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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4화 (154/171)

154화. 카스타냐 일족의 최후 (2)

도리스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난 아비의 뒤에 꿇어 앉혀진 채 현실을 부정했다.

‘뭔가 잘못됐어.’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드니 상석에 가까이 서 있는 아드리엔이 보였다.

죽는 것은 아드리엔이어야 했다.

살아서 저토록 아름답게 차려입고 있는 것은 아드리엔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속임수야! 아드리엔! 아드리엔이 아니야! 내 눈앞에 와! 내 눈으로 확인할 거야! 당장 이리로 와! 당장!”

마지막 발악이었다.

아드리엔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고 도리스의 바람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주변에서 말렸지만 아드리엔은 개의치 않았다.

동시에 도리스의 눈앞에서 공작의 시체가 마치 마차에 치여 죽은 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옆으로 버려졌다.

도리스의 녹빛 눈동자에 불이 튀었다. 악다문 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무표정한 간수들이 아비가 있던 자리로 그녀를 질질 끌고 가 양 손목을 고정시켰다.

곧 자신의 차례라는 공포가 뼛속까지 스몄다.

“한심한 아드리엔! 멍청한 아드리엔! 그토록 멍청하게 당한 네가 잘못이야! 동부의 촌뜨기! 내가 널 따라해? 아니! 주제도 모르게 고귀한 내 자리를 차지하려던 건 너야! 그러니 따라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X발! 아무도 그런 건 모르지! 너같이 한심하고, 멍청한 년의 목숨 따위 몇백 번이고 더 죽일 수도 있어!!”

죽기 전에, 그토록 제 마음을 비틀었던 아드리엔의 일그러진 얼굴 하나만 볼 수 있다면 웃으며 목이 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넌 아드리엔이 아니야! X발 이게 말이 돼? 네가 바르데날도의 진짜 황태자비? 웃기는 소리! 바르데날도 그 고자 새끼가 잘도 누굴 사랑했겠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지껄이는 거짓말 같은 거…….”

하지만 도리스의 기대와는 달리, 아드리엔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했고 더 나아가 한없이 다정하고 유순해 보이는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경멸과 동정.

무지한 자를 바라보는 한심한 눈빛.

도리스는 악다구니 쓰던 것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멍하니 그 미소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건 아드리엔인데 어째서 자신을 그리 보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대놓고 저주를 퍼부으려 했다.

“꼴좋구나, 도리스 카스타냐.”

가짜인 게 분명한 아드리엔이 그 말을 하기 전에는 말이다.

저주를 퍼붓기 위해 들이쉬었던 숨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도리스의 눈썹이 약하게 움찔했다.

아드리엔은 자신이 무너지길 기다리는 눈앞의 악마를 향해 나붓이 웃었다.

그리고 직접 허리를 굽혀 도리스의 얼굴과 더 가까이 마주했다.

일견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던 고아한 얼굴이 아주 잠시지만 악마라도 깃든 듯 일그러졌다가 거짓말처럼 활짝 펴졌다.

그리고 숨을 참고 있는 도리스 앞에서 아드리엔이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잠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듯 흔들리던 도리스의 눈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참 굳어 있던 도리스는 순간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 사이로 짙은 녹색 눈이 꺼지기 직전의 불처럼 거칠게 일렁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드리엔이 형을 집행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도리스에게서 미련 없이 멀어지는 동안 도리스는 발끝에서 돋는 오싹한 감각이 제 귀까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 말은 분명, 분명…….

찰칵.

힘없이 늘어진 아비의 목을 베었던 그 무시무시한 단두대에 새로운 무쇠 칼날이 채워져 올라갔다.

“죽여라! 죽여!! 악마를 죽여라!!”

미친 듯이 환호와 욕설을 쏟아내는 관중들 앞에서, 도리스는 마침내 등골이 저릴 만큼 무서운 칼을 머리 위에 두고도 끝끝내 자신을 보고 있는 아드리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른 두 뺨이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마주한 듯 희게 질렸다.

탕!

사형집행인이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을 도끼로 단번에 베어냈다.

“네가…… 어떻게…….”

촤아아아아아악-!

기다란 나무 기둥 두 개 사이를 긁으며, 날카롭게 벼려진 무쇠 칼날이 하얀 목을 향해 쇄도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오한에, 도리스가 필사적으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벼락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현실을 부정하듯 내저어지던 고개가 곧 바닥을 굴렀다.

신부같이 차려입었던 하얀 드레스가 죽은 이와 그 아비의 피를 흡수해 붉게 변했다.

죽음은 순간이었고, 환호는 영원처럼 이어졌다.

바닥을 구르던 수급에서 녹빛 눈동자가 빛을 잃은 채 여전히 아드리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드리엔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싸움을 하듯 힘 있게 치켜떠진 연녹빛 눈 아래로 가느다란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흘렀다.

뒤에 서 있던 블리에가 조용히 다가와 아드리엔의 손을 아플 만큼 꽉 잡아주었다.

“마음 쓰지 마.”

블리에가 속삭였다.

“제일 불쌍한 건 우리였으니까.”

그 말에 모든 찝찝한 감정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블리에에게 의지하며, 아드리엔은 웃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

서부의 왕으로 군림하던 카스타냐 공작이 사형당했다.

그 딸인 도리스 카스타냐는 죽음 이후 희대의 악녀로 음유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 집행을 시작으로. 한동안 수도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빈센토가 적어두었던 이름에 빨간 선이 하나, 하나씩 그어졌다.

로아드네스의 연인을 죽이고, 제 딸을 훗날 황후로 만들고 싶어하던 이들의 이름이었다.

마침내 모든 이름에 빨간 선이 그어지고 서부의 지도자가 바뀌자마자 황제는 로아드네스를 론타의 새로운 황태자로 공표할 준비를 마쳤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수도의 귀족이라면 그 어떤 이견도 제시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경험을 쌓고,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했던 로아드네스가 어떻게 거슬리는 가문들을 족보조차 남기지 않고 파멸시키는지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동부의 피레타 공작은 돌연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기적처럼 론타에 나타난 2명의 성녀를 둔 아버지라는 점을 참작하여 큰 죄를 묻지 않았다.

로아드네스 답지 않은 관대한 처사였다.

로아드네스의 손에 어떤 가문이 몰락했는지 그 면면을 보고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새로운 피레타 소공작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 뜻은 명확했다.

‘그의 스캔들 상대였던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과 반목하면 죽음뿐이다.’

귀족들의 뇌리에 똑똑히 박혀버렸다.

로아드네스를 새로운 황태자로 공식 발표하는 일은 시간문제였지만, 화려한 황태자 즉위식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위신이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그레이스 황후의 단호한 의지로 피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아틸차드 홀이 열렸다.

수도 한복판에서 열리는 화려한 즉위식은 아니어도, 황궁에서의 화려한 즉위 파티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당연히 강력하고 아름다운 미혼의 황태자의 눈에 들기 위해 구름같이 많은 인원들이 황궁을 찾았다.

***

“속도 좋지. 헤어진 전 연인이 주인공인 파티에 왜 와요?”

“…….”

“가만 보면 부인도 진짜 진짜 냉혈한이야. 울지도 않고. 분명 사랑했으면서 어떻게 그러지?”

“나 언제까지 이 황자님이 헛소리하는 거 들어야 하니?”

에스코트를 맡아준 에페로가 쉴 새 없이 중얼대는 목소리에 블리에가 내게 음산하게 속삭였다.

블리에는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에페로는 로아드네스가 갑자기 나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그걸 블리에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에페로 황자님께서 이리 에스코트 해주시니 든든하네요, 감사해요.”

“흠.”

에페로는 마치 블리에를 대신해 나를 혼내주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다가도 내가 칭찬을 해주면 멋쩍은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황자…… 아무래도 널 좋아했나 봐, 아드리엔.”

블리에가 내 귓가에 바짝 입을 붙이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블리에 네가 잘해보든지. 사실 에페로 님이 네 얼굴이 자기 취향이라는 말을 했었거든.”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쉿! 곧 새해잖아. 성년이 되시면 상관없고.”

“흠.”

블리에가 턱 끝을 쓸며 애써 앞만 보고 가는 에페로를 훑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를 맴돌았다.

“그래도 볼수록 잘생겼네. 일단 저장.”

“?”

“내 새 남편 후보로 저장.”

“오빠가 들으면 난리날 말투는 그만 써.”

“잔소리는 그레고리로 충분해.”

블리에가 새침하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에페로의 팔을 끌어다 잡았다. 에페로의 귀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아틸차드홀에 발을 디뎠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주인공인 로아드네스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만 봐도 그가 없는 걸 눈치챌 수 있는 분위기니까.

나는 우리에게로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고 비교적 구석진 자리로 옮겼다.

하지만 어릴 적 비극으로 겨우 다시 만난 쌍둥이 자매.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된 블리에와 죽었다 살아난 내게 쏟아지는 관심은 상당했다.

에페로가 우리를 지키고 서 있어도 안면이 있는 귀부인들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블리에 님!”

특히 블리에에게 애정가득한 눈으로 다가오는 노우라 주세타와, 조심스레 따라오는 아이린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편지를 얼마나 했는데요! 어머,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아니, 이젠 피레타 공녀님이라 해야 할까요? 노우라 주세타 자작 부인이에요.”

“그냥 편의상 대공비 전하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아직 사람들 인식에는 대공비 전하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시기도 하고 아직 전하의 거취가 완전히 결정된 게 아니니까요. 그렇죠? 아, 저는 블리에 님과 함께 일했던 아이린 시스코메틴이라 합니다, 비 전하.”

블리에는 잠깐 내게 쏠린 관심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 않길 바라는지 침묵했다. 반기지 않는 것 같은 눈치에 노우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오늘은 제 남편도 함께 참석했어요. 오늘 파티가 황태자 즉위식이나 다름없다는 건 모두가 알잖아요? 이런 날엔 무조건 나와야죠. 그래서 말인데…… 남편이 은인이신 블리에 님을 꼭 뵙고 싶어 하는데 언제쯤 만나보시겠어요?”

“저랑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함께 어울려주세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내년에 있을 제 데뷔탕트의 샤프롱을 맡아주세요, 블리에 님.”

블리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낯선 여자들이 마구 친한 척을 해대며 치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린 영애의 샤프롱을 제가 맡아도 될까요?”

“어머나 맙소사!”

블리에의 떨떠름한 반응에 시무룩해지던 아이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이린은 내 다정한 목소리에 감복한 듯 금세 내게 몸을 붙여왔다.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제 샤프롱을 맡아주신다면 정말 너무, 너무 기쁠 거예요! 두 분이 닮으셔서 그런가 이상하게 대공비 전하께 친근함이 느껴지는데…… 이게 전하께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요?”

아이린이 천진하게 좋아하던 낯을 붉히며 내게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팔을 다정히 잡았다.

“물론이죠. 블리에의 친구라면 내 친구예요.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면 좋을 거예요.”

아이린의 앳된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아이린은 금세 다시 밝아져선 자신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샤프롱을 구했다고 자랑해야겠다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 여자도 좀 떼 줘.”

블리에가 복화술을 하듯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자기 남편이랑 나랑 식사를 하자는데 모르는 사람들이랑 뭐 먹기 싫어.”

주세타 자작 부인은 목발을 짚고 멀찍이 서 있는 자작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연신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블리에가 질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는 블리에에게 좀 더 바짝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인간관계를 좀 넓혀 봐. 주세타 자작 부인은 수도 사교계를 꽉 틀어잡고 있으니 훗날 도움이 될 거야.”

“난 이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블리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아가면 되잖아.”

산뜻한 대답에 블리에가 한차례 욕설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일 무렵.

아틸차드 홀의 거대한 종이 정확히 세 번 울렸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왁자지껄하던 아틸차드홀의 공기가 바뀌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황제와 되려 낯빛이 좋아진 황후 그레이스, 그리고 모두의 숨이 턱 막힐 만큼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로아드네스가 홀의 2층 층계참에 들어섰다.

로아드네스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나를 찾아냈다.

멀리서도 선명히 반짝이는 붉은 눈과 마주하자마자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몸을 꽉 틀어쥐고 놓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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