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역겹군
‘눈치 없이 아버지 이야기는 왜 꺼낸담.’
도리스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줬음에도 로아드네스와 자신의 결합을 거부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황제의 재목이 누구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누워 있는 게 훨씬 나라에 이득이었다.
깨어있어 봤자 로아드네스의 황태자 즉위는 물론, 자신과 로아드네스를 절대 이뤄줄 수 없다고 반대했을 테니까!
한참 어린 동생인 라파엘라를 에페로에게 주고 얻는 치욕적인 황태자비 자리보다, 자신이 성녀로서 당당하게 로아드네스와 결혼해 얻는 황태자비 자리가 카스타냐에 훨씬 가치 있는 게 아닌가?
도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노라. 이번에 북쪽에 갔을 때, 블리에가 여전히 금발이던가요?”
“예, 전하.”
도리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신의 흑발을 노려보았다.
블리에 역시, 아드리엔의 존재를 알고 금발로 염색한 게 분명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아드리엔이군.’
이가 으득 갈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서슬 퍼런 눈이 서서히 가라앉고 옅은 분홍으로 칠한 입술 끝이 가늘게 올라갔다.
금발의, 청초한 아드리엔 피레타의 모습이라면 그 누구보다 똑같이 재현할 수 있었다.
가늘고 긴 손끝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잠옷이나 다름없는 하얀 드레스의 앞쪽 매듭을 슬쩍 풀어헤쳤다.
선명한 가슴골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나자 도리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전하, 2황자 전하의 깃발이 황제 폐하의 궁으로 옮겨갔습니다.”
창문가에 서서 2황자 궁 쪽을 지켜보던 노우라의 말에 도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전하?”
말릴 새도 없이, 도리스가 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
황제궁과 2황자 궁이 곧장 이어지는 회랑.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가 된 것 같은 설레는 감각이 발끝에 차오르자 얼굴은 저절로 달아올랐다.
도리스는 곧이어 회랑 끄트머리에서 중무장을 한 채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인영을 발견했다.
어둠에 잠긴 얼굴이 달빛에 드러나지 않아도 그녀는 그 사람이 로아드네스임을 확신했다.
곧이어 도리스를 발견한 로아드네스가 멀찍이서 멈추어 섰다.
도리스는 그를 향해 우아한 암고양이처럼 걸어갔다.
깊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저 붉은 눈의 불길함을 잠재울 성녀, 그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완벽한 반쪽.
그게 자신이 될 날이 머지않은 참이었다.
“로안.”
그녀는 이제 예조차 갖추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앞에 태연히 섰다.
도리스는 지나치게 예를 갖추는 이전의 로아드네스보다, 제게 예를 갖추지 않는 지금의 로아드네스 쪽이 훨씬 좋았다.
드디어 그 빌어먹을 형수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전엔 무감각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빛나던 눈에 오늘은 이상하게 경멸이 서려 있었다.
도리스는 되레 피식 웃었다.
바르데날도가 결국엔 제게 약점이 잡혀 잠자코 합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로아드네스도 결국 황제가 되면 후계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다.
“로안, 이제 피할 수 없어. 온 세상 사람들이 너와 내 사이를 축복해. 불길한 2황자와 성녀의 결합. 이게 제국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지 알겠어?”
실로 그러했다.
2황자가 후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겼고, 그를 컨트롤할 수 있는 성녀가 그녀라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형사취수제의 부활을 환영했으니까.
그 계책으로 법의 부활을 환영하지 않던 세력까지 흡수해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로아드네스가 이변 없이 황제가 되고 싶다면 그들이 지지하는 도리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리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졸지에 끈 떨어진 신세가 된 레일론 백작이나 아버지의 부재로 불안해하던 서부의 귀족을 통합시킨 게 누군가?
바로 도리스 카스타냐, 그녀였다.
“내가 널 위해. 널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 너는 지금 당장 여기서 내게 키스를 퍼부어도…….”
“역겹군.”
“……뭐?”
도리스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에는 그 흔한 비웃음마저 서려 있지 않았다.
늘 사모해 마지않았던 깎아놓은 듯한 얼굴에는 여전히 냉기만 가득했다.
왜? 도대체 왜?
도리스는 로아드네스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음과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이렇게 애끓게 만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거야?”
“……내가.”
“너도 솔직히 한번은, 아니 여러 번 흔들렸지?”
도리스가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화가 나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니 바르데날도의 장례식날. 네 집무실에서. 내가 네 옷을 벗기려 했는데도 날 빤히 보기만 했잖아. 사실은 내가 나서주길 기다렸던 거야. 그렇지?”
도리스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부스스 웃었다.
힘들면 매번 도와달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바르데날도와 비교하면 로아드네스는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대고 싶은 남자였다.
그러니 도와달라는 간지러운 소리를 쉽게 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아, 그거.”
의미심장한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마치 전날 먹은 점심 메뉴를 떠올리듯 가볍게 대답했다. 도리스의 미소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 그거?”
로아드네스의 어투에서 순간 바르데날도의 잔상을 찾아낸 도리스가 말을 따라하며 빈정거렸다.
“내 특기가 바르작거리는 벌레 새끼들 잡아 죽이는 건데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죽이기 전에 바르작거리는 꼴 보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내 형수께서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마음 깊숙이 새겨둬야, 내가 예의 있는 척이라도 하던 걸 그만둘 수 있지 않겠나.”
“……뭐?”
“좀 거슬렸던 기억이 나네. 네가 고작 셔츠 단추 몇 개 푼다고 내가 장단이라도 맞춰준다 착각했었나?”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로아드네스와는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첫사랑. 황후 자리를 포기할 수 없어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이제야 좀 드러내려는데.
그 첫사랑을 황제로 만들어 황후의 자리도, 여자로서의 기쁨도. 모두 다 누려보려는데!
“내게 당신은 거슬리는 날파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만하면 그만 포기하고 순종해야 할 로아드네스의 얼굴에는 단 한 가닥의 미련도 없었다.
“어디까지 가나 한번 두고 보고 싶었는데. 론타의 황태자비씩이나 되는 사람의 몸가짐이 참 가볍더군. 고작 단추 몇 개 푼 거로 감히 날 유혹했다 생각하고 이렇게까지 일을 벌인 걸 보니. 간덩이가 부었다는 것쯤은 알겠어.”
지금 저자세로, 상대를 붙잡아야 할 사람은 도리스가 아니라 로아드네스였다. 상대를 적으로 돌려 좋을 게 없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로아드네스였다.
“말했잖아. 네가 벌거벗고 나를 기다려도. 나는 너한테 절대 동하지 않는다고.”
이래 봬도 꽤 취향이 확고해서.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입술이 아름다워 더 모욕적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궁에 드나들며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몸에 다 둘러도 로아드네스의 눈길이 제게 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열 아카데미를 기웃거리며 결국 로아드네스를 찾아냈을 때,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보았었다.
‘아드리엔 피레타.’
잠도 못 잘 만큼 누군가가 부러웠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서부의 공주로 살아왔던 도리스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열패감이었다. 비실비실한, 비쩍 마르고 창백하게 질린 금발의 동부 촌뜨기.
세련된 서부의 공주가 아드리엔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자신이 누구와 놀고 공부하는 줄도 모르고 나사가 빠져 웃는 아드리엔의 얼굴이 꼴사나웠다.
처음 금발로 염색했을 때.
도리스는 로아드네스와 아드리엔이 늘 만나던 도서관 자리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두드리던 손길.
가면에 감춰졌어도 감출 수 없는 설렘이 가득한 로아드네스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그 눈이 아드리엔이 아닌 도리스임을 확인하고 실망의 빛으로 가라앉는 순간을 마주했다.
단지 짧은 순간 마주했던 눈이. 마나석에 의해 바뀐 눈일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 도리스의 심장을 잡아 주물렀다.
“취향. 그래, 취향.”
도리스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취향에 내가 맞춰주겠다고. 그 빌어먹을 취향에 내가 맞출게. 모르겠어? 이 세상에서 이제 아드리엔 피레타와 가장 비슷한 여자는, 그 여자를 가장 비슷하게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날 이후로 금발이든 동부의 드레스든. 그 어떤 것으로도 로아드네스의 시선을 끌 수 없었지만, 도리스는 노력했다.
겉모습을 아드리엔 피레타처럼 바꾸는 건 이골이 날 만큼 익숙했다.
블리에 아카시아.
그 천박한 여자가 닮은 얼굴 하나만으로 로아드네스의 새로운 연인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 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지만 동시에 희망을 보았다. 로아드네스 코즈마 드 론타. 그 역시 까다로운 척하지만 결국은 사내인 것이다.
“내가 아드리엔 피레타가…….”
“아드리엔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어.”
무감각을 넘어선 경멸.
모두가 피해도 자신만은 아름답다 생각했던 그 눈이.
그 어떤 보석보다 가장 가지고 싶었던 보석이.
그런 빛깔로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성녀라고 나불대도. 죽은 자를 살려내 네가 그 가죽이라도 뒤집어 쓸 텐가?”
“나는…… 나는 주신께서 짝지어주신 네 반려야…….”
“진짜 그런 성녀님이라면 죽은 자를 되살려 보려는 시늉이라도 해보지 그래.”
착한 동생.
예의 바른 시동생.
그 가면을 모조리 벗은, 날것의 로아드네스가 대놓고 그녀를 비웃었다.
그마저도 길게 찢어져 색스러운 눈은 한 번도 접어주지 않고 입꼬리만 비죽 올린 성의 없는 비웃음이었다.
그 성의 없는 비웃음이 도리스의 자존심을 산산이 조각냈다.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성녀 마리니의 현신이라도 되어야 불길한 새끼인 내 옆자리에 앉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지 않겠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던 로아드네스가 늘 싫었지만,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나 행동이 도리스의 마음을 사정없이 가르고 베었다.
눈을 접어 웃어줄 힘조차 쓰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게 자신이 된 것 같은 모멸감이 치솟았다.
“다시는 그 입으로 아드리엔의 이름을 담지 마.”
“로……!”
“또다시 거슬린다면…….”
로아드네스가 거대한 상체를 기울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공포와 설렘이 온몸을 꽁꽁 묶어 움직일 수 없었다.
“너와 네 가문.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테니까.”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회랑 바닥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가까워졌던 몸이 다시 멀어지고. 풀어헤친 앞섶으로 향한 붉은 시선이 비웃음을 머금고.
꿈에도 그리던 그의 체향이 코끝을 유린하다가 그녀를 비웃듯 대번에 사라졌다.
“로안!”
뒤도 돌아보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검은 망토가 회랑 외부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가 아무리 악을 쓰고 울부짖어도, 로아드네스는 그대로 점이 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말 그대로.
지나가던 날파리보다도 못한 취급이었다.
그냥 두면 살릴 수도 있었던 남편을 죽였고.
로아드네스의 앞길에 방해가 될 아버지를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를 위해서.
정말 모든 걸 다 버렸는데.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도리스는 찬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이젠 사라지고 없는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살면서 겪은 모멸감을 모두 합쳐도 오늘과 같지는 않으리라.
창백한 손으로 말아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외투를 들고 도리스를 쫓아온 듯한 노우라가 멀리서 다가왔다.
도리스는 제 어깨에 둘러지는 외투를 꽉 부여잡고 노우라를 노려보았다.
노우라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대신관 예하를 다시 만나야겠어요. 노라, 성녀 추대식을 앞당겨야겠어요.”
다시 기부금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비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노우라를 보자, 온몸을 휘감던 분노가 아주 약간이지만 가셨다.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알리는 자리에서. 로아드네스, 너는 결국 네게 정답은 나밖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파들거리는 입가가 그제야 호선을 그렸다.
도리스가 눈앞에 있는 뻔한 승리에 도취한 채 로아드네스를 굴종시키는 뜨거운 밤을 상상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복종한 노우라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