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네 복수는, 네가 해
아, 그래.
‘아드리엔…… 나는, 반드시 그 새끼를 죽여야겠어.’
‘좋아, 하지만…… 내가 먼저 죽인 다음에.’
그랬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바로 저런 여자였지.
유약한 몸에 가둬두기엔 너무나도 현명하고, 사려 깊고. 빌어먹을 용기가 지나쳐 늘 그를 놀라게 하고…….
‘잔인할 정도로 사랑스럽지.’
깨진 얼굴 사이로 헛바람 같은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래, 이게 네 방식이라면.’
위험의 한가운데 서 있는 아드리엔을 지키고 싶어 손이 떨리면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상황에 사랑에 빠진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헛웃음을 쏟아내던 로아드네스는 곧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단상 중앙으로 더 나아갔다.
불안한 그레이스 황후의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눈이 시커멓게 가라앉았다가 밝게 타올랐다.
쿵! 쿵! 쿵쿵쿵!
“으아아아악!”
단상 주위로 시커멓고 끈적이는 마물들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뒷걸음질치며 도망가는 사람들로 인해 마물 주위의 공간이 비워졌다.
본래는 저 마물들의 이빨이 그가 마력을 흘려보낸 곳에 있는 사람의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달콤한 마력을 얻고자 안달하는 괴물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순간.
감히 아드리엔을 죽이겠다 지껄이던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로아드네스가 싸늘한 얼굴로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아드리엔을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
마물을 이용해 그 사람들을 제거하고 도리스 카스타냐가 주인공인 성녀 추대식을 피로 물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신의 뜻이 도리스에게 있지 않음을 만방에 알린 다음, 그 마물들을 자신이 직접 사람들의 눈앞에서 처단해 이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마력을 스스로 깨우쳐 제어해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로아드네스는 이번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이제 그런 시선 따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날뛰는 마물들의 목을 단번에 틀어쥐었다.
로아드네스는 옆구리에 찬 장검을 망설임 없이 뽑아 들고 기함하는 사람들 사이를 쇄도해 몇 번 휘둘렀다.
“꾸에에에에엑!”
움직이지 못하는 마물 따위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숨에 마물을 처치한 로아드네스가 쏟아지는 마물의 피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감히 아드리엔을 처리하겠다며 입을 놀리던 이들의 얼굴에 검붉은 마물의 피가 흥건하게 튀었다.
“서부는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를…… 이 나라를 지켜주실 진정한 후계로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마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가 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던 서부의 귀족들은 그 무위를 눈앞에서 목도하자마자 벼락같은 소리로 화답했다.
쓰러진 카스타냐 공작과 성녀도 아닌 황태자비 도리스는 더 이상 그들이 붙잡을 동아줄이 아니었다.
“서부는 2황자 전하의 황태자 즉위를 바랍니다!!”
마물의 등장으로 겁을 집어먹었던 사람들이 그제야 몸에 긴장을 풀고 손이 터져라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2황자께서 마물을 처치하셨다!”
“2황자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늘 있어왔던 일이건만.
그가 수도를 떠났던 시절부터 늘 해왔던 일이고 알려졌던 일이건만.
아드리엔이 이끌고 온 변화의 바람으로 인해 그는 마물의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니라 마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선인이 되어 있었다.
공포의 대상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이토록 피를 뿌리고, 온몸에 묻히고도 말이다.
“2황자께서, 나라를 구하고 론타를 밝게 비추실 새로운 태양이시다!”
진정한 후계.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붉은 눈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는 태양 같은 붉은 눈.
‘하.’
아드리엔의 계책일 게 분명한 가짜 신탁 따위가.
그의 찢어지고 짓밟혔던 지난 세월을 촘촘히 꿰매고 바로 세웠다.
피로 얼룩진 옷을 보이고도 이토록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로아드네스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리게 피를 닦아냈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잠시.
서슬이 퍼런 장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드리엔이 두 손을 모아쥐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여리고 아름다운 얼굴에 걸린 건 분명, 걱정이 어리긴 했어도 아주 산뜻한 미소였다.
“성녀님을 사칭하고 죽일 뻔한 도리스 카스타냐를 잡아라!”
“성녀를 사칭하는 자는 악마이니 죽여도 좋다고 주신께서 말씀하셨다!”
“마물을 불러낸 이도 저 사악한 도리스 카스타냐가 아닌가!”
“도리스 카스타냐를 죽여라!”
로아드네스를 향한 환호와 도리스를 향한 비난이 동시에 단상 위로 쏟아졌다.
“아…… 아……!”
갑작스런 마물의 출몰로 몸을 굳혔던 도리스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서부 귀족들 중 그녀와 눈을 맞추는 이는 없었다.
“아, 아……!”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는 입술이 덜덜 떨리며 달싹였지만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그곳에 닿지 않았다.
“죄인을 가둬라.”
고양감을 억누른 낮은 목소리에 닐과 빈센토가 기다렸다는 듯 도리스에게 다가갔다.
로아드네스의 두 부관이 신부처럼 하얗게 차려입은 도리스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안 돼, 놔! 놔!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죄인이라니! 죄인이라니!”
울부짖는 도리스를 뒤로한 채 한참 피를 닦아낸 로아드네스가 비로소 아드리엔을 향해 다가갔다.
***
단상 아래로 끌려 내려가면서도 기세가 죽지 않는 도리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윙윙 울렸다.
공포와 환호. 찬탄과 비난이 뒤섞인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나는 마침내 블리에와 마주했다.
달콤한 꿀 같은 금발.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 그녀는 분명 살아 있었다.
내가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듯 블리에 역시 제 앞에 선 나를 거울을 들여다보듯 한참 바라보았다.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거든.”
“……허?”
방금까지 신나게 힘을 합쳤던 것과는 달리 내 음성에 약간의 적개심이 어려 있자 블리에는 당황한 듯 눈썹 앞머리를 위로 모아 올렸다.
“근데 지금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흐응?”
블리에는 천천히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곤 팔짱을 끼고 섰다. 그녀의 고개가 더 말해보라는 듯 쳐들어지자 내가 재빨리 이어 말했다.
“너. 내가 불쌍하고 한심하고 기막힌 내 상황을 직접 보고 스스로 해결하길 바랐던 거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듯, 그녀의 한쪽 눈썹이 까딱했다.
“내 복수는 내가 하길 바란 거잖아. 아니야?”
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느꼈던 묵은 감정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죽어가는 날 살린 거잖아.”
블리에는 움직이는 내 입술을 신기한 듯 바라보더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젠 네 차례야.”
“……?”
나는 우리를 향해 쉴 새 없이 뭐라 소리치는 아버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네 복수는, 네가 해.”
깨어난 블리에와 아버지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블리에와 나를 번갈아 보던 아버지와 그레고리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근처에서 울고 있는 올리비아와 그녀를 달래는 비앙카도 보였다.
블리에는 비켜서서 길을 내어준 내 앞을 지나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와 오빠를 보고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눈물을 흘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버지의 무엇을 자극했는지 격렬히 반응하던 아버지가 곧 수많은 인파 속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아버…….”
“……그보다 지금은.”
아버지를 쫓아 뻗어진 내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니, 돌려고 했다.
와락-.
곧장 반대편 손목이 끌어당겨지고, 가녀리고 단단한 품속에 나는 와락 안기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블리에의 품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람.
내 남편을 유혹하고 날 멋대로 살려냈던 이상한 나의…….
“널 한 번쯤 안아보고 싶었어.”
……나의 언니.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를, 블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끌어안았다.
***
“전하.”
광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
모두가 기적을 더 가까이서, 새로운 후계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단상으로 몰려가 황량한 곳.
폐부가 터질 만큼 달려 나온 짐스커가 거대한 조각상 뒤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로브 망토를 입고 후드까지 뒤집어쓴 남자는 한참을 아무 대답 없이 단상 위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대공 전하.”
“……이제 그렇게는 안 부르는 게 좋겠군.”
노에비안은 안타까움에 차마 떠나지 못하는 짐스커를 외면하고 그날의 아드리엔을 곱씹었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게 딱 하나 있긴 해.’
‘날 위해 죽어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당신 같은 사람이 탈옥까지 해서 여기 온 건 그만큼 각오는 되어 있겠지. 모든 걸 다 버릴 각오 말이야.’
‘그럼 이제 그 쓸모없어진 트로비카 대공 자리, 내게 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 할 수 있게 도와줘. 당신이 죽어줘.’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는 그런 여자였다.
당신을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애달프게 말하던 그 연약한 여자는 그토록 강한 여자였다.
드러난 여윈 뺨에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흘렀다.
‘당신을 위해 죽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어. 하지만 2황자가 황태자가 되기 위해 당신을 뒤로하고 도리스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 근처를 맴돌아도 모르는 척해줄 순 없나?’
‘아니.’
자신에게 죽어달라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매달렸다.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에페로의 시선 따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는 간절했다.
‘아니, 노에비안.’
이대로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론타든 엘라콘이든 그와 아드리엔을 아는 모든 나라를 제외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드리엔이 혹시라도 로아드네스에게 버림받는다면, 그것이 주신께서 자신에게 주는 다신 없을 기회라 생각하고 평생을 그녀와…… 진짜, 그녀와…….
‘당신도 이제, 당신 인생을 살아.’
하지만 아드리엔의 눈에는 미련은커녕 더 이상 미움도, 경멸도, 분노도 없었다.
연민.
‘황제에게서 받은 허울뿐인 성을 버리고, 그냥 노에비안으로서 어디든 가.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동정.
‘당신이 진짜 누구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가짜에 둘러싸인 삶만 살다 죽을 운명인지. 진짜 당신의 인생을 살지…… 스스로 결정해.’
태어나 누군가가 그런 감정을 담고 자신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늘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길 갈구했던 말이, 이젠 그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의 입에서 나왔다.
되살아난 대공비가 결국 기절하고, 또 한바탕 소란이 있는 동안.
노에비안은 한참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그제야 돌아섰다.
“이제,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짐스커가 차마 닿지 못하는 손을 뻗어 물었다.
노에비안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군.”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다급해진 짐스커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전하 제발 제게만은…….”
“살아서 보고 싶은 사람이 아직 여기 남았으니. 어디든 그 사람을 볼 수만 있다면 족한 곳.”
“전하?”
“그 여자가 슬프고 아프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아마 그런 곳이겠지.”
……이제야 말이야.
부부로 살았을 때조차 그러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가 자조하듯 읊조렸다.
쓸쓸한 바람 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휘저었다.
소문을 듣고 광장으로 더 몰려들기 시작한 수많은 인파 사이로 검은 후드를 쓴 남자가 마침내 발을 뻗어 모습을 감추었다.
짐스커는 이미 보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쫓아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