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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5화 (155/171)

155화. 제국의 가장 큰 별

나는 아주 잠깐 풀어지는 그의 입매를 발견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기에 변화는 더 극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 한 번일 뿐인데 심장이 간지러웠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나는 블리에와 에페로의 뒤로 몸을 숨겼다.

로아드네스가 보일 듯 말 듯 픽 웃자 주변에 있던 영애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아름다운 미혼의 황태자는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충분했을 테니까.

황제 폐하의 환영 인사와 함께 홀 가장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샴페인들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손에 샴페인이 들릴 무렵, 영 힘이 없던 황제 폐하의 목소리에 돌연 힘이 들어갔다.

“나 율리어스 론타는 이제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황후 레티나와 내 사랑의 결실이자 자랑스러운 아들인 2황자 로아드네스를 제국의 가장 큰 별로 임명하는 바이다!”

잠시간 거대한 정적이 홀을 짓눌렀다.

황제의 입에서 ‘인정과 반성’이라는 말이 나오자 숨을 들이켰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내 앞에 있던 에페로가 가장 먼저 샴페인 잔을 천장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주신께 영광을!”

에페로의 우렁찬 목소리를 시작으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덩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로아드네스의 세력으로 완전히 돌아선 귀족들이 특히 야단법석이었다.

“론타에 번영을!”

“황제께 충성을!”

긴장감이 감돌던 아틸차드 홀이 새롭게 탄생한 론타의 가장 큰 별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황제께서 입을 연 이후 다소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떠올랐다.

계단 층계참 가장 아래 자리 잡은 악단들이 악기 연주를 위해 튜닝을 시작하자 홀은 진정한 축제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곧 주인공인 로아드네스가 첫 춤을 추기 시작하면 모두가 홀로 뛰쳐나와 춤을 출 것이다.

나는 괜히 내 가슴이 벅차올라 한참을 굳은 듯 서 있었다.

이제 모두의 앞에서 명실상부한 황태자가 된 로아드네스가 주인공답게 천천히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흥미, 경계, 질투. 온갖 감정들이 그들로부터 파도처럼 몰려와 나와 블리에를 때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블리에에게로 갈 줄 알았던 로아드네스가 당연한 듯 내 앞으로 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블리에와 나는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다르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파트너가 없어서 곤란해 보이는데.”

로아드네스가 연인으로 알려졌던 블리에 대신 내게 온 게 대단한 흥밋거리였음은 분명했다.

“도움이 필요합니까?”

신이 깎아놓은 듯한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리자 주변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잠깐 멈칫했던 나는 에페로의 뒤에서 조심스레 나왔다.

“……네, 필요해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게 손을 뻗은 로아드네스의 손을 잡았다.

로아드네스가 웃었다.

제국의 큰 별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반짝이는 미소였다.

절대 놓치지 않을 듯 꽉 잡아 오는 손은 장갑을 꼈음에도 불을 품은 듯 뜨거웠다.

“아드리엔.”

춤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로아드네스가 닿은 등허리며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곳에서.

나는 아드리엔으로, 그는 로아드네스로.

남의 몸을 빌려서도, 가면을 쓰지도 않고 춤을 추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처음 춤을 췄던 걸 기억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빙글 돌았다.

빙글 돌고 나면 한 발짝 물러나 무릎을 굽혀야 했지만, 로아드네스는 다음 동작은 없는 것처럼 그대로 나를 다시 제 품에 넣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음악인데도 나는 숨이 찼다.

“네가 처음 네 오빠의 손을 잡고 이곳에 들어섰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 가면무도회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자리라지만 난 너를 단번에 알아봤고.”

자연히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등장하자마자 드문드문 있는 로열 아카데미의 가면들 사이에서, 앞주머니에 장미 하나를 꽂고 있던 노에비안을. 바보같이 속아 넘어갔던 그날을.

“성년이 되면 달콤한 샴페인을 나눠 먹고 싶다 했던 말이 뒤늦게 생각났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로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너를 만나면, 그래서 내 눈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일지 신경 쓰고 불안해하느라 그제야 생각났지.”

“……로안.”

“급하게 샴페인을 찾아 돌아다녔어. 가장 달콤한 것을 찾기 위해 하나하나 다 마셔보느라 조금 취하기까지 했지. 우습게도 조금 취하니 용기가 생기더군. 그새 어딜 다녀온 것처럼 바깥바람을 묻히고 서있는 네게 다가가 그 샴페인을 건네기까지 나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건 나였다.

나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내게 얼굴을 보여주고 자신을 안이라 속인 노에비안과 ‘작은 숲’에서 다시 돌아왔던 그때를.

다소 어색해하던 노에비안은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샴페인을 찾으러 갔고, 곧이어 다시 가면을 쓰고 돌아왔었다.

“……그게 너였어?”

로아드네스는 말없이 내 허리를 손쉽게 두 손으로 잡아 번쩍 들어 올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제야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대화하던 공간이 현실처럼 느껴지고, 동시에 과거로 잠시 온 것처럼 기묘한 소름이 돋았다.

“샴페인을 건네자마자 ‘일찍 돌아와 줘서 기뻐요, 안.’이라며 날 반겨주는 널 보고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단번에 날 알아봐 준 것에 희열을 느꼈지. 춤을 추고, 추고 또 추고. 태어나 그렇게 설레고 행복한 춤은 처음이었어.”

노에비안과 춘 춤이 아니었다.

가면무도회니까, 다시 가면을 쓰고 샴페인을 들고 등장한 사람을 나는 또 아무런 의심 없이 반겨주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어. 형님과 대공이 그런 짓을 벌였을 거라곤 나 역시 상상조차 못 했지.”

아, 바보 같은 아드리엔.

“네 오빠가 널 데려가고. 다시 음악이 나와 너와 춤추기만을 기다렸는데…….”

더 이상 듣기는 힘들었다. 그도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 있다 샴페인을 가져온 가면 속 노에비안과 나는 다시 춤을 추었을 테니까.

가면 속 사람이 바뀐 줄도 모르고. 두근대는 풋사랑의 떨림이 무언가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마저 날려버리고 말이다.

춤이 더 빨라졌다.

나는 내 발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로아드네스는 놀라울 만큼 완벽하게 나를 리드했다.

그의 손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긴 채 나는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질투가 났지만, 곧장 전장으로 가야 했어. 사실 전날 출전했어야 했거든. 네 잘못이 아니야 아드리엔. 내가 최대한 내 눈을 보여주지 않으려 미루고 또 미룬 것이니까. 청혼서를 먼저 보내고, 승전보와 함께 동부로 달려가 내 눈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 말고 다른 누구와도 춤추지 말아 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그리고 전장에서 그는 노에비안과 내 결혼 소식을 들었을 테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춤을 추었다.

익숙한 음악이었다.

20살의 우리가 함께 첫 춤을 추었던, 내가 블리에가 되어 그와 함께 춤을 추었던,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 추고 있는 곡이 똑같았다.

그 익숙한 음악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마치 로아드네스가 그러라고 시킨 것처럼 말이다.

***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또다시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하늘이 빙글빙글 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을 무렵. 파티가 무르익다 못해 홀 중앙에 있는 황금빛 분수에 취한 사람 한둘이 빠지기 시작했을 즈음.

우리는 아틸차드 홀을 벗어나 마차에 올라탔다.

숨바꼭질하듯 빠져나와 앉은 터라 나는 이미 숨이 차오를 만큼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마치 어릴 적 설움을 보상이라도 받듯 자비 없이 나를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말없이 내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입술을 탐했다.

나는 숨이 차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그가 주는 뜨거움에 질식당해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로아드네스는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다. 거의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술기운이 금세 로아드네스에게 옮겨가기라도 한 듯 눈을 감고 내게 몰입하는 대리석 같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간신히 입술을 떼었을 땐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만약 그날의 내가 더 용기 있었다면.”

“……로안?”

갑자기 다시 시작된 옛날이야기에 나는 긴장했다. 로아드네스가 젖은 내 입술을 엄지로 문질러 주며 빤히 그것을 응시했다.

침착해진 얼굴과는 달리 달빛에 반사된 두 눈 가득 식지 않은 열기가 담겨있었다.

“그래서 내가 네게 가면을 벗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마차 문을 열었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나는 홀린 듯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별빛 언덕이었다.

내가 로아드네스와 주고받던 편지에 늘 수도에 간다면 구경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기어코 블리에의 몸으로 그와 함께 왔던 그 아름답고 슬픈 언덕.

술이 조금 취해서일까.

저번에 왔을 때보다 듬성듬성 반짝이는 별들이 내게 쏟아지는 것 같아 나는 제자리에서 한번 빙글 돌았다.

로아드네스가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부축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번엔 방해꾼들이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에서 보여주는 게 더 좋겠더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밤안개처럼 내 귓가에 내려앉은 무렵.

언덕 너머에서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별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로……. 안?”

나는 눈을 한번 비비적거리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새벽 태양처럼 서서히 떠오른 별들이 아니, 빛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옆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내 눈에 가득 찼다.

마치 별들이 쏟아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 낮은 언덕을 올랐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별들이 나를 따라오더니 곧 새카만 밤하늘 쪽으로 포르르 날아가 완전한 별처럼 반짝였다.

수천수만 개의 유성이 나를 보며 쏟아질 준비를 하는 것 같은 광경에 나는 입을 벌리고 그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바보처럼 그것을 바라보다가 나를 따라 언덕을 올라오는 로아드네스를 보았을 땐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이토록 찬란한 별의 호수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제국의 가장 큰 별 그 자체인 로아드네스가 슬프도록 아름다워 심장을 조였다.

“……어때?”

“뭐가?”

나는 이유 없이 치솟는 울음을 꾹 누르고 물었다.

“이 반딧불이들.”

가장 빛나는 별 같은 남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 반딧불이.

나는 그제야 빛무리가 예전에 그가 잠깐 보여주었던 반딧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반딧불이를 횃불처럼 사용하던 롯시를 생각하자 한동안 롯시를 자주 찾아가던 로아드네스까지 떠올랐다.

마력으로 이 많은 반딧불이를 불러낸 걸까?

“그거 알아, 아드리엔?”

로아드네스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 반딧불이들은 오직 암컷 반딧불이 한 마리에게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저렇게 빛을 내며 춤을 추는 거야.”

나는 의미를 몰라서 내 손을 잡는 그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지금 네게 구애하는 거야, 나.”

로아드네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내 황태자비가 되어줘.”

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를 머금은 두 눈이 간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슬펐던 기억들은 다 좋은 기억으로 덮어줄게. 널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고 아름다운 곳에 데려가 줄게. 네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강하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기사가 되어 평생 널 지켜줄게.”

날아다니는 별들 가운데.

가장 반짝이는 별 같은 남자의 눈 속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노랑, 초록으로 반짝이는 반딧불이 빛이 그곳에서 별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론타의 황태자비로서, 내 곁에 있어 줘.”

내가 본 모습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은 로아드네스가 망설임 없이 두 무릎을 꿇고 잡고 있던 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누구도 너를 감히 해칠 수 없도록, 내가 그런 자리에 오를게. 너 역시 그런 내 곁에 있을 거야.”

내리깐 눈을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간절한 만큼 떨리는 손이 내 손바닥과 마음을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뜨겁고, 떨리는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나는 눈물을 꾹 누르며 답했다.

“아니,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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