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죽은 이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순간
“상서로운 눈이 내리는 오늘,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내린 신탁을 공표하고 성녀를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목소리가 증폭되는 성물을 통해 대신관 텔른의 음성이 광장 구석구석 퍼졌다.
텔른이 성녀가 누구라고 발표하기도 전에, 도리스가 먼저 움직였다.
하얀색 옷을 차려입은 도리스가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와 중앙에 선 것이다.
텔른의 눈이 빠르게 흔들리더니 곁에 있는 아드리엔을 힐끔 보았다.
아드리엔이 흔들림 없이 그를 오시했다.
입술이 바짝 메마른 텔른은 제게 방긋 미소 짓는 도리스를 애써 외면하며 자리를 잠깐 비켜섰다.
도리스가 등장했던 곳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비죽 보이는 신관 한 명이 다른 신관들과 함께 무언가를 단상 위로 가지고 올라왔다.
거대한 상자 같은 것에 하얀 천을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저게 뭘까요?”
“성물인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자 자비롭게 웃고 있던 도리스의 눈썹이 비틀렸다.
예정에 없던 순서였다.
“예하,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저를 위한 선물이라도 준비하신 건가요?”
도리스가 뭐라 말을 덧붙이기 전에, 텔른은 신관들이 가지고 올라온 ‘무언가’에 격렬히 반응했다.
그의 곁에 보조로 서 있던 아드리엔이 그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예하.”
“…….”
텔른은 방금 에페로가 들여온 저 하얀 비단에 감싸인 물건이 대공비 아드리엔의 시신임을 확신했다.
정녕 이 부인의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인가? 혹은 또 다른 사기극에 휘말리는 게 아닌가?
그가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카뉼라가 눈을 번뜩이며 텔른을 주시했다.
텔른의 다리가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말 그런 신탁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아카시아 백작이 살아 있는 기적을 보았지만. 그 역시 처음부터 죽음을 조작했다면 어쩐단 말인가?
“……신탁을 말씀하시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불쌍한 대공비를 위한 기도 정도는 해주시죠.”
아드리엔의 바람 같은 속삭임에 텔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달싹였다.
“예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도리스의 낮은 외침이 신호탄이 되었다.
텔른은 카뉼라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하얀 천을 거둬냈다.
“저게 뭐야?”
“황족의 시신 같은데?”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스듬히 세워진 유리관 안에 아름답게 잠든 듯 누운 여인의 시신이 있었다.
***
‘도대체 이게 왜 여기……?’
미친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제 아내를 너무 사랑해 시신을 파헤쳐 보관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꼴이라면 모를까 살아 잠들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엔의 시신은 도리스의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시신이 눈앞에 있었다.
단상 아래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도리스의 머리로 한순간 피가 몰렸다.
도리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했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로아드네스의 자세가 바로 세워졌다.
여유가 넘치던 얼굴이 뻣뻣하게 굳더니 곧장 제 곁에 있던 닐에게 뭐라 뭐라 명령을 하는 게 보였다.
‘로아드네스의 귀여운 장난질이 아니야?’
“예하. 이게 무슨 짓이죠?”
타깃을 바꾼 도리스가 잇새를 짓씹으며 속삭였다.
텔른은 자신을 쏘아보는 도리스의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시고, 남편의 욕심으로 무덤이 파헤쳐져 안식을 취하지 못하셨던 트로비카 대공비 전하를 위한 기도를 먼저 드리려 합니다.”
“예하, 이게 지금 무슨……!”
“전하.”
제 말을 애써 무시하는 텔른의 옷을 잡아당긴 도리스는 순간 자신을 저지하는 하얀 손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전하, 식을 방해하시면 안 되죠.”
“!”
그리고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빌어먹을 블리에 아카시아가 멀쩡히 살아 눈앞에 있었다!
대신관의 손짓에 맞추어 죽은 대공비를 위한 기도가 시작되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두 손을 모으기 시작했다.
졸지에 순서가 밀려난 도리스는 기도 소리가 귓전을 웅웅 울리는 내내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아야 했다.
귓속으로 바람이 들어와 온몸과 마음을 헤집었다.
“선물은 잘 받았어요, 전하. 향이 참 좋더군요.”
기도 소리 중간중간 바람같이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신경이 무척 거슬렸다.
‘노우라 주세타 이런 멍청한 여자를 봤나!’
그 멍청한 여자와 하녀들이 자신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저 천박하고, 제 주제를 모르는 블리에 아카시아가 분명 금발로 로아드네스를 꼬여낸 것이다!
그리고 도리스가 주인공이 될 이 자리에서.
로아드네스의 아내가 될 이 자리에서.
아드리엔을 위하는 척 시신까지 가져와 구경거리로 만들고 로아드네스의 점수를 따려는 게 분명했다!
주변을 의식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도리스가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더 이상 저 천박한 년에게 가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곱게 죽는 법을 선물해 줘도 아득바득 기어와 속을 뒤집는 꼴이라니…….”
“……전하?”
약간 당황한 여자의 목소리에 도리스가 입매를 더 비틀었다.
“순진한 얼굴로 로아드네스에게 관심 없는 척. 대공을 사랑하는 척…… 대공이 루벨탑에 갇히니 이젠 대놓고 대공비를 따라하며 로아드네스를 유혹했어? 천한 몸에 신관의 옷이라니. 그 꼴은 또 뭐야. 내 언제고 네가 날 방해할 줄 알았어.”
어느새 텔른의 뒤로 숨은 도리스가 자신을 방해하는 여자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겉으로 보이는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 끝은 서서히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다시금 끌어 올려진 입술에서 표독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멍청한 년. 이제 아드리엔의 망령 같은 건 아무 소용없어. 로아드네스는 나 없이 황제는커녕 황태자도 될 수 없고. 우리는 운명 공동체가 될 거거든.”
시신과 여자를 번갈아 보던 도리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어둠 그 자체인 로아드네스를 성녀의 밝은 빛으로, 내가 비춰줄 거야. 너같이 천박한 년은 절대 도울 수 없는 방법으로.”
살을 파고들던 도리스의 손톱 끝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어차피 바르데날도나 내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귀족도 아닌 너 같은 게 그동안 참 오래도록 과분한 부귀를 누렸지.”
도리스가 붙들고 있던 손목을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그러게…….”
잠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던 도리스가 점점 평정을 찾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곱게 죽여주려 할 때, 죽었어야지.”
빌어먹을 아드리엔 피레타를 위한 기도가 끝나자 도리스가 여유롭게 단상 중앙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이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차례였다.
***
텔른의 시선이 기고만장한 도리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공비 아드리엔의 유리관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대공비가 죽은 지 어언 100일 하고도 얼마나 더 지났던가.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잠든 듯 죽어 있을 수 있나?
시신은 썩어있기는커녕 방금 잠든 듯 아름답고 싱그럽기까지 했다.
“저 여자가 제게 뭐라 말하는지 들으셨나요, 예하?”
바람처럼 스치는 아드리엔의 목소리.
그를 찌를 듯 노려보는 카뉼라 윈스터의 시선.
“이대로 저 여자를 성녀로 삼아 주신의 얼굴에 먹칠을 할지. 진짜 주신의 뜻을 세상에 알릴지. 결정하세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쥔 텔른은 문득 느껴지는 또 다른 시선에 상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늘 겁에 질려 있고 우울함이 얼굴에 밴 황후 그레이스가 간절히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황자가 한 명씩 죽을 때마다 가슴을 치며 울던 그레이스가 주신의 석상을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을 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텔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로에 놓였다.
새로운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는…… 너무나도 정치적인 발언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대공비 아드리엔이 살아난다는 신탁은…….’
죽은 줄 알았던 아카시아 백작이 멀쩡히 살아 걸어 다니는 모습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쉬울 것 없는 귀부인이 신관으로 변장하고 제 뒤에 서서 기이하리만치 자신하는 얼굴도.
그리고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책임졌던, 그의 신이나 다를 바 없는 카뉼라 윈스터의 끈덕진 시선도 덤이었다.
자신을 구원해줄 신처럼 보고 있는 황후 그레이스까지 보자 텔른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텔른에게서 바라던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참고 있던 도리스는 자신이 나서기 위해 한발을 더 내디뎠다.
“저는 앞으로 성녀로서, 돌아가신 론타의 성자 바르데날도 황태자 전하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잠깐.”
결심을 마친 텔른이 도리스를 막아서고 단상 앞으로 나왔다.
“신탁이…… 또 있습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죽은 대공비.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곧 깨어날 것이다.”
텔른의 떨리는 목소리에, 승리를 자신하던 도리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떨리는 텔른의 눈이 후드를 푹 눌러쓴 아드리엔에게로 향했다.
아드리엔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섰던 도리스가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도리스의 뒤로,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아드리엔은 텔른을 이끌어 블리에가 누워 있는 유리관 앞에 섰다.
단상 아래에 있던 롯시와 잠시 눈을 마주친 아드리엔이 유리관에 손을 얹었다.
이날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훈련했다.
몸속에서 고요히 흐르는 마력을 깨워 유리관으로 흘려보내자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유리관 밑의 돌이 그것을 흡수하는 게 느껴졌다.
텔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드리엔을 따라 유리관에 손을 댔다.
딸각, 하고 유리관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텔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불안으로 가득하던 텔른의 두 눈에 점점 이채가 돌았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에 흐르는 땀이 그대로 유리관 표면에 자국을 냈다.
그리고 텔른과 아드리엔은 똑똑히 보았다.
손가락이 꿈틀, 움직이는 블리에의 몸을.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진 텔른의 눈이 그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아드리엔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제가…….”
“대, 대공비가…….”
“신의 뜻이라고 했잖아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아드리엔의 목소리에 텔른의 몸에서 떨림이 멈추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텔른의 두 눈에 안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죽은 대공비,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깨어날 것이다!”
그는 유령에 빙의한 사람처럼 눈을 까뒤집고 벼락같은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진정한 성녀,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신의 의지를 가지고 아바델리아에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