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아, 예하께서 도리스 카스타냐에게 받은 게 돈이 아니라 신탁인가 봅니다, 후작.”

에페로가 서늘하게 웃으며 카뉼라를 향해 읊조렸다.

텔른의 얼굴에서 아뿔싸 하는 감정이 섬광처럼 스쳤다.

덜덜 떨리는 입술이 진실을 털어놓기 직전처럼 벙긋거렸다.

“예, 예언을 하셨습니다. 비 전하의 부친이신 카스타냐 공작이 갑작스럽게 위중해질 것이라는 예언이요!”

“예언?”

“후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예언은 신의 영역입니다. 신탁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대신관이 북쪽 땅에서 죽을 것이라 예언하고 여기서 죽이면 나도 신탁을 받은 것이고, 성녀가 될 수 있습니까?”

텔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뉼라의 말에 에페로가 피식 웃으며 텔른을 조롱했다.

“그건 후작의 말이 일리가 있는데. 나도 하나 해볼까요? 대신관 텔른이 수도로 돌아가기 전에 마차 사고로 북쪽에서 죽는다던가?”

“그, 그만!”

텔른은 충격에 휩싸인 채 귀를 막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빛내는 카뉼라와 에페로를 살폈다.

아무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막대한 기부금을 냈더라도 대신관의 지위는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론타의 또 다른 권력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같이 레티나 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돌아온 카뉼라와, 빈센토와 여섯 명의 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에페로의 눈은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강력하게 의지를 표출한 각오를 이미 단단히 한 것이다.

나 역시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로아드네스에게 직접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자신하지 않았던가.

비록 그가 원하는 것이 내 안전뿐이라 해도 가만히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도 황태자 전하와 함께 매주 대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신실하신 분이 아닙니까? 사제로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품으시고 가장 큰 세력인 부친을 굳이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그러실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무서운 상상을 하는 여러분들이 두렵습니다!”

도리스의 단독 행동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녀의 행적과 바르데날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카뉼라에게는 손자의 치부를. 에페로에게는 어머니의 슬픔과 황실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부담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이미 뒤가 구린 대신관에게 말을 해도 될지 모두가 고민하는데 정적을 이기지 못한 텔른이 덧붙였다.

“그리고 비 전하께서 예언하신 건 카스타냐 공작의 중태뿐만이 아닙니다.”

텔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쪽에서 마물이 출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까지 예언하셨습니다. 원래는 줄곧 서부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마물들이 북쪽에서 계속 출몰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니 어찌 제가 믿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이번에 북쪽에 마물이 출몰할 것이니 미리 위험에 대비하라는 신탁을 받은 게 대신관 예하가 아니라 도리스다?”

텔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비, 비 전하께서 제 입으로 공표해야 사람들이 더 방비할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카스타냐 공작께서 중태에 빠지는 걸 확인하고 저는 놀란 참이었습니다. 이미 예언이 들어맞았으니 의심을 하기에도 뭣한 상황이었고요.”

“그러니까. 신실한 대신관 타이틀 유지하려고 남의 예언을 홀라당 본인 거라고 공표하고. 대신 성녀의 지위를 내려준다? 결국엔 청탁을 받아 붉은 눈에 대한 괴담을 잠재울 성녀가 나타난다는 거짓 신탁을 내린 거 아니냔 말입니다. 예하.”

“…….”

“설마 그 신탁까지 도리스가 받은 겁니까?”

텔른이 몰아붙이는 에페로를 차마 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뉼라에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신관이나 되는 인물이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내가 벌떡 일어나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후작님! 제발 비밀로 해주십시오. 제가 신탁을 번복한다면 신전의 권위가 어찌 되겠습니까? 두 번이나 정확한 예언을 한 사람을 제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옛날 옛적 기록으로만 전해진, 성녀 마리니의 현신이라 느꼈단 말입니다!”

신전에 대한 카뉼라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나는 겨우겨우 분노를 억누르는 카뉼라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리스가 대신관을 이용해 신의 힘을 빌려서까지 로아드네스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카스타냐 공작도 반란군과 마물을 서부에 들이는 걸 알고 묵인했다 하니, 그 딸인 도리스가 뒤늦게라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마나석을 이용해 마물을 퍼뜨리는 방법을 알아내 북쪽에 수를 썼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북쪽에 마물을 퍼트려 로아드네스를 불길한 황자로 낙인찍고.

반대로 자신을 로아드네스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성녀로 둔갑시켜 주변의 옹립으로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대신관께서는 정치에 관여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나는 오싹해진 팔을 쓸어올리며 텔른에게 질문했다.

텔른은 카뉼라나 에페로와는 달리 내게까지 굽히고 싶진 않은지 조금 경계하는 낯을 보였다.

“저는 오로지, 이 나라를 위해 올바른 일만 할 뿐입니다.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 올바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니까요.”

“지금 예하께서 하신 일 때문에, 도리스 카스타냐는 성녀로 추대되고 2황자 전하의 배필이 되어 다시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어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확신하시나요?”

“모든 건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뿐. 신탁을 받은 분이 성녀가 되시는 건 당연한 순리입니다.”

벌떡 일어나 소리치려는 에페로의 팔을 내가 꽉 잡았다.

그러곤 대신 내가 벌떡 일어났다.

텔른은 카뉼라 앞에 무릎 꿇은 채,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올리비아가 즉각 응접실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고 텔른에게 다가갔다.

“시시하게 도리스 하나를 황태자비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귀한 힘을 쓰시는 것보다…….”

그리고 뻣뻣하게 구는 텔른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예하께서 직접, 2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옹립하시는 게 어떠세요?”

순간이지만, 텔른의 눈에 강렬한 욕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허. 저는 딱히 황태자 자리에 누가 오르시든지 상관없습니다. 저는 다만 성녀가 되실 황태자비 전하를 보필하여…….”

응접실 문이 다시 열렸다.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린 카뉼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대신관의 시선이 옮겨가기 전에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제가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면 뭐라 하시겠어요?”

“지금 대신관을 불러놓고 장난치시는 겁니까, 부인?”

대신관이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정도라면..... 그까짓 조작일지도 모르는 예언 정도는 가뿐히 이기고도 남지 않나요?”

마침내 아카시아 백작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쯧, 하며 혀를 찬 대신관 텔른의 시선이 문 쪽으로 옮겨가더니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노에비안은 자애로운 주군 행세를 하기 위해 아카시아 백작의 장례식에 직접 대신관 텔른을 불렀던 전적이 있다.

장례 첫날 직접 시신 없는 관으로 예배를 주관했던 텔른이 아카시아 백작을 모를 리 없었다.

죽은 아카시아 백작의 초상이 사방에 걸려 있는 그의 저택 곳곳에 축복까지 해주고 갔으니 말이다.

그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희게 질린 채 비틀비틀 일어나 홀린 듯 백작 쪽으로 걸어갔다.

“주, 죽, 죽은 자가……!”

“그리고 제가 예언을 하나 하죠. 저 역시 지금 신탁을 받은 것 같거든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텔른의 충혈된 눈이 아까와는 달리 내게 격렬하게 반응했다.

“부인이 어떻게…….”

“죽은 대공비.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곧 깨어날 것이다.”

“부인!”

막무가내로 예언을 시작하는 내게 텔른이 코피를 쏟아낼 듯 달아오른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

“신의 축복을 받은 진정한 성녀,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신의 의지를 가지고 아바델리아에서 돌아올 것이다.”

죽은 아드리엔이 이미 자신들의 앞에 있다는 걸 모르는 에페로나 카뉼라가 경악했다.

카뉼라의 손에서 떨어진 지팡이가 바닥으로 구르고, 에페로가 벌떡 일어나 아드리엔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물러서지 않았다.

눈처럼 하얀 실내용 원피스에 따뜻한 숄을 두른 금발의 여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신관 텔른을 노려보았다. 대단한 기세였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순간. 황궁 깊숙이 감춰져 있던 진실이 떠오르고 다음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

이미 죽었던 아카시아 백작이 살아 있는 기적을 본 텔른의 눈은 이미 새로운 기적을 맞이한 듯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엔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도리스가 신의 뜻을 이용해 그리 나온다면, 아드리엔 역시 신의 뜻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확신에 찬, 서슬이 퍼렇게 빛나는 아드리엔의 눈을 마주한 텔른은 순간 압도당한 채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텔른과 마주한 아드리엔의 턱 끝이 한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게, 신의 뜻이니라.”

동시에 서늘한 시선이 그를 사정없이 찍어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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