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달콤한 고문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의 궁은 이전의 음산한 분위기가 깡그리 없어진 지 오래였다.
금칠을 얼마나 했는지 멀리서도 번쩍이며 위용을 과시하는 바람에 황태자궁으로 바뀐 로아드네스의 궁보다 화려해 보였다.
비앙카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욕실에는 로아드네스가 특별히 지시해 만든 욕탕이 있었다.
비앙카가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이미 꽃향기로 가득하고 훈기가 있었다.
본래 황태자비의 목욕시중은 하녀가 아닌 귀족 집안에서 뽑아 올린 시녀들이 들어야 했지만, 즉위식과 결혼식이 동시에 진행되었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나 역시 긴장되는 날에 낯선 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앙카는 기꺼이 내 목욕시중을 들어주면서 적나라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다. 대부분 초야는 이렇게 치러야 한다는 주의사항이었다.
“리엔, 어째 하나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니?”
“아!”
나는 그 말에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비앙카가 내게 말해주는 것들보다 훨씬 낯부끄러운 짓들을 로아드네스와 해본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비앙카는 초야를 치르는 신부의 부끄러움이라 생각했는지 내게 겁먹지 말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늘 겁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친 나를 꼭 끌어안고 비앙카가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
욕실을 나오자마자 마담 르블레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본인이 만든 슬립을 입혀주었다.
그녀의 말을 빌려보자면 ‘섹시하면서도 청순하고, 정숙하면서도 아찔한’ 디자인이라 뭐라나.
***
오늘만 시종들의 목욕 시중을 잠자코 받아들인 로아드네스는 그들이 주는 예복을 꿰어 입고 신방에서 대기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드리엔을 위해 은은하게 지펴놓은 벽난로에 장작을 쏟아부은 로아드네스는 훈기가 방 구석구석을 돌고서야 만족한 듯 신방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태자비궁의 외관과는 달리, 침실은 아드리엔의 취향을 고려하여 꾸몄다.
처음에는 녹빛으로 꾸미려다 그들이 처음으로 밤을 보낸 대공저의 침실이 떠오른다는 이유로 모든 계획을 수정하고 아드리엔이 좋아하는 또 다른 색인 짙은 보라색으로 꾸몄다.
은은한 보랏빛 시폰과 금실로 짠 태슬로 장식된 캐노피가 야릇하게 침대 위를 드리운 것을 보자 흡족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윽고 황태자비가 신방에 들었음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 로아드네스는 황급히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드리엔이 좋아하는 샴페인을 이미 다 세팅해둔 상태였기에 그는 칭찬받을 생각으로 다소 들떠 있었다.
달칵-.
쪼르르 소리를 내며 미리 샴페인을 따르고 있던 로아드네스는 신방에 들어서는 아드리엔을 보고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로안!”
붉게 상기된 얼굴의 아드리엔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번쩍 들고 그에게 달려왔다. 그
는 그제야 잔에 담긴 샴페인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아드리엔, 도대체…….”
“나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그런 걸 지키는 사람이 없다더라구.”
로아드네스는 제 앞에 선 아드리엔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안이 비치거나하진 않았지만 얇은 슬립은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예뻐. 아니, 아름다워. 아니, 고혹적이고…….”
그가 이 정도로 횡설수설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약간 긴장했던 아드리엔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팔랑이는 가슴의 커다란 리본이 눈에 몹시 거슬려 로아드네스가 시선을 애써 떼어놓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엔은 그가 미리 따라놓은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재촉했다.
그는 거대한 샴페인 병이 반쯤 비워지도록 그것을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로안, 그만해. 오늘 내내 그 소리뿐이었잖아.”
“내가 사실 죽어서 아바델리아에 와 있는 거지? 지상에 이런 여인은 아드리엔 하나로 충분한데 어떻게 아드리엔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여기 한 명 더 있지?”
“엄밀히 말하면 난 쌍둥이니까 나 같은 여자가 하나 더 있긴 해.”
완전히 긴장을 푼 듯한 아드리엔이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샴페인을 들이켜는 목줄기를 보자 로아드네스는 갈증이 일었다.
“……리엔.”
“응?”
로아드네스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을 터질 만큼 쑤셔 박았던 과거를 반성했다. 방 안의 공기가 지나치게 더웠다.
고작 샴페인 서너 잔을 마셨을 뿐인데, 결혼식 내내 뛰어대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귓속을 왕왕 울렸다.
“그거 알아?”
“뭘?”
“오늘 대신관이 주례사 하기 전에 우리에게 먹인 것, 그게 뭔지 알아?”
“음, 뭐 성수이려나? 아니면 결합을 의미하는 황실의 전통술 같은 것?”
아드리엔이 가볍게 답했다. 아드리엔은 그게 신랑신부가 나눠 마시는 일종의 기념주라고 생각하고 마셨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는 샴페인이 조금 흐른 그녀의 입술에 손을 뻗었다. 촉촉한 입술을 엄지로 눌러 문질러 닦자 아드리엔의 몸이 약간 움찔했다.
평소 같으면 그녀의 반응을 보고 낮게 웃었을 로아드네스지만 지금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묘하게 조여드는 긴장감을 뚫고 당장이라도 아드리엔을 한입에 삼켜 사탕처럼 입에 굴리고 싶었다.
“직계 황족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강력한 피임약을 먹게 돼. 고귀한 핏줄이 엄한 데서 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면 해독약처럼 그 피임을 풀어주는 약을 먹이지.”
입술을 문질렀던 손이 서서히 내려가 아드리엔의 팔을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몸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아드리엔은 자연스럽게 로아드네스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단단한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이 로아드네스의 눈에 옮겨붙기라도 한 듯. 아드리엔의 눈에 비친 그의 눈이 타닥타닥 튀기 시작했다.
아드리엔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틀어쥔 로아드네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소리야.”
바닥에 짙게 깔린 목소리가 뱀처럼 아드리엔의 귓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의 손 아래 잡힌 아드리엔의 허리가 살짝 움찔했다.
“원하지 않으면 말해줘. 네가 원하지 않으면…….”
“원해.”
망설임 없는 대답에 로아드네스의 관능적인 입술 끝에 희미한 환희가 어렸다.
로아드네스가 목을 쭉 뻗어 아드리엔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숨결이 부드럽게 뒤섞였다.
아드리엔은 그의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얀 두 팔이 그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 옆이 트여 반쯤 드러난 다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드리엔…….”
로아드네스가 맞붙은 입술 새로 억눌린 음성을 내뱉었다.
결국 벌떡 일어난 로아드네스는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까지 그녀를 그대로 덜렁 들어서 데려갔다.
그리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그녀를 제 배 위에 앉힐 때까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돌연 드는 위화감에 로아드네스가 몸을 굳혔다.
“……리엔?”
빨아 삼키던 통통한 입술을 번뜩 놓은 로아드네스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분명 아드리엔을 눕히고 그녀를 제 그림자 아래로 가두려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거의 누운 것이나 다름없이 침대 머리에 기대어 그녀를 제 배 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뜩 든 로아드네스가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강건한 두 팔을 움직여 아드리엔의 허리를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 두 팔과 다리가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엔?”
그리고 로아드네스는 보았다.
“내가 그동안 롯시와 함께 마법을 좀 익혔어, 로안.”
자신을 아래에 깔고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아드리엔을.
하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너무 자극적인 광경에 로아드네스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게…… 무슨?”
“비앙카가 그러더라, 결혼하면 초장에 남편을 휘어잡아야 한다고.”
제 것으로 젖어 있는 붉은 입술이 열리자, 로아드네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갈증이 나던 목이 타오르고 있었다.
“늘 네가 주도했잖아. 오늘은 네 맘대로 하도록 허락 못 하겠어.”
아드리엔의 낮은 속삭임에 로아드네스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그를 속박하는 아드리엔의 마력은 그녀에게 손만 댈 수 없을 뿐, 침대 시트 정도는 충분히 그러쥘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니까, 널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로아드네스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표백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니 네 아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 로안.”
‘네 아내’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황홀감이.
점점 제게 다가와 고개를 기울이는 아드리엔의 얼굴이.
그리고 제 목 아래를 지분거리며 예복이랍시고 입은 셔츠 단추를 푸는 손길이 로아드네스의 이성을 완전히 쥐고 흔들어버렸다.
***
거대하게 부풀어 있는 바지춤이 그와 맞닿은 내 아래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로아드네스가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불룩하게 솟아오르고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로아드네스의 마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모르지만, 이런 어린애들 장난 같은 마법 정도는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위치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성마른 손길로 그의 단추를 풀었다.
로아드네스는 완전히 매료된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내 손이 제 단추를 푸는 걸 지켜보았다.
“읏…….”
내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빗장뼈를 스치자 그가 크게 움찔했다.
“쉬이-.”
로아드네스의 위에 앉아, 그의 셔츠 앞섶을 다 풀어 헤치는 동안 드러난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속절없이 내게 몸을 맡겨야 했다.
로아드네스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싱긋 웃어주고는 로아드네스의 허리띠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로아드네스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아드리엔!”
고정되지 못한 몸통이 크게 튀어서 내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내가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가만히 있어, 로안.”
나는 재빨리 그의 탈의를 돕고, 다시 그의 몸 위로 올라앉았다.
그리고 곧장 단단하게 긴장되어 불거진 그의 복근 위로 뱀처럼 손을 움직였다. 로아드네스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더 돋았다.
“아드리엔, 제발…….”
억눌린 음성이 점점 더 낮게 가라앉았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만둘 순 없었다.
“제발, 뭐?”
“이건 고문이야.”
나는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문이라 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더니, 제 위에 올라탄 나를 홀린 듯 보고 다시 목을 긁으며 깊은 탄식을 시작했다.
“그만할까?”
“아, 제발…….”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로안.”
“……네게 닿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가 이를 악물고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두툼한 그의 가슴 위를 한번 어루만졌을 뿐인데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그동안 왜 로아드네스가 그토록 나를 애태우며 열렬하게 움직였는지 뭔가 알 것만 같았다.
나라고 해보지 않은 행동을 하는데 여유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떨리는 내 손길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나는 바짝바짝 메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이고 동요하는 로아드네스의 몸을 탐험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촉감으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부분들이, 그리고 내 손이 지나갈 때마다 달콤한 괴로움에 허우적대는 그의 목소리가 몹시 감미롭고 동시에 야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아드네스를 더듬으며 입을 맞추었다.
나는 우리의 숨이 깊게 얽어지는 만큼 그의 두툼한 흉근을 어루만졌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갈급한 입술이 내게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