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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57화 (157/171)

157화. 꽃비가 쏟아지는 날

한 달은 금방 지났다.

결혼 준비는 거의 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 비앙카가 수도에 머물며 나를 살펴주었다.

결혼식의 장식은 비앙카가 그레이스 황후 폐하와 함께 맡았다.

블리에와 비앙카는 내 결혼 준비를 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상하게 비앙카만 보면 뺨이 찌릿찌릿해. 이런 게 가족의 사랑, 뭐 그런 건가?”

비앙카와 내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비앙카는 눈에 띄게 어색하게 웃고는 마차는 어쩌고 있나 봐야겠다며 사라졌다.

“……예쁘구나, 리엔. 나랑 똑같이 생겨서 그런가.”

블리에의 말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마담 르블레아는 로아드네스가 의뢰했던 드레스에 내 의견을 첨가해 멋들어진 드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말을 빌려보자면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고,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최고의 드레스라나. 그게 가능한 디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담 르블레아의 직원들과 노우라까지 합세해 꾸며놓은 나는 내가 봐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내가 대기 중인 천막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부터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리엔.”

“응.”

“황태자가 알아서 잘해주겠지만, 그래도…….”

블리에는 잘 꾸며놓은 내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 정수리에 제 손을 얹었다.

같은 날 태어났으면서도, 블리에는 가끔 자신이 나보다 예닐곱 살은 더 많은 언니처럼 굴었다.

“네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나한테 말해. 너인 척 다가가서 그 반짝이는 머리통을 한 대 갈겨버릴 테니까. 나 힘 센 거 알지?”

내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는 사람은 오히려 블리에였다.

블리에가 이렇게 굴 때면, 나는 어머니의 부재로 조금은 울적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것 같았으니까.

“응.”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부우우우우-!

뿔고둥 소리가 귀가 얼얼해질 만큼 크게 울렸다.

드디어 로아드네스의 황태자 즉위식이자, 우리의 결혼식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

성녀 추대식과 처형식을 동시에 치렀던 중앙 광장.

그곳에서 시작된 푸른색 카펫이 저 멀리 황궁의 정문까지 깔려 있었다.

보통 대신전에서 치러지는 황실의 결혼식과는 달랐다.

“이건 그래서 황태자 즉위식인 건가요, 황태자비 추대식인 건가요? 결혼식이 맞기는 한 건가요?”

“겸사겸사죠.”

귀족들은 중앙 광장에 모여 앉아 있다가 행진을 함께할 준비를 했다.

전례 없는 대규모의 행사라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따로 마련된 좌석이 아닌 뚜껑 없는 마차였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중앙 광장에서 새로운 황태자 부부가 만나 뚜껑 없는 마차를 함께 타고, 그 뒤를 귀족들의 마차가 졸졸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즉, 모든 귀족들이 오늘 있을 결혼식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었다. 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하객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우리를 복종시키는 방법도 가지가지네요. 황태자 즉위식을 생략했다가, 성녀가 된 대공비와의 결혼이 확정되자 부랴부랴 이런 성대한 결혼식이라니. 결국엔 마지막 찝찝함마저 없애버리려고 신탁을 받은 성녀와의 결합을 제국 전체에 보이시려는 과시가 아닐까요?”

“어머. 부인의 여식이 황태자비가 되지 못해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아니고요?”

“아뇨! 황태자 전하의 여성 편력은 이전부터 유명했죠. 탕아로 이름을 날리셨던 분이니 제 귀중한 여식을 그런 자리에 올릴 수는 없었답니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정말 정치적 결합이 맞을까요?”

의미심장한 노부인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숙덕대던 귀족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화려한 휘장이 드리워진 천막에서 황태자 로아드네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입이 다물린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차림의 로아드네스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새로운 황태자는 그동안 서부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아붙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더 압권인 건 늘 오만하던 그 얼굴에 스며든 봄기운이었다.

“……여성 편력이 있으시긴 했어도. 결혼은 처음이시니 설레실 만하지요. 대공비께선 굉장한 미인이시니 저런 표정을 하실 만도 해요.”

아까부터 볼멘소리 하던 귀부인이 멍하니 구시렁거렸다. 저런 얼굴을 한 황태자는 처음 보았기에 저절로 그런 변명이 주절주절 나왔다.

그때였다.

뿔고둥 소리가 세 번 울리고, 저 멀리서부터 환호성이 파도처럼 쏟아져 왔다.

신부의 꽃마차가 광장 끄트머리에서부터 들어오는 소리였다.

황실 제1기사단과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온갖 꽃들로 장식된 길을 천천히 달려오는 하얀 마차의 머리꼭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차가 푸른 카펫의 시작점에 멈추고, 상기된 얼굴의 황태자 로아드네스가 그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마차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공간을 휘감았다.

그리고 즉시 감탄이 이어졌다.

“아!”

“와-!”

거대한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새신부의 모습을 보고 쏟아지는 감탄사였다.

한때 유리 몸으로 유명했던 황태자비 아드리엔은 멀리서 보아도 생기로 가득했다.

“한 번 결혼했던 분이 맞으신가요?”

황금보다 빛나는 금발이 반으로 묶여 있고, 그를 장식한 하얀 시폰 리본이 앞에서 보면 앙증맞게 양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리본이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릴 때마다 소녀 같은 아드리엔의 이미지가 더 부각되었다.

“완전한 동부의 공주님이시군요.”

누군가 느긋하게 그렇게 평했다.

풍성한 퍼프소매가 꽃처럼 어깨를 감싸고,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하얀 시폰은 하얀 튤립 같았다.

알록달록 화사한 색상의 부케를 들고 있으니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꽃 같기도 했다.

“황태자비의 관을 쓰시면 그 관을 빛나게 해줄 드레스로군요.”

부인들의 눈이 바빠졌다.

마담 르블레아가 대놓고 자신의 뮤즈가 새로운 황태자비 전하라 떠들고 다녔으니 저 드레스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이리라.

“황태자 전하를 좀 보세요.”

식이 시작되기 전에 숙덕이던 사람들은 더 이상 형사취수제를 이용한 ‘정치적 결합’이라는 말을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아드리엔의 발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뻣뻣하게 굳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로아드네스 때문이었다.

하얀 예복 옷깃 위로, 사슴처럼 우아하게 뻗은 황태자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을 뿐더러 시원하게 드러난 귀 역시 활활 불타고 있었다.

먼저 손을 뻗어 에스코트를 해야 했건만.

로아드네스는 꼼짝도 못 한 채 오늘의 신부인 아드리엔을 응시하며 감격에 차 있을 뿐이었다.

팔꿈치까지 올라온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마차 밖에서 무안하게 팔랑였다.

한참 감격에 젖은 채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가 그제야 자신의 신부를 에스코트하여 뚜껑 없이 아름답게 장식된 마차에 태웠다.

하얀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환호성이 더 커졌다.

높은 건물에서는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름다운 황태자 부부는, 신탁을 상기시키기 충분했으며 없던 애국심도 만들어낼 만큼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오만한 얼굴로 귀족들을 쏘아보며 지나갈 줄 알았던 로아드네스는 제 신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신부와 자신만이 존재하는 천국에라도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꽃비가 쏟아지고. 그의 바람대로 귀족들의 마차가 그 뒤를 따르며 손이 떨어져 나갈 만큼 박수를 쳐대는데도.

황궁을 직시하며 나아가야 할 그 영광스러운 길에서 황태자 로아드네스는 오로지 손을 흔들고 있는 제 신부만을 바라보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상기된 낯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정치적 결합이…… 맞나요?”

“제가 봤을 땐 그저 제 짝을 만나신 것 같군요. 이거 원, 누군가 목이 댕강 잘리진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참석한 제가 바보같이 느껴질 만큼…….”

“완전히 푹 빠지신 것 같군요.”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귀족들의 얼굴은 쏟아지는 꽃비 속에서 황태자 부부가 마침내 황궁 앞에 도착하고, 거대한 단상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대신관 텔른 앞에 섰을 때 스르르 풀렸다.

대신관 텔른이 축복의 말을 건네고 이어 쉼 없이 주례사를 쏟아내는 중에도 신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보면서 은근슬쩍 함께 미소 짓는 이들도 있었다.

붉은 눈의 괴담을 성녀가 잠재운다느니 뭐니. 그런 신탁이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분위기는 여느 부부의 결혼식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심지어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던 그들의 황태자가 지금의 황제보다 더 성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까지 들었다. 인간미 없이 잘난 황태자가 오늘만큼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신의 이름으로, 오늘부로 황태자비가 되신 아드리엔 론타 님을 축복합니다.”

대신관 텔른이 황실을 대신해 아드리엔에게 황태자비의 황금빛 보관을 씌워주었다.

무릎을 굽혀 그 관을 받아들인 아드리엔의 앞으로 빈센토가 붉은 방석 위에 놓인 황태자의 보관을 대령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귀족들이 다시금 술렁였다.

보통의 즉위식이었다면 황태자의 보관을 황제가 씌워주고, 황태자비의 보관은 황태자가 씌워주는 게 보통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황태자비께서 황태자 전하께 관을 씌워주신다니!”

아드리엔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라 제 눈앞의 화려한 보관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곧이어 떨리는 손을 들어 고귀하게 반짝이는 보관을 손에 쥐었다.

술렁이기 시작하는 귀족들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로아드네스가 기꺼이 아드리엔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고 손을 모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대신관이 씌워준 관을 쓴 아드리엔이, 신의 의지를 담아 로아드네스에게 황태자의 관을 ‘하사’하는 것으로 보이기 딱 좋은 구도였다.

황태자비 아드리엔의 손에 의해 마침내 로아드네스의 머리에 황태자의 보관이 씌워지자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귀족들이 뭐라 하든.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신이 선택한 성녀님이 황태자를 축복하는 걸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론타에 번영을! 주신께 영광을! 황태자께 충성을!”

“론타에 번영을! 주신께 영광을! 황태자께 충성을!”

황제와 황후가 상석에서 지켜보는 앞이었다.

아드리엔은 서서히 일어나는 로아드네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제야 꿈을 꾸는 것 같던 기분에서 벗어나 입을 앙다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는 앙다문 입술을 응시하며 더없이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상의도 없이…….”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입 맞추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탓을 하려는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주신의 이름으로 로아드네스 황태자 전하와 아드리엔 황태자비 전하의 결합을 선포합니다!”

대신관 텔른의 선포와 동시에,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로…….”

“이번에도 상의는 힘들어. 말했잖아.”

네가 예쁜 게 죄라고.

속삭이듯 씹어뱉는 말에 아드리엔이 잠깐 멍해졌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뜨거운 입술이 겹쳐졌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꽃송이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던 황족들마저 그 기세에 열렬히 손뼉을 치는 수밖엔 없었다.

론타 사상 가장 화려하고, 성스러운 결혼식이자 즉위식이었다.

이 역사적인 결혼식 때문에 제국 일보는 이례적으로 오후에도 신문을 만들어 뿌렸다.

오전에 【성녀님과 황태자 전하의 역사적인 혹은 정치적인 결합】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던 신문은 결혼식이 끝난 후, 오후에는 다음과 같은 타이틀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황태자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한 맹세】

당황스러워 식은땀을 닦는 대신관 텔른을 앞에 두고 열렬히 입맞춤을 나누는 황태자 부부를 신문 1면에 그대로 초상으로 실어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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