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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34화 (134/171)

134화. 담합

“이 신탁. 예하의 입으로 직접 공표해서 마침내 이루어진다면…….”

아드리엔은 텔른의 눈에 비친 욕망을 정확히 인지했다.

텔른에게 기부금은 부가적인 수입일 뿐.

그가 필요한 건 신탁으로 인한 신전의 권위이다.

도리스 역시 기부금을 명목으로 접근했지만, 결국엔 자신이 조작한 예언을 텔른에게 넘기며 그의 신임을 사지 않았는가.

“신전의 위상이 이보다 높아짐은 물론, 새로운 황태자의 탄생을 예하의 손으로 이뤄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요?”

텔른이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

기가 다 빠져버린 대신관이 손님방으로 향하고, 응접실에는 우리만 남았다.

“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군! 그런 거짓을 텔른에게 종용한다면 내가 그를 비난한 명분이 없어지잖나?”

“후작. 방금까지 함께 그 신탁을 발표하지 않으면 도리스 카스타냐에 대한 내용을 만천하에 까발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사실 진짜 아드리엔이라고 밝히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 아드리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에페로가 그녀의 편을 들었다.

“그야 이 부인이 너무 자신 있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모르게 홀려서 그랬습니다. 부인, 백작을 진짜 부인이 살렸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요!”

“아니요, 후작님.”

아드리엔은 아까부터 도리스의 만행에 대적할 실마리를 찾아 흥분한 상태였다.

사소한 것에 얽매여 로아드네스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지 못할 바에는 모두를 완벽하게 속이는 게 더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중요한 건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고, 그동안 희생하신 2황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걸 이루는 거예요.”

“!”

아드리엔은 약간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카뉼라의 역린을 건드렸다.

“레티나 황후 폐하의 진짜 유지를 빈센토 경에게 이미 들으셨지요? 그 유지를 받들어, 황후 폐하의 생에 가장 찬란한 빛이 론타를 밝게 비출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에페로 님께선 여섯 황자 전하들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아드리엔은 말문이 막힌 카뉼라와 에페로를 차례로 보며 말했다.

에페로는 여섯 황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빈센토를 따라 동굴에서 먼저 저택으로 돌아오던 날.

그는 빈센토에게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도대체 왜, 내 형제들이 저리 죽어 시신까지 보존되어 있어야만 했냐고 말이다.

그때 빈센토의 대답은 에페로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죽인 건 아마도 카스타냐 공작.

그렇게 하도록 종용한 건 바르데날도.

시신이 저리 안치된 이유는 아마도 황위에 오르고 나면 가져와 비밀의 방에 전시해둘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전리품으로 여겼을 것이라던 빈센토의 확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린 에페로가 고개를 젓고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황태자는 이미 죽었어도 실제로 형제들을 죽인 카스타냐 공작과 그 딸인 도리스는 호위호식하고 있지 않은가.

“맞아요, 후작. 황태자 전하가 그리 자란 건 후작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에페로가 웃는 낯으로 비수 꽂는 말을 했다.

카뉼라는 잠시 굳은 듯 멈춰 있다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카뉼라는 로아드네스를 지지하고, 바르데날도의 만행에 책임을 느껴 평생 속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에게 되려 거짓을 말하라 종용한 게 또 다른 죄가 되어 신의 분노를 살까 덜컥 겁이 났다.

“후작님.”

그를 간파한 아드리엔이 조용히 카뉼라를 불렀다.

카뉼라는 이 연약해 보이는 미인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짓을 자신했는지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아드리엔이 빙긋 웃었다.

“예언은 거짓이 아니에요.”

“궤변이라도 늘어놓을 작정이라면…….”

“제가 예언을 현실로 만들 거예요.”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났다.

“2황자 전하의 말도 안 되는, 그 불길한 붉은 눈이라는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는 ‘신의 뜻’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카뉼라는 아까 대신관을 압도했던 아드리엔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거짓을 말하는 눈이 아니라 더 기가 막혔다.

소문대로 요부가 아니라, 어쩌면 미친 여자일지도 모르지. 대신관을 찍어누르던 기세는 반쯤 미친 사람 같은 기운이기도 했으니까.

“신의 뜻을 빌려, 남은 쓰레기들을 모조리 치울 수 있게 후작께서 힘을 보태주세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게 생글거리며 온갖 꿀 바른 말만 하던 도리스보다 눈앞의 여자가 훨씬 마음에 드는 것은 무슨 연유란 말인가.

“그래요, 후작. 내 경험상 이 부인의 친구가 되면 적어도 내가 주인공인 장례식에 참석하진 않더라고요.”

그새 건방짐을 회복한 에페로의 옹호에 카뉼라의 표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

오랜만에 아들을 마주한 황제 율리어스의 얼굴은 퍽 덤덤했다.

레티나에 이어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죽음, 그리고 후계자의 죽음으로 그는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황제가 되고 싶으냐.”

황제는 전시가 아님에도 중무장을 하고 들어온 로아드네스를 훑어보았다.

“네게도 욕심이란 게 생겼구나.”

“욕심입니까?”

황제의 입술이 다물렸다.

굳이 따지고 보면 계승 서열이 2순위인 로아드네스가 새로운 후계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황후의 적자인 에페로 역시 황제가 원하면 올려세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로안.”

“예.”

“황제는 신이 내리는 자리라고들 하지.”

율리어스가 알현실 입구에 서 있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하지만 혼자 잘나서는 절대 될 수 없는 자리기도 해.”

“…….”

“내 형제 중에서도, 너처럼 유독 잘난 이가 있었지.”

황제는 자연스럽게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치열했던 젊은 날의 경쟁을 떠올렸다.

노에비안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황태자임에도 황위에 순탄히 오르지 못했으리라.

“네가 떠올리는 그 사람. 노에비안 론타가 그러했고, 그 이전에 너처럼 붉은 눈을 가진 아우가 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로아드네스의 눈에 흥미가 돌자 황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도리스 카스타냐처럼 ‘성녀’의 칭호를 받은 이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갑자기 도리스의 이름을 거론하는 황제에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미간이 왈칵 찌푸려졌다.

“……무슨 뜻입니까?”

“그때 도리스처럼 ‘성녀’의 칭호를 받은 이가 붉은 눈의 괴담을 잠재울 수 있었더라면, 성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배필이 되었다면 그 아우가 황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형사취수제 부활에 부황께서도 동의하신 겁니까?”

“그럼. 네가 레티나의 빛이 될 수 있는 기횐데!”

황제가 돌연 눈을 번뜩였다.

“네가 불길한 황자라는 그 전설만 중화시킬 수 있다면 너는 도리스가 아니라 카스타냐 공작일지라도 혼인해야 해! 네가 황제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게다가 레일론 백작과 시스코메틴 백작 역시 바르데날도가 죽은 뒤 방황하다가 겨우 도리스로 인해 너를 지지하려 한다. 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카스타냐 공작이 쓰러진 지금이 적기야.”

로아드네스가 황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 황제의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 이제 실감이 나느냐? 로안, 내 아들아. 바르데날도가 죽은 이후 너만이 나와 레티나가 이 땅에서 사랑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지. 나는 네게 황위를 물려줄 거야. 네가 붉은 눈이라 할지라도!”

“아버지.”

“그래.”

어느새 황제의 코앞까지 다가온 로아드네스가 달빛을 등지고 아비를 내려다보았다.

기꺼이 황위를 물려주려는 황제 율리어스의 얼굴이 로아드네스의 그림자에 잠겼다.

그 속에서 로아드네스가 속삭였다.

“초대 황제 키르프스는 배신자다.”

옅은 미소를 머금었던 율리어스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진정한 초대 황제는, 붉은 눈의 칼데이온. 고로 론타 황실 정통성의 상징은 붉은 눈이다.”

“……로안?”

“아버지께서도 이 기록을 아십니까?”

황제가 앉아 있음에도 몸을 휘청했다.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로아드네스는 그를 붙잡아 주지 않은 채 선명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푸른 눈의 가짜 후계들이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담합하여 그 기록을 보관하여 숨기고. 마나석을 이용해 나라를 번창하게 할 생각은 않은 채 마법을 금지하여 엘라콘에 국력을 따라 잡히고…….”

“로안, 로안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아버지 대신 죽인 수많은 황족들 중에 섞인 붉은 눈은 역사에조차 남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서늘한 로아드네스의 붉은 눈이 목을 죄는 것만 같았다.

“이게 진정 우연입니까?”

황제는 숨 쉬는 것을 잊은 듯한 얼굴로 다시 몸을 물리는 로아드네스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아들의 얼굴은 서리가 낀 듯 싸늘하기만 했다.

“제게 그깟 성녀가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안. 로, 로안…….”

황제는 혀가 말린 듯 말을 잇지도 못하고 연신 아들을 부르기만 했다.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거칠게 메마른 입술이 벙긋되는 모양을 응시하던 붉은 시선이 곧장 짙푸른 눈동자로 향했다.

“진실에 입을 닫고 신의 뜻에 반하며 사셨던 세월을 만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로안!”

황제가 겨우 소리쳤다.

하지만 균열이 일 때로 인 푸른 눈동자는 연신 흔들리며 불안함을 표출했다.

“내가……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느냐? 내 아버지의, 내 할아버지의, 또 그 할아버지의 명예까지 다 달린 일이다! 여태껏 쌓아온 론타 황실의 근간을 다 무너뜨릴 셈이냐?”

“제 입을 다물게 하고 싶으시면, 도리스 카스타냐를 아내로 맞이하라 종용하지도. 그것을 조건으로 본래 제 것이어야 할 자리를 주겠다고도 말씀하지 마십시오.”

“로안! 로안!!”

로아드네스가 그 말을 끝으로 알현실을 벗어났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고, 롯시의 기록을 아버지가 알고도 진실을 묻었다는 사실에 그 역시 상처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네 말에 따른다고 해도! 여러 세력이 얽힌 정치는 절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황제의 다급한 음성이 닫히는 문 사이로 울려 퍼졌다.

로아드네스의 걸음이 빨라졌다.

***

2황자 로아드네스의 깃발이 돌연 황궁에 들어왔다.

일정보다 이른 귀환이었다.

도리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신전으로 향하려던 일정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노우라를 닦달해 직접 치장을 돕게 했다. 고귀한 귀부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부인이니 안목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성녀의 이미지를 위해 이전처럼 화려하게 꾸미진 못하지만, 청초함에도 정성을 들여야 하는 법.

도리스는 밤에 불려 나온 노우라를 향해 이미 다 마른 머리카락에 물을 묻혀 빗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우라는 군소리 없이 그녀가 시킨 일을 수행했다.

“어째 노라가 북쪽을 다녀온 뒤로 일이 다 잘 풀리는 기분이야, 안 그래요?”

“……그런가요?”

“감감무소식이라 걱정이던 2황자께서도 무사히, 빨리 귀환하셨고 말이죠.”

“……하지만 카스나냐 공작 각하께서는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지 않습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울을 보던 도리스의 시선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덤덤하게 빗질을 하는 노우라의 얼굴을 한참 노려보던 도리스가 다시 싱긋 미소 지었다.

“정정하시던 분이니,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그리 말하는 도리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불만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도 대신전에서 드리면 되니까…… 아야!”

“죄송합니다, 비 전하.”

“빗질은 이제 됐어요!”

도리스는 평소에는 잘만하던 빗질하나 제대로 못 하는 노우라를 신경질적으로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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