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블리에의 사정 (3)
“아카시아 영지에 마나석 광산이 있는 게 맞습니까?”
“확실합니다.”
“백작의 상태는?”
“백작은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결혼이 필요합니다.”
“적임자를 찾았나 보군. 주군의 여자를 신부로 둔 가신이라…… 결혼식에 참석할 다른 귀족들이 들으면 흥미가 동할 만큼 자극적인 진실이 아닙니까. 그 여자는 넘어왔습니까?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저를 사랑한다더군요. 어차피 수도로 일을 하러 오라고 한 것이니 뭐라 착각하든 상관없습니다.”
“냉정하시긴.”
냉정한 노에비안의 목소리와 낮게 웃는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블리에의 심장을 바삭바삭 깨트렸다.
‘내게 마음을 준 게 아니었어?’
수도에서 일을 하면 부귀를 약속하겠다 하여 온 것은 맞다. 그러니 마나석 관이며 외부 집무실의 일을 봐준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노에비안의 정부로서 살다가 아드리엔이 죽으면 결국 그를 온전히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착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노에비안이 자신을 보는 눈은 누가 봐도 사내가 여인을 원하는 강렬한 욕망 그 자체였으니까!
“너무 똑똑한 이가 아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내 상속법을 이용해 광산을 가질 여자가 그것을 소문이라도 내고 팔아버린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멍청한 여자니까.”
블리에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문틈에서 나오는 불빛이 블리에의 눈을 사정없이 찌르고, 그 아래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이 XXX! 날 이용하려고?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에 묘하게 상기되고 다정해지던 그 태도는 뭐란 말이야?’
노에비안의 마음이 뭐가 진실이든. 아무리 단순하고 무식한 블리에라 할지라도 하나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아내 상속법인지 나발인지 만들었다더니 백작이 죽으면 광산을 상속받을 자신을 정부로 미리 삼아두고 살살 구슬려 광산을 꿀꺽하려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을 곁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광산이 목적이었던 거다!
‘내가 수도에서 할 수 있다는 일이 이거였어?’
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왔던 블리에가 귀족에게나 적용되는 법을 꿰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대공비의 자리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깟 광산 따위 그에게 홀랑 넘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둠이 노을을 덮치듯, 블리에의 마음에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자신이 아무리 멍청해도 이렇게 다 엿들은 이상 눈에 그려지는 미래가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에 갇힌 블리에는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으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블리에가 뒤돌아설 무렵, 충격적인 말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 결혼. 마치 우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디서든 말씀을 가려서 하시길.”
“주군의 여자를 신부로 둔 건 숙부도 마찬가지인데.”
천사같이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블리에는 온몸을 굳혔다.
‘아드리엔이…… 노에비안의 아내가 아니야?’
마나석 광산을 가질 생각에 한껏 들뜬 황태자의 목소리가 블리에의 온몸을 휘감았다.
“피레타 공녀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할 사람은, 숙부 아닙니까. 최근 공녀가 아프다는 핑계로 자주 저택에 들르는 거 같던데. 설마 이번에 수도로 돌아온 게 공녀가 또 쓰러졌다는 소식 때문입니까?”
“…….”
“경고하러 왔습니다. 공녀 곁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마세요. 오늘같이 도리스가 멍청한 말이나 하는 날엔 아드리엔 피레타가 정부가 아니라 내 아내였다면 달랐을까 생각하는 날도 있으니. 아, 뭐 내 아내나 다름없긴 하지만.”
경고마저 달콤한 목소리의 황태자는 그날, 블리에를 혼돈에 빠트렸다.
황태자의 화려한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블리에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건물을 벗어났다.
비가 내렸다.
처음 출생의 비밀을 듣고 내달렸던 날의 차가운 밤처럼.
블리에는 빗속을 뚫고 노에비안이 마련해준 집으로 내달렸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노에비안 트로비카!”
분노와 배신감은 빗속에 조금도 씻겨나가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당신을 증오해.】
끓어 넘치는 설움을 잇새로 꼭꼭 씹어 넘기며, 블리에는 젖은 손으로 일기장에 그 한 줄을 적어 내렸다.
***
밀려드는 배신감에 칩거하던 블리에는 아카시아 백작과 올리는 결혼식 날이 되어서야 집 밖을 나섰다.
긴 시간 동안, 노에비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노에비안에 대해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문틈으로 보였던 아드리엔의 그 연약한 얼굴이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블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노에비안만 보면 마음이 비틀어졌다.
블리에는 콧방귀를 꼈다.
‘당신도 아드리엔이 쓰다 버린 헌 것일 뿐이잖아.’
반쯤 돈 것 같은 연녹빛 시선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노에비안을 향해 번들거렸다.
‘난 새것이 좋아.’
잇새를 짓씹으며 블리에가 홀로 뇌까렸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놀라울 만큼 편해졌다.
‘당신 마음대로 되게 두진 않을 거야.’
결혼식이 끝나고 여흥을 즐기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러 다녀야 했지만, 블리에는 그길로 노에비안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느지막이 황태자가 이 약소한 결혼식에 들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가야 하는 게 아니냐며 전전긍긍하는 아카시아 백작을 겨우 떼어놓고 오는 길. 마차들을 세워두는 공간에 두 남자의 인영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냥, 많이 아픕니다.”
“공녀가 아픈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얼마나 남았는지 정도는 내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불편합니다. 어떤 정성을 쏟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늘 천사 같은 얼굴의 황태자가 목을 젖히고 웃었다. 블리에는 멀리서, 그 얼굴을 시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여자에게 그토록 관심을 쏟아주니 내가 정말 고맙습니다, 숙부. 하지만…… 아비마저 버린 딸에게 그리 잘해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왜. 그 오라비가 모른다 해서 진실이 아니게 된답니까? 피레타 공작은 지금 애가 탈 텐데. 내 아들을 낳아야 할 여식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지 요즘 내게 오는 서신들이 퍽 공손해.”
“…….”
“진실을 알게 되느니, 공녀의 입장에선 하루라도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너무 애쓰진 마세요, 숙부.”
“…….”
“그리고 늘 말하지만 아드리엔 피레타는 죽어도 내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걸까?
늘 방긋방긋 웃는 놈들의 속이 시커멓다는 건 아무리 못 배운 블리에라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황태자라는 놈이 몸이 약한 제 숙모, 아니 제 정부에게 하는 말이 마치…….
‘마치 죽기를 바라는 놈 같잖아.’
블리에는 결국 결혼식이 끝나고 몸살을 핑계로 백작저에 칩거했다.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싶을 만큼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
‘이건 반칙이잖아. 아드리엔 피레타.’
나는 네가 내 자리를 빼앗고, 행복하기만 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춥고 어둡고 외로운 곳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와는 달리, 너는 아파도 온갖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중이라 생각했어.
‘아비마저 버린 딸’이라는 황태자의 목소리가 블리에의 마음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너도 나랑 별 다를 바 없는 신세였던 거야?’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그토록 바랐던 일인데.
노에비안이 무엇을 계획하든. 그냥 두 눈을 감아버리고 모르는 척하면 될 일인데.
자신과 나누어야 할 것을 홀로 독차지한 아드리엔이 죽으면 이제 자신이 모든 걸 독차지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해갈하지 못해 아드리엔에게로 향했던 분노가 블리에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바위가 되어 그녀를 짓이겼다.
그리고 이상하게, 황급히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던 그 연약한 얼굴이 계속,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다시 수도를 떠났다.
‘네가 미쳤구나 블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다시 대공저로 향했다.
블리에는 품 안에 숨긴 단검을 더듬었다.
아드리엔을 다시 확인하자.
그때 봤던 연약한 얼굴은 자신이 잘못 본 걸 수도 있으니까. 황궁에만 있는 황태자가 실언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황태자가 뭐 하러 아드리엔이 죽기를 바란단 말인가?
“……약재는 저번에 들어왔는데 오늘 또요?”
“대공비 전하께서 병세가 위중하시니 대공께서 각별히 신경 쓰고 계십니다.”
다행히 저번에 속여먹었던 문지기였다.
‘이쯤 어디였는데.’
그날 굳게 닫혀버렸던 대공비의 침실은 분명 이쪽 정원에서 창문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대공저는 규모에 비해 상주하는 사용인들이 턱없이 적었기에 블리에는 요리조리 정원수 뒤에 몸을 숨겨가며 무사히 테라스 아래로 도착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엔을 발견했다.
“아…….”
아드리엔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블리에는 홀린 듯 아드리엔을 올려다보았다.
생기 없는 눈이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듯 대공저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드리엔의 시선은 대공저 입구로. 블리에의 시선은 아드리엔에게로.
한참을 그리 있었나.
아드리엔의 흐릿한 시선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결국 블리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깜짝 놀란 아드리엔의 눈과 마주치자, 블리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 자, 잠깐만!”
‘아, 씨…….’
뭐에 홀려서.
피가 섞인 친자매가, 그것도 똑같이 생긴 쌍둥이의 얼굴을 그리 가까이 자세히 본 건 처음이라 어딘가에 홀리기라도 했나.
블리에는 자신의 멍청함을 머리를 퍽퍽 때림으로써 응징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뒤돌았다.
“호, 혹시 대공께 연락이라도 왔니?”
아. 기다리고 있던 게 노에비안 그 자식의 연락이었나 보다.
무슨 이유에선지 황태자에게 제 아내를 가져다 바치곤 비슷한 블리에를 데려다 정부로 삼아 위안을 받으려는 그 개자식…….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지?’
노에비안에 대한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는데.
그게 아니었나? 어째서 노에비안에 대해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블리에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창틀에 매달린 아드리엔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팔뚝을 훑었다.
‘저 계집애가 너무 초췌하고 불쌍한 꼬락서니라 그래.’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요나를 국경에 그냥 두고 오지 못했듯이. 그냥 불쌍해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피식 나왔지만 꾹 참았다. 대공저 하녀 중 한 명의 얼굴로 혼동마법을 다시 걸었으니 아드리엔 앞에서 고개를 젖히고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조 섞인 웃음을 참는 모습을 어디 아파서라고 생각했는지, 아드리엔의 눈이 다른 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무, 무슨 일 있니? 내가…… 도와, 도와줄까?”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거야. 다 죽어가는 얼굴로.
한참 제 눈치를 살피던 아드리엔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꼴이 더 보기 싫었다.
“저…… 혹시 대공께서 연락이 오면 집사를 거치지 않고 내게……. 내게 바로 전달해 줄 수 있니?”
작고 가느다란 손을 꼼지락거리던 아드리엔이 한 말이라곤 고작 그 한마디였다.
침실을 지키는 하녀만 너덧 명인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하녀에게 이런 ‘부탁’이나 할 만큼 비참하게 살고 있는 계집애.
“비밀, 비밀로 해주면 고마울 거란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낮아진 자존감 때문일까, 아니면 기침을 하기 시작하는 목 상태 때문일까.
기침 소리를 시작으로 정신이 번쩍 든 블리에는 창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허브향에 눈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