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깊게, 더 깊게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 모르게 욕설을 씹어 삼켰다.
아드리엔은 능숙한 고문 기술자처럼 굴었다.
로아드네스는 저도 모르게 들썩이는 허리를 힘으로 내리누르며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붙잡듯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자신을 만지는 아드리엔을 숨도 못 쉴 만큼 끌어안고 저 좋을 대로 움직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맞닿는 살결은 푸딩 속에 빠진 것처럼 부드럽고 녹진했고, 뒤섞이는 숨결은 달콤해서 머리가 돌 것만 같았다.
느릿하게 흐르던 숨결이 뜨겁고 단단하게 얽어질 무렵.
감미롭지만 격정적인 입맞춤에 화답하던 아드리엔이 서서히 그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로아드네스는 머릿속 어딘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과 동시에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런…… 젠장…….’
한계였다.
입을 맞춰주던 아드리엔의 작은 턱이 서서히 천장으로 향했다.
그 때문에 시야가 밝아졌지만, 눈에 들어와야 할 화려한 천장화가 보이지 않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를 악물고 입안에서 신음을 짓뭉갠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을 붙잡지만 않으면 자유로운 제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누구의 숨소리인지 모를 것이 온몸에 습하게 들러붙었다.
로아드네스는 팔을 내려 시뻘게진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눈가를 붉힌 채 쌕쌕대는 아드리엔의 눈과 마주쳤다.
아드리엔의 가느다란 손이 그의 강건한 어깨를 부술 듯 거세게 그러잡았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이성이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아드리엔.”
잔뜩 쉬어버린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뜨거운 공기를 갈랐다. 아드리엔이 그의 목소리를 입술로 틀어막았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우지끈.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
악, 하고 낮은 비명조차 지르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몸이 기우뚱 기울어짐과 동시에 침대에 눕혀졌다.
번쩍 뜬 눈 위로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그를 속박했던 마력이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의 위치가 뒤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이성이 날아간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나를 삼킬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놔줘! 아직 안 끝났어!”
“……나도 이제 시작이야.”
열기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몸이 내 몸을 덮고 뭉근하게 짓눌렀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뜨거운 온도가 내 감각을 사정없이 가르고 들어왔다.
“으응…….”
아득한 압박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숨이 턱 막히고 순식간에 눈앞이 불이 꺼진 듯 새카매졌다가 밝아졌다.
로아드네스가 나를 빈틈없이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거친 숨결을 흩뿌렸다.
등골이 저릿한 감각에 나는 내게 파고드는 그에게 속절없이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귓불을 잘근 씹고 핥아올린 로아드네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롭게 입술을 겹쳐왔다.
다정한 입술과는 달리 입안을 정복한 뜨거운 살덩이는 닿는 모든 곳을 무도하게 문질렀다.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의 등을 나는 절벽 위에서 붙잡은 동아줄처럼 꽉 끌어안았다.
손톱이 저절로 세워져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꽤 아팠을 텐데도 로아드네스는 움찔하지도 않은 채 그것을 받아들였다.
두 손 안에 느껴지는 단 한 번의 꿈틀거림에 내 의식은 단번에 저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절벽에서 확 떠밀렸다가 다시 둥둥 허공에 띄워지는 것 같은 감각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붉게 물들고, 새카매졌다가 노래지길 반복했다.
로아드네스는 흐느끼듯 숨을 뱉어내기 바쁜 내게 낮은 웃음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다만 감미로운 입맞춤 사이로 자신의 날숨을 쏟아낼 뿐이었다.
자신이 주는 숨만 허락하듯이.
그는 내게 쉴 새 없이 제 숨을 쑤셔 박았다. 그것 외에는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깥 공기가 들어올 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에 휩싸여 그가 내게 주는 숨을 다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속박에서 풀려난 야수가 제 앞에 던져진 아기 사슴을 탐하듯이 이성을 잃은 붉은 눈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나는 그 눈에 속박되어 불태워지는 것만 같았다. 발끝이 곱아들고 그에게 매달린 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반쯤 흐느끼면서도 그가 주는 감각에 취해 웃었다.
“이 순간만 기다렸어. 나는 오직, 이 순간만.”
앓는 목소리를 씹어뱉는 그의 입술은 움직이는 순간마다 야했다.
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서도 무엇을 그리 참고 있는지 불거진 턱 근육은 풀리지 않았다.
강인한 턱선을 따라 가느다란 땀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내 목덜미 위로 툭, 떨어졌다.
등골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자극도, 이성을 멀리 날아가게 하고 흐트러진 날숨만 내뱉게 하는 열기도.
“사랑해, 아드리엔.”
눈가를 붉힌 채 본능만 남은 얼굴로 쉼 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이 축축한 목소리만큼 내게 자극적인 건 없었다.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은은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는 촛불 때문에 거칠게 흔들리는 백금발이 사방으로 반짝였다.
별이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고 동시에 내 의식을 멀어지게 만드는 별.
별빛 언덕에서 본 어둡고도 찬란한 별의 호수에 풍덩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날의 로아드네스가 천사 같았다면, 지금의 로아드네스는 이 어둡고, 습해지는 공기를 지배하는 몽마 같았다.
“로안, 로안…….”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듯 잠깐 떨어졌던 입술을 다시 거칠게 겹쳤다.
모든 게 아득해졌다. 뇌를 잡아 주무르고 척추를 내달리는 저릿함이 온몸에 번졌다.
몸이 공중에 부유하고, 부유하고 또 부유하여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뜨겁고 달콤한 그 까만 공간에서 허우적거릴수록.
깊게, 더 깊게 빨려 들어가 화르르 불타버리는 별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어째 황태자 전하께서 업무는 뒷전이시고 신방에 틀어박혀 나오시질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비 전하. 벌써 혼인하신 지 두어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온갖 달콤한 소문이 끊이질 않아요.”
“노우라 님! 그런 말은 실례라고요!”
“아이린, 이런 건 실례가 아니라 남편 자랑 좀 해달라는 아양이랍니다. 배워둬요.”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티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노우라의 말대로, 결혼식 직후 파티를 다 끝내지도 않고 사라진 황태자 부부에 대한 소문이 이미 제국 전역에 파다하게 났다.
이전의 황태자 부부에게서는 없던 소식이라 황실의 다복한 소식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에는 익명의 제보자가 제국일보에 보낸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의 기고 글이 화제였다.
바르데날도의 영악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장문의 글이었다.
이중으로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보관했다는 추문으로 추락하고 있던 바르데날도의 이미지와 평판이 그 기고 글을 계기로 완전히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러니 새로운 황태자 부부의 소식은 그와 정반대되는 제국의 빛과 소금 같은 소식이었다.
그들은 지금 재채기 한번을 해도 기사에 실릴 만큼 화제성이 있는 ‘호감 가는’ 부부였으니까 말이다.
아드리엔은 노우라가 꺼낸 신방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최근의 로아드네스는 말 그대로 ‘미쳤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집요하게 그녀를 탐했다.
아드리엔은 비앙카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그녀의 남편이 된 로아드네스를 휘어잡으려 나름 애쓰고 있었다.
로아드네스가 잠깐 외부 업무를 보러 나갈 때마다 롯시를 불러 강력한 속박 마법을 더 배우고 익혔다. 밤마다 깨어지고 뭉개지는 마법이었지만 점점 강해지고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게 로아드네스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어 더 짐승으로 돌변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나마 이렇게 사람들의 알현 신청을 받아주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게 된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말대로 신방에서 벗어날 생각도 없이 먹고, 사랑을 나누고, 또 먹고 사랑을 나누다가 아드리엔이 완전히 지쳐서 잠들 때쯤 로아드네스는 꼭 필요한 업무를 신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해치우곤 했다.
그러던 그가 최근 마물이 출몰한 서북부로 출정을 간 탓에 아드리엔은 이제야 좀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던 참이었다.
출정 당일 아침까지 이어졌던 난잡한 기억을 떠올린 아드리엔이 상기된 얼굴을 감싸고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소문은 과장된 면이 있기 마련이죠. 보통의 신혼부부와 다를 바 없답니다. 아양은 좋지만 괜한 억측이 궁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부인.”
“어머, 당연하죠. 비 전하! 저희끼리 하는 말이지 밖에 나가면 입을 딱 다문답니다. 이렇게요.”
노우라가 입을 합 말아 물며 목을 쭉 뺐다.
그 모습이 우스워 아드리엔이 픽 웃으니 그제야 노우라가 안심한 듯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황태자가 널 괴롭히니?”
블리에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어쩐지 속이 불편해진 아드리엔이 잘 먹던 디저트를 한쪽으로 밀어내자 그것을 눈여겨보던 눈이 번뜩였다.
훈훈하게 이어지던 티파티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블리에 님?”
아드리엔이 예를 갖춰 질문하자 블리에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우리끼리 있는데 눈치 보지 말고. 뭔가 이상하잖아.”
아드리엔은 로아드네스가 없는 곳에서 난잡한 생각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아 아찔해지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블리에가 그런 아드리엔의 눈치를 유심히 살피다가 아드리엔이 밀어낸 접시를 가리켰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푸딩이잖아. 올리비아가 직접 만든 우유 푸딩 말이야. 결혼하고 한 달 정도는 그래도 살이 좀 오른다 싶더니 최근 다시 핼쑥해진 것도 같고. 뭐야,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아드리엔은 힘이 넘치는 사내를 남편으로 두면 어쩔 수 없으니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하고 싶은 것을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하지만 블리에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입을 멈출 생각이 도무지 없는 듯했다.
“입맛이 없어진 거지? 원래 사람은 마음이 불편하면 입맛부터 떨어지거든. 아드리엔, 숨기지 말고 말해. 아직 결혼을 무르기에 늦지 않았어. 황태자가 널 괴롭혀?”
“아니야, 아니니까 제발 그만해.”
아드리엔이 티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곁에 앉은 블리에의 무릎을 꽉 틀어쥐었다.
그만하라고 눈으로 강력하게 신호를 보냈는데. 어쩐지 블리에는 그 신호를 잘못 알아들은 듯했다.
‘시녀들의 앞에선 말 못 할 고민인 게 분명해.’
아니었다.
하지만 블리에는 곧장 노우라와 아이린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린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노우라는 ‘블리에 님이 또 헛다리를 짚으시는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 말해.”
“뭘 말해? 그만해, 블리에.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어. 그가 날 괴롭히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어? 뭐야. 괴롭히긴 한다는 거잖아?”
“왜 이래 정말! 다 알면서!”
“알긴 뭘 알아! 말을 해야 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비앙카와 롯시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자매의 다툼을 방관 중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입맛이 안 떨어졌다는 걸 증명해! 먹을 걸 이렇게 밀어내는 덴 다 이유가 있다고! 네 남편 이야길 하면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걸 밀어냈잖아!”
블리에가 접시를 직접 들어 아드리엔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평소 아드리엔이 좋아하던 우유 푸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순간…….
“으윽, 저리 치워……!”
아드리엔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접시를 코앞에 흔들어대던 블리에가 돌처럼 굳었다.
“아드리엔?”
“치우라고 했지! 그냥 속이 좋지 않을 뿐이라고!”
보통 입맛이 없다고 해서 헛구역질까지 하나?
블리에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아드리엔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본격적으로 헛구역질을 시작하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블리에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대공비 시절의 아드리엔이 피를 토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비앙카가 급하게 아드리엔에게 미지근한 물을 권하며 어깨를 감싸 안자 블리에의 머릿속은 더 새하얘졌다. 당황한 블리에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의, 의사!”
급기야 벌떡 일어난 블리에가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한 명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의사를 불러와! 당장!”
그날 오후.
황태자비궁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인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황태자비의 회임 소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