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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40화 (140/171)

140화. 성녀 추대식

회의장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장소를 제공한 레일론 백작은 귀족들이 떠들든 말든 관전 중인 2황자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오만하고 무심한 얼굴을 보자 화가 끓었다.

성녀와의 결혼 이야기가 조금만 나와도 싸늘한 시선을 던지니 성녀 추대식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몇 시간 뒤면 성녀 추대식인데. 전하께서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좀 더 나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내 자리까지 마련해 두곤 뭘 더 어쩌라는 거지?”

“수도로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행사에서 성녀님과 뭐라도 해야 사람들이 안심할 게 아닙니까?”

“성녀가 될 형수와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란 말인가.”

말을 꺼낸 이의 입이 꾹 다물렸다.

회의 내내 이런 요구와 대답의 연속이었다.

2황자는 자신을 지지하겠다며 몰려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검을 빼 들어 목을 그을 수도 있다는 듯 응시할 때가 있었다.

악명과 위명을 동시에 가진 2황자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그런 기운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나마 황후와 에페로 쪽에 한 발짝 걸치고 있던 카스타냐 공작이 쓰러졌다.

이제 와 버려뒀던 9황자에게 붙기엔 기반도, 명분도 없었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자신이 다시 황태자비가 된다면 황태자파 전원을 2황자파로 탈바꿈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던 말만 철석같이 믿은 귀족들은 애가 탔다.

변치 않는 영광을 약속한 도리스가 로아드네스와 이뤄지지 않는다면, 기껏 돕기만 하고 버림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늑대처럼 살아온 2황자를 컨트롤하려면 ‘성녀’ 도리스라는 목줄을 채워둘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진정 황위 경쟁에 뛰어드실 마음은 있으신 겁니까?”

“저희는 전하의 의지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황제 폐하께서 여론에 귀를 더 기울이신다면 언제든지 황태자 자리가 9황자 에페로 전하께…….”

불만을 누르고 있던 몇몇이 툴툴거리기 시작하자 로아드네스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볼멘소리하던 입이 딱 다물렸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가슴을 치던 레일론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저희는 한배를 탔습니다. 전하를 지지하고 싶어 모인 사람들을 제대로 쓰시려면 명분을 주셔야지요. 그동안 내내 론타의 ‘성자’이신, 어진 군주가 되실 바르데날도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자부심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현황후의 적자이신 9황자 전하를 지지하지 않고 전하를 황태자 전하로 추대해드리기 위해서는 저희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형사취수제. 그 낡은 법안을 어떤 노력으로 다시 끌어올렸는지 들으신다면 감격해 눈물이라도 흘리실 겁니다.”

시스코메틴 백작이 말을 보탰다.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는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로아드네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하자 레일론 백작이 머리를 짚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한참 로아드네스를 노려보던 레일론 백작이 깊은 한숨을 쉬곤 목소리를 낮추었다.

“찝찝하신 것 압니다. 누가 제 형수와 살을 맞대고 부부로 살고 싶겠습니까?”

그의 발언에 로아드네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됐다, 됐어! 역시 도리스 카스타냐가 문제로군.

레일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허수아비 황태자비로 성녀의 이미지만 이용하시고, 후에 황후로 세우신 뒤 황비를 여럿 들이십시오. 제 딸 칸나가 수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건…….”

“자네. 이전에는 자네 딸을 트로비카 대공에게 주려 하지 않았나? 전하, 제 딸 아이린이야말로 적임입니다. 황태자비 전하를 지척에서 모신 경험이 있으니 서로 잘 지낼 겁니다.”

시스코메틴 백작이 지지 않고 말을 거들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또다시 회의장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젊고 아름다운 미혼의 주군에게 딸을 바치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가운데서, 로아드네스가 조용히 회의록을 작성 중이던 빈센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내 연인인 아카시아 백작 부인의 처분은 어찌할지 의논하고 싶군. 그녀 역시 내 옆자리를 원할 텐데.”

“황위가 코앞이신데 남편 잃은 미망인은 이 회의의 주제에 맞지 않습니다.”

“그녀가 질리던 참인데 잘되었군.”

레일론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멀리 있던 서부의 한 귀족이 음흉하게 입을 뗐다.

“황위로 가는 길에 피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방법을 알아 올까요?”

“생각해보지.”

여전히 빈센토와 시선을 교환하던 로아드네스가 심드렁히 답했다.

그러나 나른하게 뜬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서, 빈센토는 곧장 그의 의중을 알아들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을 고르고 계시군.’

도리스가 주는 성녀의 남편이라는 지위 따위, 안중에도 없으신 거다.

정말 로아드네스답다고 생각하며 빈센토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어찌 처분할지 신나게 떠들어대는 이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

유례없이 많은 인파가 수도로 몰려들었다.

에페로와 나는 신관들이 입는 하얀 정복을 입고 하얀 망토에 달린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추운 날에도 광장이며 시장이며 사람으로 가득 찼다. 여관들을 지날 때마다 문 앞에 만실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급하게 꾸민 것치고는 대단히 화려하고 거대한 금빛 장식품들이 길 곳곳에 놓여 있었다.

누가 훔쳐 가려 해도 훔쳐 갈 수도 없을 만큼 웅장했다.

에페로의 말로는 태어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수도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던가.

“온 세상이 하얗네요. 곧 추대식이 시작할 때 눈이 내린다면 더 그럴듯하겠어요.”

그 외 시장이며 주택가 곳곳에 드리워진 하얀 휘장을 툭툭 건드리며 앞선 에페로가 말했다.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와, 아직도 날 의심하는 거? 노에비안 그거 내가 알린 게 아니라니까요? 형님이 설마 저택을 감시할 사람 하나 안 두고 갔다고 생각해요? 진짜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순진하다니까.”

“말 걸지 마시라니까요?”

“……나 부인 친구 맞죠? 아직은, 맞죠?”

나는 황궁 밖으로 잘 나다닌 적이 없었기에 다소 신나 보이는 에페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에페로의 입이 가볍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자꾸 모르는 척 발뺌을 하니 얄미웠다.

“조심해요.”

에페로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다가 인파 속에서 날 끌어당겼다.

“에페로 님. 에페로 님 머리카락이나 잘 가리세요. 눈에 너무 띄네요.”

“자기 소개해요? 그런 금발은 엘라콘에서도 흔하지 않거든요?”

대부분 갈색이 섞인 금발이 많았지 순금 같은 금발은 드물었다.

나는 잘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괜스레 매만지다가 로브 망토의 후드를 더 눌러 썼다.

그리고 곧장 에페로의 등을 툭 쳤다. 잔말 말고 앞으로 가라는 뜻이다.

“일국의 황자를 무슨 시종쯤으로 생각하는 건지, 뭔지…… 형님이 부인에게 거의 시종이나 다름없이 군다 해서 나까지 그런 건 아니거든요?”

가는 내내 툴툴거리던 에페로와 내가 곧 도착한 곳은 수도 중앙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단상이었다.

노점상이 철거되어 광장 주변 거리도 더 넓어졌다.

수도로 몰려든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대신관 텔른과 성녀로 추대될 도리스가 곧 저 단상 위에 설 것이다.

정확히 정오에 시작되는 행사를 위해 단상 뒤에 거대한 천막을 쳐놓고 신관들이 모여 있었다.

에페로와 나는 신관 복장을 하고 저곳에 스며들어 식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형님한테 계획 얘기 안 했죠? 나한테 자세히 얘기 안 한 건 그래, 나도 내 입이 좀 가벼우니 이해하겠는데. 형님한테는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 생각엔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지만, 그는 제가 지금 같은 시기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위험하잖아요? 모시던 주인한테 그런 독극물까지 받아놓고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위험하다고 숨어만 있다면 무슨 대의를 이루겠어요? 로안에게 로안의 방식이 있듯이, 제게도 제 대의를 이루는 저만의 방식이 있어요. 로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는 저와 제 주변을 위해 준비해온 게 있을 뿐이라고요.”

에페로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빤히 보다가 제 모자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거 알아요? 부인 가끔…… 진짜 멋있는 거.”

나는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에페로의 눈을 피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뿌우우우-.

뿔 고동 소리가 바닥을 울릴 만큼 크게 울렸다.

“……시작이네요.”

주인공이 바뀔 성녀 추대식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

성녀 추대식은 그 옛날 황제 즉위식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광장을 꽉 메운 사람들은 거대한 단상 위, 상석에 위치한 황제 부부를 보며 환호했다.

황궁 밖에서 황족들을 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부부의 곁에는 요즘 가장 뜨거운 소문의 중심인 2황자 로아드네스가 앉아 있었다.

삐딱하게 앉아 있긴 해도 늠름하고 영준한 용모를 뽐내는 그를 보며 단상 아래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성녀 추대식이 아니라, 약혼식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네에-?”

“황태자비 전하께서 성녀가 되시면, 곧장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과 2황자 전하의 결합을 공표하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무리 형사취수제가 부활했다 해도, 2황자께서 그것을 받아들이실까요?”

“불길한 붉은 눈이라는 소문을 잠재우려면 성녀님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황위가 코앞인데 누가 그것을 거부하겠어요? 싫다고 해도 후에 마음에 드는 여인을 황비로 들이면 그만인 것을요.”

“그게 미망인인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아니길 바라야죠.”

“설마요.”

약간의 비웃음을 머금은 젊은 영애들의 시선이 단번에 로아드네스에게로 쏟아졌다.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을 보며 잠깐 감상에 젖은 듯 보이던 붉은 눈이 그들에게로 향하자 젊은 영애들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멀찍이서 뵙기도 했고, 무수히 많은 가십지와 신문에서 초상으로 뵈었지만…….”

“불길하든 아니든 한 번쯤 품에 안겨보고 싶은 분임엔 분명하죠.”

황태자가 될지도 모르는 2황자는 몹시 아름다웠다.

위험하다는 말이 되레 어린 영애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그들은 도리스의 등장을 기다리는 제 부모들에게로 간절한 시선을 옮겼다.

그들 못지않게 욕망 가득한 시선이 로아드네스는 물론이고 축사를 시작하는 대신관의 입으로 향했다.

약점이 있는 황가의 후계는 귀족들에게 오히려 좋았다.

황태자파 대부분의 귀족들은 에페로를 지지하기엔 지나치게 멀리 오기도 했고 말이다.

황태자의 아내였던 도리스를 따라 2황자를 지지해,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불길한 붉은 눈’의 괴담을 퍼트리면 황권은 서서히 약해지리라.

황태자파 중진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들의 눈에 로아드네스의 눈치를 보는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황후 그레이스와 카뉼라 윈스터, 그리고 아드리엔의 눈치를 보는 대신관 텔른의 떨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말이다.

대신관 텔른이 단상 위에 등장함과 동시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온통 새하얗게 차려입은 도리스가 단상 아래에서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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