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가져도, 가져도 불안해
도착한 수도는 깜깜한 밤이었다.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마물들을 피해오느라 일주일이 꼬박 걸려, 우리는 추대식 전날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동안 도리스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그날 그 하녀들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을 고한 게 분명했다.
카뉼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수도 근처에서 따로 움직였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마중 나온 빈센토와 함께 그의 저택으로 향했을 것이다.
에페로와 나, 그리고 롯시는 은밀히 로아드네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우리의 행적을 누가 쫓을까 봐 호위는 최소로 했기에 에페로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로아드네스의 저택은 황족의 사저라 그런지 벽이 무섭도록 높았다.
로아드네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수도에 다다라서야 그에게 전서구를 띄웠다.
“부인.”
분명 에페로가 밖에서 호위하고 있을 마차에서 내렸는데.
뒤에서 닫히는 육중한 문소리와 함께 내밀어진 손은 아주 익숙한 손이었다.
“로안?”
로아드네스였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새도 없이 나는 차갑게 식은 품에 완전히 폭 안겼다.
완전히 로아드네스의 사람들만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에페로마저 입만 벙긋거리다 머리를 긁적이고 사라졌으니 눈치를 볼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눈치껏 저택 안으로 들어가 흩어지고, 로아드네스는 곧장 나를 데리고 저택 안 계단을 올랐다.
어둡지만 깔끔하게 잘 꾸며진 계단을 몇 개나 타고 오르다가, 주변에 사람을 다 물린 층에 진입하자 로아드네스가 나를 훌쩍 안아 들었다.
깜짝 놀라 목을 끌어안으니 속도는 더 빨라졌다.
쾅!
훈기가 도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로아드네스는 날 내려놓았다.
“로…….”
그리고 닫힌 문에 나를 몰아세운 채 곧장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입술과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동시에 입술에 닿았다.
뜨겁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것이 마치 내 존재를 확인하듯 진득하게 입안을 더듬었다.
쌉싸래한 민트 향이 입과 코에 동시에 퍼져나갔다.
불을 밝히지 않은 방에서 질척한 소리가 그를 머금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찬바람 향기를 머금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릴수록, 로아드네스가 더 깊게 몰아붙였다.
마침내 젖은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로……. 헉, 로안.”
숨이 차서 문을 짚은 그의 팔에 의지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로아드네스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왔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가슴이 터질 만큼 끌어 안아놓고 무슨 말이람.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고 다짜고짜 입을 맞추고 끌어안은 사람이 누군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왜 왔냐고 탓을 해놓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니.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그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가 내 귓전에 스몄다. 이어 젖은 그의 입술이 내 귓바퀴를 잘근 깨물고 핥았다.
“아!”
“너처럼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시종장이 공주님에게 할 소리는 아니잖아, 로안.”
귓바퀴 전체에 잇자국을 새길 듯 물어대던 로아드네스가 돌연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살짝 떼어놓았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궁에서 달려 나왔을 그가 상상됐다.
실제로 그는 밖에서 꽤 오래 기다린 듯 아직도 얼어 있는 두 뺨이 붉었다.
“네 말이 맞네. 내가 네 충실한 시종인 걸 깜빡했어.”
나는 약간 상기된 표정을 한 그의 뺨에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역시 차가웠다.
“툴툴대면서도 날 기다려준 거야, 여기서?”
“그럼. 북문으로 곧장 달려가다가 엇갈릴까 봐 다시 사저로 돌아왔지.”
로아드네스의 손이 내 등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단추를 더듬거리다가 하나 풀었을 무렵 내가 그에게서 벗어났다.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로안. 서신으로 전달할 수 없었던 이야기도 많고. 수도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로아드네스는 내가 빠져나간 자리를 허망하게 보다가 곧 자세를 바로 했다.
“황제 폐하의 약점을 잡았으니, 내 황태자 즉위를 반대하진 못하실 거야. 문제는 레일론 백작이나 시스코메틴 백작이 내가 자신들의 비위를 맞춰주길 원하더군. 도리스 카스타냐가 그들을 어찌나 잘 구워삶았는지 좀 성가시긴 해.”
로아드네스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내고 의자에 던지듯 걸쳐놓았다.
도리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방 안의 공기가 약간 싸늘해진 기분이 들었다.
로아드네스가 갑옷을 풀어내 바닥에 툭, 툭 떨구었다.
아무 말이 없는 나를 느꼈는지, 그는 갑옷을 벗고 서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왜 그래, 리엔?”
“……도리스를 아내로 맞을 거야?”
“뭐?”
로아드네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훌쩍 가까워졌다.
마물의 피를 묻히지 않은 그의 체향은 늘 맡던 라벤더 향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 입장에서는 도리스를 아내로 맞는 게 더…….”
내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노에비안이 다시 창문을 넘어 밖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내게 했던 말이 수도로 오는 내내 떠올랐을 뿐이었다.
‘당신을 위해 죽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어. 하지만 2황자가 황태자가 되기 위해 당신을 뒤로하고 도리스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 근처를 맴돌아도 모르는 척해줄 순 없나?’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다고 해도. 100%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다.
노에비안이 헛된 희망을 품는 이유도 내가 세운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서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양어깨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눈을 한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로안.”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원망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입만 벙긋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도와주겠다고 자신하던 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함께하려는 건 아니지, 리엔.”
“!”
“그놈이 널 찾아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나는 어떤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로아드네스가 노에비안이 찾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에페로가 정말로 말한 게 분명했다.
내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자 입을 지그시 다문 로아드네스가 단번에 날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단 소리를 하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로안!”
“듣기 싫어. 도리스 카스타냐? 내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못한 여자를 들먹이면서 날 벗어나려 하지 마.”
“벗어나려는 거 아냐.”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해. 사람 불안하게.”
로아드네스가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을수록 날 끌어안은 압력은 더 강해졌다.
“황태자가 되기 위한 쉬운 길?”
떨리는 로아드네스의 몸이 고스란히 내 가슴까지 전달되었다.
“내가 황태자 되려고 이러는 거 같아?”
“로안. 거기가 잃어버렸던, 원래 네 자리잖아. 아야!”
로아드네스의 떨리는 입술이 대번에 내 귓가로 와서 날 벌주듯 콱 깨물었다.
품에 옴짝달싹 못한 채로 끌어안긴 채 귀를 잘근잘근 깨물리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한참 귀를 씹어대던 로아드네스가 그것을 치료하듯 한번 핥았다.
그리고 귓가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내 뺨을 지나 입술을 삼켰다.
화난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몸이 녹아내릴 만큼 느릿하고 감미로운 숨결이 온 입안을 휘저었다.
채 감지 못한 흐릿한 시야로 내게 몰입한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입안을 헤집던 숨결이 뚝 끊기고 질척하게 젖은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몸을 잔뜩 구부려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붙인 로아드네스가 그제야 눈을 뜨고 날 보았다.
일렁이는 눈의 동공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널 가지려고 황태자가 되려는 거야, 리엔.”
달콤한 숨결을 담은 목소리는 내 입가에 맴돌았다.
아직도 그걸 모르느냐는 어이없는 듯한 웃음이 내 입가에서 흩어졌다.
“누구도 감히,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리엔. 내 말을 아무리 안 듣는 너라도 그만큼 널 지키기 위해 뭐든 할 거라 말했으면 이젠 알아줄 때도 됐잖아.”
“로안…….”
“노에비안 그 새끼가 네 침실에 숨어들었단 소식을 듣고, 난 그날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어.”
내 허리를 강하게 붙든 로아드네스가 하체를 바짝 붙여왔다. 몸을 뒤로 물리려 해도 두 손으로 단단히 허리를 감아쥐고 놓질 않았다.
“불안한 건 난데, 네가 그런 소리나 하면 내가…….”
“미안해.”
“…….”
로아드네스는 여전히 이마를 붙인 채 내 눈을 응시했다.
나는 면목이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의 입에서 ‘도리스 카스타냐 따위’라는 말을 듣고 싶어 심술이 난 것일지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의 앞길에 도리스 카스타냐라는 여자가 최선의 반려라고 하는 소리를 하니까 말이다.
“화도 못 내게 하지. 네가 그런 표정 하면 내가 어쩔 줄 모르는 걸 귀신같이 알고.”
“아냐, 진심이야.”
“리엔, 난 불안해.”
아직 젖은 그의 입술이 서서히 내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깨물고 빨아들이고 다시 깨물고 빨아들이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붉은 흔적과 함께 옅은 잇자국이 새겨졌다.
“널 가져도, 가져도 불안해. 너도 이래?”
그가 흔적을 새길 때마다 움찔거리며 그의 옷깃을 부여잡던 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노에비안 그 새끼가 몇 번을 찾아와도, 내 생각만 해줘.”
“읏…… 응.”
“널 위해 죽으라는 그런 달콤한 말은 내게만 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들었나 보다.
날 위해 죽으라는 말을 마치 사랑한다는 말로 바꿔 생각하는 듯한 로아드네스는 내가 더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내 입술을 삼켰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다시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여린 살을 훑어내렸다.
버거울 정도로 뜨거운 숨결이 다시금 입안을 파고들고, 다급하고 뜨거운 손이 아까 풀다가 만 단추들을 거칠게 뜯어버렸다.
그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몸이 휘청이다가 등이 닿은 곳은 냉기가 도는 거대한 통창이었다.
“……로안.”
“어때?”
겨우 떨어진 입술이 내 검지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려 내려다본 곳은 겨울 동백이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이었다.
다소 삭막한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멀찍이 황궁에 있는 우리의 ‘작은 숲’ 입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넝쿨 터널도 보였다.
“저기는……?”
“수도를 다 청소하고 나면. 그래서 네가 수도로 돌아오면 보여주려고 만드는 중이었는데…….”
내 손가락을 하나씩 깨물며 반응을 살피던 로아드네스가 완전히 등을 지고 선 내 뒤로 불쑥 다가와 슬그머니 내 두 팔을 감싸 쥐었다.
“로안?”
로아드네스는 자연스레 내 두 손을 창에 올려두고 그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는 차가운 창문의 냉기가 손등에는 그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