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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43화 (143/171)

143화. 다음 태양이 론타를 밝게 비춘다

“인정 못 해요!”

정적과 웅성거림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도리스가 사력을 다해 외쳤다.

단상 아래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호의보다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대신관 예하! 예하께서는 정말 하늘 아래 단 하나의 부끄러움도 없으신가요? 제 아버지의 상태를 예언한 것도! 북부에 마물이 출몰할 것이라는 예언도! 전부 예하가 아닌! 이 도리스 카스타냐의 입에서 나왔잖아요!”

이제 시퍼렇게 질린 건 황제도, 귀족들도 아닌 대신관이었다.

‘감히 날 배신해?’

도리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대놓고 대신관에게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새 물어뜯은 아랫입술에서 옅은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길쭉하게 위로 찢어지는 입을 막을 순 없었다.

‘절대 혼자는 안 죽어. 아직 기회는 있어!’

“뭐야? 뭐가 진실이야?”

“황태자비 전하께서 예언을 하신 거라면, 성녀는 대공비가 아니라 황태자비 전하가…….”

“방금 보고 들은 신탁이 거짓이라고?”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났잖아. 그 옛날 성녀 마리니께서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셨는데…….”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하는 대신관의 표정에 더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나야.’

도리스는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저절로 몸이 떨리면서도, 차갑게 식어버린 심장 아래 끓어오르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속임수를 쓴 건지 몰라도, 결국엔 내가…….’

그리고 그때.

“비 전하.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세요.”

지금 이곳에 들려서는 안 되는 음성이 소란을 갈랐다.

그다지 큰 목소리도. 생소한 단어를 말한 것도 아니었지만, 목소리에 담긴 진심 어린 경멸이 주위를 다시 정적으로 만들었다.

불붙은 도리스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 단상 아래로 옮겨갔다.

“주신과 황제 폐하의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여온 도리스 카스타냐를 고발합니다!”

“노우라 주세타!!”

노우라.

노우라 주세타.

도리스가 단상 위로 올라갈 때까지 곁에서 수행하던 여자.

시커멓게 타오르는 눈으로 언제부터였는지 도리스를 노려보던 노우라 주세타.

그녀의 가장 멍청하고 충성스러운 시녀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노라,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비 전하께서는! 대신관 예하를 속이고 가짜 예언을 했습니다! 저를 속여 쓰러진 카스타냐 공작님께 향으로 위장한 독을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모함이야!”

“충실한 시녀였던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같은 방법으로 죽이라 제게 사주하셨습니다!”

절절 끓어오르는 절규가 단상을 뒤흔들었다.

노우라 주세타가 얼마나 오랜 기간, 황태자비를 모셨는지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심지어 황실에 관심이 많은 평민까지 알 정도였으니까.

핏발 선 눈으로 낮게 욕설을 씹어뱉은 도리스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노라! 거짓은 그만 말해요!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증거도 없는 말을…….”

“깨어나신 대공비 전하의 죽음 역시. 전하께서 사주하신 일입니다!”

“아니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가련한 척이라도 하려던 도리스가 눈을 까뒤집고 소리쳤다.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노라! 감히 모시던 상전을 모함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아무런 증인도, 증거도 없는 막말을!!”

“주세타 자작부인의 말은 사실입니다!”

늙수그레하지만 강한 목소리가 다시금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분노에 찬 도리스의 시선이 노우라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저는 트로비카 대공저의 하녀장, 소피입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제게 대공비 전하께 몸에 좋은 향을 피워주라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향이 독극물인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블리에 아카시아 암살에 실패하고 잠적했다고 생각한 하녀장 소피가 노우라 주세타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예전에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마차 사고 후 납치되셨던 사건이 있었지요? 그 일 역시 제게 사주하신 일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제 죄에 용서를 구하고 성녀 행세를 하려는 도리스 카스타냐를 고발하려 합니다!”

도리스 카스타냐.

아니, 도리스 론타.

론타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 중 한 명.

‘성자’ 바르데날도 론타의 아내로서 자비로운 황후가 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던, 심지어 신탁의 성녀가 아닐까 모두가 믿어 마지않았던 여자.

사람들은 기존에 도리스 론타라는 여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연달은 폭로 속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정답을 원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상석으로 옮겨갔다.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기 직전인 듯 보이는 황제, 유약한 황후, 굳어버린 2황자에게 점점 이어지던 시선들은 마침내 단상 중앙에서 눈을 빛내고 서 있는 되살아난 대공비에게로 향했다.

죽었다 살아난 대공비의 얼굴에 이전 같은 혼란의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바델리아에서 주신께서 내게 그러시던데.”

느른하게 뜬 눈과 비틀린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억울하게 죽었다 살아날 내가 아닌, 성녀를 사칭하는 자가 있다면…….”

얼굴이 터지기 직전인 도리스의 시선이 되살아난 대공비의 뺨에 닿았다.

이성을 잃은 도리스의 눈과는 달리 태연자약한 대공비의 얼굴에 아주 잠시지만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죽어 마땅한 악마라고.”

“이런 미친X이……!”

가감 없이 쏟아지는 욕설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늘 다정하고 자애로운 모습의 황태자비만 알았던 귀부인 중에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저 여자는 악마가 맞아요!”

노우라 주세타가 순식간에 뒤집히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세가 올라 외쳤다.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성녀 같은 게 아니에요! 저 여자는 악마가 맞아요!”

분노의 한계점을 넘은 도리스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노우라가 울면서 웃었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대공비 아드리엔을 죽였습니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황태자 바르데날도전하까지 죽인 게 분명합니다! 제가 증인이에요!”

***

이어지는 폭로로 탄식이 이어지는 서부 쪽 분위기와는 달리.

동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묘하게 상기된 분위기였다.

도리스의 추태와 서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던 피레타 공작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보셨습니까?"

그래. 봤다.

“우리 리엔이 살았습니다!”

단상 위의 블리에 피레타를.

감격에 낮게 소리치는 그레고리는 금방이라도 단상 위로 올라갈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반면 아까부터 자신과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는 블리에를 본 공작은 손이 떨릴 만큼 고요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신관의 옷을 입은 블리에가 대신관을 보좌하며 자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등골이 저릿할 만큼 전율하고 있었다.

‘유약한 아드리엔과는 다른 아이로구나.’

아드리엔이 되살아난 것은 진실인지 속임수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는 제게 서신을 보낸 블리에가 확실히 2황자 로아드네스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쯤은 눈치채고도 남았다.

그녀를 발견한 로아드네스의 눈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로, 론타에 새로운 태양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신탁을 중얼거리는 대신관을 뒤로하고.

서부의 사람들에게 추태를 부리는 도리스를 뒤로하고.

정확히 공작 자신과 눈을 맞춘 블리에가 대놓고 물었다.

‘뭐 하세요?’

“!”

‘약속을 지키세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익숙한 입 모양이 눈에 아프게 박혔다.

***

내가 블리에인 줄 아는 아버지의 눈에 떠오른 욕망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혼란스러워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서서히 단상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로아드네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2황자, 2황자 전하…….”

“2황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되신다.”

“론타의 정통성은 붉은 눈의 2황자 전하께서!”

“가장 강력한 마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분이시다……!”

“어서 황태자비 전하와 관련된 사항들을 엄중히 조사해주소서!”

아직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기적에 매료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들불처럼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 맙소사. 맙소사 부인…… 부인의 예언이…….”

그리고 그 벼락같은 만세 소리와 2황자가 황태자가 될 거라는 웅성거림이 대신관 텔른의 의심을 완전히 지워냈다.

아니, 이미 블리에가 살아난 순간부터 기적에 매료된 텔른의 시선은 나와 로아드네스를 번갈아 보며 경외로 반짝였다.

신의 뜻을 빌려 대의를 이루려 했다는 걸 알면 졸도할지도 몰랐다.

“저희 동부는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아버지의 열렬한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만세 소리에 얹어놓은 멜로디처럼.

단상 아래 귀족들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2황자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가 되셔야 마땅합니다!”

“이 상황을 수습하실 유일한 후계는 2황자 전하께서…….”

덩달아 울부짖기 시작하는 도리스를 보던 서부 쪽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들이 원하던 그림은 성녀인 도리스와 그녀의 후광을 업은 황태자 로아드네스였으므로 독단적으로 로아드네스를 지지한다 외치는 게 맞는 것인가 하는 번뇌가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었다.

나는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함성과 불안의 소리가 높아질수록 찌를 듯이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블리에가 감정을 알 수 없는 아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단상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 로아드네스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였다.

“속보입니다! 속보!!”

단상 위로, 레일론 백작의 아들이자 노에비안의 부관이었던 짐스커 경이 뛰어 올라왔다.

“탈옥하여 추적 중이던 트로비카 대공께서 쫓기던 중 실족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분명…….”

흐느끼듯 토해내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릴 만큼 시끄러워졌다.

로아드네스를 지지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레일론 백작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노에비안이 약속을 지켰다.’

노에비안의 소식을 기다리며 경직되었던 내 입이 드디어 얕은 호선을 그렸다.

“그럼 이제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 살아나신 대공비 전하께서…….”

대신관과 중앙에서 잠깐 밀려났던 내가 한 발, 한 발.

아주 느릿하게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가신 대공 전하의 의지에 따라, 그분께서 직접 만드신 아내상속법에 따라…….”

동시에 이제는 뭘 할 거냐는 듯 나를 보고 있던 블리에의 눈을 보며 빙긋 웃었다.

“트로비카 대공 전하가 되시겠군요.”

“맙소사!”

누군가의 탄식이 이어졌다.

마침내.

되살아난 블리에의 눈에 밝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전하께서 지지하시는 분은 누구인가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잠시 제 팔을 쓸어올리던 블리에는 한참 굳어 있다가 다시금 얄망궂게 눈을 휘었다.

매끄러운 미소에 시선이 빼앗겼을 무렵, 블리에의 시선이 내게서 멀어지고 우리를 보고 있는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했다.

“북부의 주인이자 론타의 유일한 대공인 나,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는 초대 황제 칼데이온의 후예이신 로아드네스 2황자를 태양으로, 제 주군으로 섬기겠나이다.”

단호한 음성이 광장 전체를 휘감았다.

마침내 이루어진 가짜 예언에, 텔른이 감격해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어 보이는 로아드네스의 다소 화난 얼굴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약속했잖아.”

천둥 같은 함성과 폭우처럼 쏟아지는 꽃송이들 속에서, 로아드네스를 향해 그저 조용히 읊조렸을 뿐이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내가 죽이겠다고.”

그런 나를 향해 강렬하게 타오르던 눈이 일순 아연해지고.

“내가 너를…… 황제로 만들어주겠다고.”

다소 격양된 채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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