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블리에의 사정 (2)
정확히 그날부터.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 남자가 광산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를 봐줄 권력자를 늘 찾아 헤맸던 광산주는 노에비안의 관심이 블리에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광산주는 노에비안이 올 때마다 아름다운 블리에가 그를 수행하도록 맡겼다.
그가 광산에 들러 누군가의 명이라며 마나석 관을 주문할 때마다, 블리에는 그가 내미는 주문서를 옮겨 적으며 은근한 시선을 흘렸다.
블리에도 처음부터 그 목석같은 남자를 유혹하려 애쓴 건 아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했던가.
얼음장 같은 남자는 자신이 은근한 눈으로 힐끔거리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아련한 눈깔을 했다.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둬낸 블리에는 이를 악물고 주문서를 꾹꾹 눌러썼다.
‘저 남자를 내가 가져야겠어.’
자신을 죽이려던 아버지 앞에 한 번쯤 나타나고 싶었다.
자신과 나누어야 할 자리를 혼자 독차지하고, 이렇게 잘생긴 남편과 호의호식 잘 살고 있는 여동생도 엿먹이고 싶었다.
시작은 그러했다.
그날부터 블리에는 노에비안을 볼 때마다 대놓고 눈웃음을 흘렸다. 살기 위해 연습했던 표정들이 이럴 때 기막히게 쓸모가 있었다.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곧장 달려가지 못하는 남자.
계속해서 이어지는 누군가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마나석 관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남자.
누구를 위한 관이냐 물어도 자신은 그저 명을 수행할 뿐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남자.
블리에는 자신이 아드리엔의 드레스를 ‘모두’ 잘라버리지 않았던 과거를 칭찬했다.
그날은 딱 하나 남은 미련으로 남겨두었던 아드리엔의 드레스를 입고 출근했던 날이었다.
“블리에라 했나.”
늘 아련한 눈깔로 자신을 바라만 보던 남자가 드디어 제게 말을 걸었다.
“론타에서 일해보고 싶지 않나.”
블리에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
블리에는 이 아름다운 대공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대공 노에비안은 주변에서 몸에 좋은 귀한 약이라도 구했다 치면 곧장 수도의 제 부인에게 보냈다.
블리에는 수도와 엘라콘을 오가며 마나석 관을 운반할 때마다 그와 동반했다.
“몸이 많이 아프신가 봐요, 대공비께서는요.”
수도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블리에가 은근히 노에비안을 떠봤다.
점점 그에게 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블리에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노에비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랑. 자신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짙푸른 눈은 분명, 사랑이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감정이라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내 동생의 인생은 참 완벽하기도 하지.’
블리에는 입매를 비틀며 콧방귀를 꼈다.
‘나만큼 아름다운 데다. 피레타에서는 동부의 공주라 불렸을 테고. 이만큼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운 남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까지.’
노에비안을 탐내기 시작한 뒤로, 아드리엔에 대한 마음이 더더욱 비틀려갔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아드리엔의 몸 상태를 알게 되었을 때는 신이란 게 있다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유리 몸 대공비.’
온 나라가 다 알 만큼 약하고 죽어가는 대공비.
대공비가 약해질수록,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안색도 안 좋아졌다.
블리에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
술에 취한 노에비안이 아드리엔을 그리워할 때마다 블리에는 그의 곁을 지켰다.
론타의 수도에 정식으로 지낼 만한 곳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엔 마음이 들떴다. 그토록 가기 힘들었던 론타가 이 남자의 손짓 한 번으로 제게 활짝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블리에는 자신이 노에비안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에비안이 아드리엔에게 퍼붓는 그 애달픈 사랑과 애정이 가지고 싶어 미쳐 있었던 거였지만.
아드리엔은 그 남자가 아니어도 돌아갈 곳이 있지 않나.
피레타든 어디든. 귀한 공녀인 아드리엔을 반길 사람은 어디든 있을 테다.
‘나랑은 달라.’
그런 블리에에게 더 큰 희망을 심은 건 노에비안이었다.
아드리엔이 노에비안과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아드리엔의 수명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얼굴을 본 순간 블리에는 확신했다.
자신이 분명, 아드리엔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블리에는 늘 지친 모습의 노에비안을 보아 왔지만. 그토록 무너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해요.”
블리에는 충동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인지 욕망인지 구분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블리에는 이 남자가 갖고 싶었다.
아픈 아드리엔을 버리고 자신을 대공저에 들였으면 했다. 낯짝이 두꺼운 귀족들 중에선 자신의 정부를 저택에 들이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노에비안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이렇게 말했다.
“……내 정부가 되겠나.”
“!”
정부.
그동안 그 어떤 달콤한 말도, 행동도 없었던 남자가 하기엔 꽤 뻔뻔한 말이었다.
하지만 블리에는 그 한마디에 엄청난 희망을 보았다.
아드리엔이 사는 대공저로 들어가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질 자신을 상상하자 온몸에 피가 돌았다.
“좋아요. 그렇게라도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될게요.”
그리고 그 꼴을 본 피레타 공작이 두 눈을 붉히며 제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까지 상상했다. 태어나 그만큼 흥분해 본 적은 없을 만큼 들뜨고 말았다.
“하지만 대공비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그때 ‘온전히’ 전하의 정부가 될게요.”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던 블리에가 조건을 걸자 노에비안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지만 잠깐이었다. 늘 헤픈 웃음만 흘려대는 여자가 말하기엔 당돌해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블리에가 대공저로 확실히 들어갈 방법은 그나마 가진 몸뚱아리로 거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 욕망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보던 노에비안에게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
블리에는 수도에 있는 노에비안의 외부 집무실에서 일했다.
엘라콘으로부터 마나석 관을 받아 그가 지시하는 곳에 보내는 일은 무척 쉬웠다.
그쯤 블리에는 노에비안의 신임을 얻어 무척 기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노에비안은 가끔 오는 수도에서도 저택이 아닌 집무실 곁방에서 잠을 자며 블리에를 만났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저택에는 왜 자주 가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그게 아드리엔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시작해서라고 생각했다.
제 몸에 꼭 맞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새 드레스. 단검을 빼 들고 맞서지 않아도 누군가가 지켜주는 삶.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며 그의 정부가 되기 위해 아카시아 백작과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블리에는 무척 만족했다.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신문 1면을 가슴에 품고. 틈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보며 이제는 분노보다는 비웃음이 먼저 입에서 흘러나왔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곁에 당당히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드리엔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상상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얼굴이 똑같으니 어렵게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대공비의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느 날.
블리에는 제 남편이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아드리엔의 꼴을 직접 비웃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러다간 그 꼴도 보지 못하고 그 애가 죽어버리면 억울할 거 아냐?’
네가 가진 가장 귀한 것. 네 곁을 빛내는 가장 빛나는 것.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 날 사랑한단다.
속삭여줄 수만 있다면 그리 속삭여주고 싶었다.
샐쭉 웃음 짓던 블리에의 입가에 심술이 고였다.
***
다음날.
블리에는 강력한 혼동마법을 얼굴에 걸었다.
롯시가 알았다면 등짝 몇 대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아드리엔의 꼴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구한 약들이 매달 한두 번씩 수도 대공저로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약을 모아서 대공저로 보내는 일 역시 그녀가 일하는 외부 집무실에서 했던 업무였으니 말이다.
블리에는 늘 약 수레를 이끌고 가던 시종으로 변장했다.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절대 알아채지 못할 마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가는 마법은 아니니 금방 다녀와야 했다.
그리고 주치의에게 약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들어간 대공저에 숨어서 보았다.
활짝 열린 대공비의 침실 안.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옷을 입고. 키득대는 하녀들 사이에서 입술을 말아 물고 자존심을 지키는 아드리엔을.
외부인의 시선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 하녀들이 침실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아드리엔과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이미 굳게 닫힌 문 때문에 안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블리에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벼락이 머리통을 세게 내려치기라도 한 듯.
블리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약재를 운반하며 들은 수군대는 하녀들의 음성에서, 말투에서.
대공비를 향한 공경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뭐야, 이게.’
어쩐지…… 힘이 빠졌다.
자신이 상상한 아드리엔의 모습과 단 한 군데도 닮은 점이 없었다.
아름답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
진주처럼 매끄럽게 빛나야 할 흰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하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두 뺨이 살짝 파여 있었다.
생기를 잃은 연녹빛 눈동자는 자신과 너무나도 같은 빛깔이라 일순간 마음이 파도처럼 거세게 일렁이기까지 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지금? 설마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미친X!’
충격으로 새하얘진 머리로, 블리에는 다시 돌아가는 마차에 도망치듯 올라탔다.
블리에는 그날 기억도 나지 않는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죄는 것 같은 기분이 거짓은 아니었던지.
건강한 몸이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블리에는 그날 하루를 꼬박 앓았다.
그리고 늘 품고 다니던 신문 속 초상의 여자를 보고 또 봤다.
이렇게 생기 있고 얄미울 정도로 어여쁜 소녀에게 품었던 묵은 질투가 늘 단전에 고여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한순간에 흩어져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 죽을 사람이라 하던데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걸까?
‘내가 왜? 여태 잘 살았을 애를 보고?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 그날만 그랬을 수도 있잖아.’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수도 중앙에 위치한 노에비안의 외부 집무실로 향했던 날.
그날따라 유달리 긴장한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았던 블리에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