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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6화 (156/171)

156화. 별이 빛나는 밤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난 황태자비가 아니라, 네 아내가 되고 싶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금세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니 너도 내 황태자가 아니라, 그저 내 남편이 되어줘.”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코 한쪽 눈에서 툭 떨어지자, 로아드네스도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로아드네스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허탈하게 웃었다. 어찌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지 내 가슴이 함께 들썩일 정도였다.

“아드리엔, 너는 진짜……. 너는, 진짜…….”

로아드네스는 나를 터질 듯 끌어안고는 거의 들다시피 해서 얼굴에 잔 키스를 퍼부었다.

“끝까지 날 들어다 놨다 하는구나.”

뜨거운 입술이 내 얼굴 위로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나는 눈물과 함께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동안 나는 눈을 뜨고 우리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빛무리들이 쏟아져 내 눈 가득 퍼지는 것 같았다.

“평생 내 품에 있어 줘, 리엔.”

보통은 평생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중에 로아드네스가 잠시 떼었던 입술을 다시 겹쳐왔다.

쉴 새 없이 섞이고, 얽히는 숨결 속에서.

평생 제 품에 나를 넣고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로아드네스의 으름장이 입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내 품에 있어 주기만 하면 다 할게. 네가 꿈꾸던 멋지고 다정한 기사도. 마물을 물리치는 영웅도. 모두를 발아래에 두는 황제도. 네가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압도적으로 내게만 유리한 조건에 나는 웃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야말로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을 품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

피곤하지도 않은지 아침 일찍 대공저로 찾아온 아이린과 노우라 덕분에 아드리엔 일행은 티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황제께서 새로운 황태자 전하를 공표한 이후, 황제궁에서 두문불출하신다는 말이 있더군요.”

“파티가 바로 어제였는데 부인께선 그런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어요?”

“황궁에 드나든 지가 몇 년째인데 제가 그 정도 소식도 모를까 봐요. 그나저나 대공비 전하…… 아니 공녀님께선 어제 황태자 전하와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아드리엔은 새벽 내내 못 잤기에 다소 피곤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말 좀 해볼까. 동생?”

블리에가 조금 퀭해진 눈을 하고 아드리엔을 보았다.

아드리엔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언덕을 뒹굴었다.

말 그대로 정말 데구르르 뒹굴었다. 아드리엔은 술에 취해 있었고, 로아드네스는 그런 그녀에게 취해 어쩔 줄을 몰랐다.

한참을 그리 뒹굴고, 껴안고, 입을 맞추다가 로아드네스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정말 망측하게도.

그녀의 가장 반짝이는 별이자 가장 아름다운 짐승은 그 반지 하나도 그냥 끼워주질 않았다.

입술을 쪼아대던 숨결이 목이며 어깨,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팔을 타고 내려가 손에 진득히 달라붙고.

마침내 그 입술에 반지를 물고는,

‘입’으로 그 반지를 끼워주었다.

축축하고, 간지럽고. 늘 탐했던 입속에 들어간 하얀 손가락이 젖었다.

그것을 다시 제 입술로 닦아낸 로아드네스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을 땐 아드리엔이 참지 못했다.

요망하고, 또 요망한 로아드네스!

시간이 지나 곱씹어보니,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입 맞추도록 부추긴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평소 얌전한 그녀라도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사방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곳에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지 않는 건 범죄였다.

“동생, 동생 눈이 이 세상이 아니라 아바델리아에 있는 것처럼 살짝 돌아 있는 이유가 뭘까?”

블리에가 곁에서 속닥이자 아드리엔은 잠시 뜨거웠던 오늘 새벽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드리엔은 아직도 열기가 남은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아침이 되어서야 몰래 돌아와 방금 일어난 척하느라 손에 낀 반지를 빼지 못했다.

이 반지를 보는 순간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오호-.”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아드리엔이 사라졌다며 대공저를 뒤집어엎을 기세였던 블리에는 그 사소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아드리엔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사악하게 웃던 블리에가 그녀의 손목을 슬며시 잡아 올렸기 때문이다.

아침햇살을 받아 번쩍! 빛나는 아이 엄지손가락만 한 다이아몬드가 자길 좀 봐달라는 듯 영롱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맙소사!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님께 청혼했군요!”

최근 결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이린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만으로도 엉덩이를 들썩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형사취수제가 아직 폐지되지 않는 이유가 전하께서 공녀님을 마음에 두어서라는 소문이 돌던데 그게 맞군요!”

노우라는 보석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답게 보석 그 너머에 있는 로아드네스의 의지까지 읽어내고야 말았다.

“대공비 전! 하!!”

그리고 응접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새된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모두의 고개가 응접실 입구로 돌아갔다.

멋들어진 모자를 쓰고 양손 가득 짐가방을 들고 나타난 마담 르블레아였다.

이미 ‘기적의 자매’를 뮤즈로 삼은 마담은 늘 자매의 옷을 직접 만들어주길 자처했다.

그녀는 아드리엔이라는 원조 뮤즈가 돌아온 것에 대해 감격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아드리엔을 더 많이 신경 쓰면 블리에가 섭섭해하진 않을까 슬그머니 눈치까지 봤다.

물론 블리에는 마담의 반응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며 ‘무조건 화려하게’라는 기조를 유지했으니 마담이 아드리엔에게 은근히 다시 접촉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마담은 아드리엔의 손에 있는 영롱한 다이아반지며 문을 타고 넘어오는 목소리들을 듣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아함을 가장 높은 가치로 치는 마담 르블레아의 콧구멍이 조용히 벌름거렸다.

“절대로. 결단코. 대공비 전하! 아니, 황태자비 전하가 되실 공녀님의 웨딩드레스는 제게 맡겨주시겠죠?”

툭! 툭!

마담의 양손에 들렸던 짐가방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느새 마담 르블레아가 티테이블에 바짝 다가왔다.

“오늘 당장 작업 시작할까요??”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제일 좋은 걸로.”

“예.”

“아, 그건 직접 보지. 아드리엔은 꽤 까다로워, 내가 고르는 게 아니면 맘에 차지 않을 테지.”

“보통 까다로운 건 전하이십니다만.”

“……그런가.”

그런가?

닐은 제 귀를 의심하며 빈센토와 로아드네스를 힐끔댔다. 로아드네스가 저런 되바라진 답변에 수긍할 만큼 자비로운 주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되니 저리 좋으신가.

즉위 파티를 하는 것도 그다지 내켜 하지 않으시던 분이 어째 파티가 끝나고 나서부터는 싸늘하고 오만하던 낯에 봄이 스며 있었다.

늘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주군을 바라긴 했지만,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건 왜인가.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 장가간다는 이야길 했었나, 내가?”

“예?!”

“빈센토가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보군.”

닐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빈센토와 주군의 책상을 동시에 훑었다.

어렵고 머리 아픈 일들은 본래 죄다 빈센토의 몫이었건만.

요즘 들어서는 제 책상에 그런 일들이 올려져 있고, 대신 빈센토가 이리저리 바빴다.

게다가 늘 딱딱한 얼굴이던 빈센토마저 로아드네스에게서 봄이 옮겨갔는지 입매가 풀어져 있는 게 아닌가?

“브,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입니까, 아니면…….”

“당연히 아드리엔이지, 무슨 헛소리지?”

여태까지 백작 부인 때문에 야단법석이었던 걸 곁에서 다 보아왔는데 ‘당연히 아드리엔’이라니?

닐은 오히려 자신이 깊은 배신감을 느끼곤 깃펜을 거칠게 놀렸다.

로아드네스가 원하는 가장 성대한 결혼식 예산을 계산하던 빈센토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궁 예산 초과입니다. 황후께서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예산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가장 성대하게 준비해. 내가 내 사비로 하겠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이전부터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징징대는 거지?”

그 말에 늘 아련하게 웃던 과거의 블리에를 떠올린 닐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예산이면 아예 생략하셨던 황태자 즉위식을 올리시는 게 낫겠네요. 즉위식보다 화려한 결혼식이라니 전례에 없습니다!”

괜히 그동안 친해진 블리에 편을 들고자 버럭 소리를 질렀던 닐은 곧 정적이 흐르는 느낌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한껏 비굴하게 표정을 바꾼 닐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곤 로아드네스 쪽으로 가련하게 고개를 들었다.

“닐. 네가 오랜만에 쓸 만한 소리를 하는군.”

“……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로아드네스가 ‘네 놈이 그런 영민한 생각을 할 줄 알았느냐’란 표정으로 턱을 쓸고 있었다.

“황태자 즉위식, 그거 하지. 그런데 사람들이 황태자보다 황태자비 즉위식 같다는 소리가 나오게끔 준비해. 알겠나?”

“예? 전하! 미리 혼인한 사이도 아닌데 즉위식을 그렇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즉위식의 주인공은 전하십니다!”

“하라면 해. 붉은 눈의 황태자도 전례가 없지. 아드리엔은 이제 성녀라 불리니까 그녀가 내 머리에 관을 씌워주는 그런 방식은 어떤가?”

“전하!”

이보다 더 규모를 키우겠다는 의지에 빈센토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수습은 늘 빈센토의 몫이었다.

***

황궁에서 공식적인 청혼서가 도착했다.

대공저에서 임시로 함께 머물고 있던 그레고리는 아직까지 블리에를 대신해 가문의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청혼서를 받자마자 넋이 반쯤 나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혼서와 함께 내게 도착한 건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만한 두께로 둘둘 말린 종이였다.

그 안에는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온 듯한 결혼 준비 목록과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블리에도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읽다가 글이 너무 많다며 내던졌고 요나와 마지가 눈을 반짝이며 글을 읽어 나갔다.

“결혼식이 뭐 이리 빨리 치러진대요?”

“황실의 결혼 준비는 아무리 못해도 1년은 걸리는데, 한 달 뒤에 하신다고요? 말도 안 돼. 이쪽은 준비할 게 많다고요!”

“아니, 아니 마지님. 이거 보세요. 잘은 모르지만 요 물건들은 원래 전부 신부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맙소사,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으셨네.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의 궁을 이미 새로 꾸민 지 오래됐답니다. 그레이스 황후 폐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로아드네스가 준비한 목록들을 훑어 내려갔다.

기껏해야 이 거대한 다이아몬드 반지나 준비한 줄 알았더니, 그동안 바빴던 게 귀족들을 응징하는 것뿐만은 아닌 듯했다.

“심지어 웨딩드레스도 다 준비된 거 같은데요?”

“뭐라고요?”

아예 작업실을 이쪽으로 옮긴 것처럼 출근 도장을 찍던 마담 르블레아가 도끼눈을 뜨고 다가왔다.

그녀는 콧김을 내뿜다가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라. 이 드레스는 제가 몇 달 전에 의뢰를 받아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중이었던 드레스인데……?”

“예에-?”

“누군지 신원도 밝히지 않았지만, 어느 먼 왕국의 공주님께서 입으실 웨딩드레스라고. 예산은 상관없이 세계 최고로 만들라고 하셔서 만들고 있었어요. 물론 지금 손을 대기 시작한 공녀님의 것을 더 최고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먼 왕국의 ‘공주님’이 입을 드레스?

나는 급격히 뜨거워지는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담 르블레아에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내 것이 맞는 것 같군요.”

저 드레스는 요망한 로아드네스가 미리 의뢰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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