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감춰져 있던 진실이 떠오르고
내 뒤에 길게 늘어서 있던 신관들마저 대신관을 따라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신탁인가 봐!”
“맙소사, 신탁받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다니!”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 블리에의 눈꺼풀이 꿈틀했다.
그 모습을 본 텔른이 급하게 숨을 삼키며 외쳤다.
“신의 축복을 받은 진정한 성녀,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신의 의지를 가지고 아바델리아에서 돌아올 것이다!”
목소리를 까뒤집은 대신관 텔른의 모습에 모두 헛숨을 들이켜고 있을 무렵.
나는 똑똑히 보았다.
번쩍, 눈을 뜬 창백한 얼굴을.
나와 똑같은 빛깔로 반짝이는 블리에 피레타의 연녹빛 눈동자를.
그리고 블리에의 눈을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순간!”
“예하!”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도리스가 공간을 찢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도리스를 뒤로하고, 이미 기적에 매료된 대신관 텔른이 더 크게 소리쳤다.
“황궁 깊숙이 감춰져 있던 진실이 떠오르고! 론타에 새로운, 새로운!!”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올 것 같이 우레와 같은 음성이었다.
“새로운 태양이! 다음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
흐으으억. 흐억, 으헉!
눈앞에서 기적을 목도한 텔른의 입에서 결국 거친 숨과 함께 각혈이 터져 나왔다.
웅성거림이 넘실대던 광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짐은 물론.
마침내 대신관 곁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더 놀라운 기적은 다음에 이어졌다.
덜컥!
기울여 세워둔 유리관 뚜껑이 열렸던 것이다.
“맙소사!”
창백한 금발의 여자가 비틀비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단상 아래 사람들이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리고.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두 눈이 터져 나올 듯 커지고.
그에 숨을 들이켠 대신관 텔른이 마침내 쓰러지기 직전까지 피를 토하며 외쳤다.
“다음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
정확히 벌떡 일어나있는 로아드네스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
성스럽고 경건했던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탁이다! 신탁!!”
“성녀는 황태자비 전하가 아니라…….”
“죽은 대공비인가?”
“대공비 전하께서 성녀님이시다!”
“아바델리아에서 신의 축복을 받고 돌아온 성녀님이시다!!”
귀가 터질 것 같은 환호성이 시작되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의 함성은 절규에 가까웠다.
나는 귀가 먹먹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신관의 품에 안겨 겨우 정신을 차린 대신관을 부축했다.
“아드리엔…… 피레타……? 말도 안 돼……!!”
유리관을 짚고 겨우 비틀비틀 선 블리에를 보며, 도리스가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다.
“안 돼.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얼이 빠져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도리스를 무시하고 나는 고요히 블리에를 응시했다.
헝클어졌지만 깨끗한 금발.
꽃송이들을 매달고 있지만 말쑥한 드레스.
조금 핼쑥했지만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짧은 순간 수많은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짚고 한참 고개를 흔들던 블리에가 시선을 느끼곤 나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한번 왈칵, 구기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귀가 터질 것 같은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조용히 블리에를 기다렸다.
나와 똑같은 색을 가진 블리에의 초록빛 시선이 나와 대신관.
그리고 얼빠진 도리스와 상석에 앉은 황제. 그리고 단상 아래에 모여 있는 수만의 관중을 찬찬히 더듬었다.
블리에의 시선이 지나가는 곳마다, 환호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느리게 흩어지던 블리에의 시선이 한곳에서 약간 오래 머물렀다 떨어졌다.
피레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자신을 활활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롯시가 있는 곳이었다.
뭉근하게 풀어졌던 눈의 초점이 서서히 반짝이며 돌아오기 시작했다.
롯시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발견한 눈이 왈칵, 아주 야살스럽게 휘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듯 얄망궂게 비틀린 입이 호선을 그렸다.
창백할 만큼 하얀 손이 주먹을 말아쥐고 제 몸 안에 도는 피를 느끼듯 눈을 감았다 떴다.
숨도 못 쉬고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입을 헤 벌렸다.
블리에가 손을 펴고 뭐라 속삭이자 롯시의 손에서 순식간에 책이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죽었다 살아 돌아온 성녀, 트로비카 대공비가 된 블리에의 입에서 나올 첫마디가 무엇일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등장한 낡은 책에 흥분했다.
“성물이다! 성물!”
“신의 계시다!”
그리고 그 기록을 알아본 황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성스러운 불이라며 거대한 항아리에 몇 개씩 지펴놓은 불 위로, 블리에가 그 책을 던졌다.
책은 불타기는커녕 블리에의 낮은 속삭임과 함께 허공에 떠오르고, 롯시가 바르데날도의 과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을 때처럼 저절로 촤라락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그리고 허공에, 기적처럼 글자가 새겨졌다.
나는 그게 블리에가 자신의 마력으로 행한 일임을 확신했다.
“초대 황제 키르프스는 배신자다!!”
대신관 텔른이 그 앞으로 달려가 목놓아 외쳤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수많은 기적에 정신을 거의 놓은 상태였다.
“론타 황실의 상징은 배신자 키르프스의 푸른 눈이 아니다. 칼데이온의 붉은 눈이……!”
자신이 뭐라 지껄였는지 인식한 텔른의 눈이 점점 제정신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속도를 붙인 입을 멈출 순 없었다.
“칼데이온의 붉은 눈이, 진정한…… 진정한 론타 황실의 상징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롯시의 얼굴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왈칵, 일그러지고.
일을 저질러버린 블리에는 나른한 눈으로 롯시에게 주었던 시선을 내게 주었다.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그녀는 아까 지었던 그 야살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
창백하게 질려 있던 황제가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런 황제의 반응보다는 불타지 않는 낡은 책과 그 책에서 떠오른 글자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줄줄 외친 대신관에게 쏠렸다.
깨어난 대공비가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이 기록은 그동안 황실에 의해 숨겨진 기록입니다. 불타지도 않고 어떤 해를 가해도 찢어지지 않는 기록.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성물이라 부르지요.”
누군가 신을 부르짖기 시작하자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인간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주신께서 주신 마력이라는 힘을, 푸른 눈의 황족들이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감춰오고 국력을 약하게 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 기록을 인정하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은 졸도하기 직전인 황제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황제의 시선은 살아난 대공비의 시신 뒤.
아까까지만 해도 줄곧 하얀 천이 씌워진 채 대기하고 있던 유리관으로 향했다.
누군가 벗겨놓은 천이 드러낸 또 다른 유리관 말이다.
세워지지 않아 상석에서만 보이는 그 유리관에서, 황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앞에서 그 많은 소란이 있는데도 황제의 시선은 그곳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점점 얼굴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레티나.”
황후 레티나.
황제 율리어스의 첫사랑이자 닮은 사람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
로아드네스의 붉은 눈이 훗날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몰라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남은 유일한 아들이기에 황위를 물려주려 했던.
정말 그만큼 절절하게 사랑하는 여자.
그 여자가 방금 잠든 듯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마치…….
‘마치 쿠로세다 남작 부인처럼.’
뻣뻣하게 굳은 시선이 어느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만큼 굳어 있는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했다.
“……로안.”
“맞습니다.”
황제가 휘청했다.
그레이스 황후가 낮게 비명하며 그를 부축했다.
“맞습니다, 아버지. 바르데날도의 짓입니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에 황제가 거칠게 자신의 앞섶을 긁었다.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정면에 못 박혀 있었다.
“바르데날도가 저 기록을 봤습니다. 어머니의 유지를 듣고, 죽은 어머니를 놓지 못해 황가의 비밀 서고를 들락거리다가 저 기록을 봤습니다. 그래서 사는 내내 저를 증오했다 합니다. 아버지가 죽은 붉은 눈의 다른 형제를 보고 그랬듯이요.”
“로……안……!”
“그리고 바르데날도가 감춘 어머니의 진짜 유지는…….”
희게 질려가는 황제의 얼굴에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그의 목을 조르지 않았지만, 2황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던 황제는 흡사 여러 명에게 목을 졸리고 있는 사람처럼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밑에서 대기하던 주치의들이 올라오기 직전에야, 비틀비틀 다시 일어난 황제가 대공비의 유리관 뒤 어딘가에 멈춰서 한참을 굳어 있었다.
단상 아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레티나 황후의 유리관 앞에서.
목에 핏대가 불거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황제는 죽었다 살아난 대공비와 대신관,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회한에 젖은 모습은 처음이라, 모두가 숨을 죽였다.
거친 숨을 쌕쌕 몰아쉬던 도리스마저 황제의 침묵을 방해할 수 없었다.
“기록을…….”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으로 증폭된 황제의 목소리가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기록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황제가 레티나 황후의 유리관 위로 몸을 쓰러뜨리고 낮게 울었다.
주치의와 기사들이 깜짝 놀라 황제를 부축해 상석으로 도로 데려가 몸을 살폈다.
***
“붉은 눈은 가장 강력한 마력의 상징, 사람들을 지키는 불길이 되어 마물을 다 태워버릴 강력한 힘의 상징, 밝은 빛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빛입니다.”
되살아난 대공비의 목소리에 행사장의 혼란스러움이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제 희게 질린 사람들은 단상 아래 귀족들이었다.
론타의 근간을 뒤집는 기록을 인정해버린 황제.
“죽은 이가, 죽은 이가 다시 살아오는 순간. 황궁 깊숙이 감춰져 있던 진실이 떠오르고 다음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
잇따른 기적에 혼이 나간 채.
몸은 축 늘어진 주제에 눈에는 온갖 경이로움의 빛으로 가득 차 문제의 그 신탁밖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람처럼 입만 움직이는 대신관.
죽었다 살아나 신의 뜻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껄이는 트로비카 대공비.
그렇다면 도리스는?
황태자파의 귀족들은 도리스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 걸 느꼈다.
그중 서부의 귀족들은 도리스의 시선을 피하지도, 받아 치지도 못한 채 굳었다.
“저런 헛소리를 듣고도 이 나라의 중신들이 가만히 있는 게 말이 되는가!”
도리스가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단상 끄트머리로 바짝 다가온 도리스의 얼굴은 이제 악귀나 다름없었다.
“나를 비호하지 않고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내 아버지가 아시는 날엔…….”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멈추었다.
도리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새로이 등장한 성녀에 압도된 채.
진실이라는 헛소리에 압도된 채 굳어버린 서부 귀족들의 얼굴은 아버지 카스타냐 공작에게 충성하던 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아-!’
그제야 알았다.
빌어먹을 서부의 귀족들의 주축은 누워 있는 자신의 아비였다.
그리고 그 아비는 다름 아닌 자신이 눕혀버렸다.
“어서. 어서 나를 지지해. 내 말만 믿겠다고 해. 이 쓸모없는…… 쓸모없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싸늘한 시선에 도리스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빠르게 내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