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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2화 (162/171)


162. 외전 1.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1)
2022.11.19.


최근 로아드네스는 바빴다.

새벽에 일어나 아드리엔이 깨기 전에 격렬한 운동을 3시간이나 해치우고.

곧장 식료품 창고로 가서 각지에서 올라온 식자재 골라내는 걸 직접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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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쓰는 일은 빈센토 담당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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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 이게 제일 몸 쓰는 일이니 닥치고 해라, 닐.”

닐은 쓸데없이 부지런한 주군을 둔 죄로 함께 새벽같이 움직여야만 했다.

입에서는 불평이 숨 쉬듯 흘러나왔지만 과도한 업무에 익숙해진 손은 은으로 만든 기다란 침으로 온갖 것들을 다 찔러보고 다녔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순종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개황자 전하에서 개황태자 전하로 승격된 로아드네스를 위한 일이었다면 요령 좋게 빠져나왔겠지만, 황태자비 전하와 황손 아기님을 위한 일이라면 말이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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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황태자비 전하를 위한 일이니까요.”

닐은 온 신경이 황태자비 전하에게로 가 있는 로아드네스를 힐끔대며 은근슬쩍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아도 할 말 없는 발칙함이었지만 로아드네스는 제 할 일을 하느라 닐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은침을 찔러대다 주방장까지 감시하고서야 로아드네스는 늦은 아침 식사를 직접 챙겨 황태자비 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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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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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어났어?”

로아드네스는 찬 기운을 몸에서 떨궈 내려 벽난로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아드리엔에게로 갔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덜렁 안아 들고 아침을 차려놓은 식탁으로 향한 그는 능숙하게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아드리엔이 임신한 지 8개월이 흘렀다. 8개월 치곤 남들보다 유달리 배가 불렀다.

주치의가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했어도 로아드네스는 불안했다. 몸은 이전보다 건강해졌지만 약한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임신을 한 몸이었다.

그는 아드리엔이 불러 오른 배로 힘들어할 때마다 제 일처럼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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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안, 너도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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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 먹으면.”

아드리엔이 입덧을 심하게 했던 기간은 이미 다 지났다. 가리는 음식이 몇 가지 생기긴 했지만 이전처럼 모두가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드리엔의 입덧 기간이 지나자 반대로 로아드네스의 입맛이 뚝 떨어져 있었다.

매일 격렬한 운동을 하고 기계적으로 고기를 씹긴 하지만 그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식단일 뿐. 가끔 아드리엔과 함께 즐기던 디저트도 뚝 끊고는 그녀와 비슷한 양의 음식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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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네가 회임한 줄 알겠어, 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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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어.”

토마토 수프를 다 마시고, 만다린 샐러드를 반쯤 먹자 로아드네스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밀 빵을 쭉 뜯어서 아드리엔의 코앞에 들이댔다.

아드리엔은 입만 벌리고 그 밀 빵을 받아먹었다.

걱정으로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입매가 스르르 풀렸다.


“난 네가 이렇게 아기 새처럼 받아먹을 때 제일 행복해. 두 손을 꽁꽁 묶어놓고 내가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게 귀여워 죽겠어. 입을 오물거리는 것도 너무 귀여워서 사실 지금도 네가 한번 씹을 때마다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어, 알아?”

“아아.” (알아.)

매일 그렇게 말하잖아.

쉼 없이 빵을 밀어 넣은 탓에 볼이 빵빵해진 아드리엔이 우물거리며 답하자 로아드네스가 괴로운 듯 인상을 썼다.


“그것도 알아? 진짜 귀여운 걸 보면 막 파괴하고 싶고. 막 짓뭉개고 싶고. 막 주무르고 싶고. 그런 충동이 든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다들 그런 감정이 한 번씩은 찾아온대. 난 매일 그런 충동이 들고.”

“으어오 아아.” (그것도 알아.)

매일 아침을 먹여줄 때마다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인식 못 할 만큼 얼이 빠져 있다니.

아드리엔이 속으로 혀를 쯧, 차며 신선한 우유 한잔으로 볼 속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근데 로안.”

득달같이 다가와 입가에 묻은 우유를 자연스럽게 핥아 먹은 로아드네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응?”

“일은 안 해?”

아드리엔의 임신 소식은 최대한 비밀에 부쳐지다가 몇 달 전에 밝혀졌다.

유난히 부푼 배를 더 이상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담 르블레아가 솜씨 좋게 임산부 같아 보이지 않는 드레스를 만들어 주어 그나마 버텼지만 한계였다.

그리고 며느리의 회임 소식에 황제궁에서 두문불출하던 황제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결혼한 후 처음으로 문안 인사차 황제궁에 들었을 때 야인이나 다름없이 덥수룩하게 자랐던 수염은 온데간데없었다.

레티나 황후의 장례를 다시 경건하게 치른 황제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기만 했는데, 며느리의 회임 소식 한 번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로아드네스는 자신에게 떠맡겨진 업무를 모조리 제 아비에게 다시 떠넘겼다.

그리고 정말 미련 없이 몇 달간 그녀의 ‘시종’이 되고 말았다.


“내 일은 널 보살피는 건데?”

“네 본연의 업무 말이야.”

아드리엔은 그게 걱정이었다. ‘제국의 탕아였던 황태자께서 상대를 제대로 만나셨다.’, ‘부인에게 꽉 잡혀서 치마폭에 휘둘리신다.’ 뭐 그런 종류의 소문들이 돌까 봐 걱정됐다.


“리엔. 난 지금 우선순위대로 내 일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야.”

“황제께선 많이 약해지셨어. 네 형님이 개자식이긴 했어도 일은 많이 했었고.”

로아드네스가 말없이 입 헹구는 물을 가져다주었다.


“할게. 걱정 안 시켜. 몸 쓰는 일만 하다가 의자에 붙어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그리고 네가 지척에 있으니 제정신으로 일하기 힘든 게 사실이긴 해.”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드리엔은 입을 헹궈내고 자연스럽게 로아드네스의 품에 안겼다.

그러곤 자신을 달랑 들어 다시 침대로 옮기는 동안 미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늘었잖아, 리엔. 나도 나름 바빠. 널 먹이고, 우리 아기에게도 먹이고…….”

“뭘 먹인다는…….”

아직 온기가 남은 침대에 등이 닿기 무섭게 두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로아드네스가 감미롭게 대답했다.


“주치의가 그러더군. 이제 완벽한 안정기라 부부관계를 해도 상관없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대. 조절만 잘하면.”

중심을 잡기 위해 붙든 로아드네스의 팔은 지나치게 단단하고 이전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운동하고 왔으니 당연했다. 아드리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아기님에게 아비의 사랑도 먹여줘야지.”

물고 빨던 입술을 잠깐 놓은 로아드네스가 낮게 속삭였다.

지난 몇 달간 부지런히 그리고 지극히 공손하게 시중들던 그을린 손이 하얀 네글리제를 파고들었다.

대화를 멈춘 입이 집요하게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자 입안에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가 사그라들었다.

부풀어 오른 보드라운 배를 쓰다듬던 따뜻한 손이 서서히 올라와 말캉한 살갗을 움켜쥐었다.

뜨겁게 얽어와 헤집는 숨결을 들이마시며, 아드리엔은 언제나 그랬듯 그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

로아드네스는 벗어던졌던 점잖은 옷을 꿰어 입고 아드리엔의 몸에 눈처럼 하얀 이불을 덮어주었다.

로아드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제 아내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 잠든 아드리엔의 뺨을 어루만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반듯하고 볼록한 이마. 작지만 윤곽이 또렷한 코. 그가 물고 빨아 붉게 달아오른 젖은 입술을 더듬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고 잠시 굳었던 손은 그녀가 눈을 뜨지 못하고 계속 잠에 빠져들자 다시 움직였다.


“리엔.”

대답 없는 아내가 사랑스러우면서도 그는 동시에 불안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설렘으로 물들어가는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드리엔이 낮잠을 자는 동안, 그는 임신한 여인에 대한 책을 모조리 섭렵해왔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어내리면서 내린 결론은 무지했던 예전과는 달랐다.

부부에게 임신은 축복이었지만, 한 사람의 여인에게도 그러한가?

로아드네스는 떨리는 손을 내려 아드리엔과 자신의 결실이 잠든 배를 어루만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따뜻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져주면 대답이라도 하듯이 배 속의 생명이 통, 통! 하며 배를 걷어찼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태동을 느낀 순간 미약하게 미간이 모아졌다.


“으응……”

잠결에 태동을 느낀 아드리엔이 낮게 신음하며 뒤척였다.

로아드네스는 출산을 하며 몸을 망치고 생명을 잃은 여인들에 대해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하듯, 임신과 출산에 대한 막연한 행복과 모성애에 대한 경외심만 가득했던 내용 중에 짤막하게 적혀 있는 ‘출산으로 생명을 잃는 산모의 숫자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이라는 내용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낮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가련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를 아주 오래도록 응시했다.

***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어느새 해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깨셨어요, 전하?”

“응.”

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침실을 정리하던 요나가 부리나케 내게 다가와 마실 물을 건넸다.

나는 마침 깔깔하던 목을 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후궁에서 연락이 와서 준비 중이었어요.”

“곧 나갈게.”

요나가 싱긋 웃으며 빈 물그릇을 받아들고 나가자 나는 머리맡에 놓인 보라색 튤립 한 송이를 발견했다. 드리워진 캐노피에 가려 요나는 보지 못했을 꽃 아래에 짧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롯시를 만나고 올게. 일어나면 네가 꽃향기에 미소 짓길 바라며. -너의 안-]

두어 달밖에 안 남은 출산일 때문에 이제는 정원을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 전에 늘 정원 산책을 시켜주던 로아드네스는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정원의 꽃을 꺾어 손질까지 해서 가져다 놓곤 했다.

내가 임신한 후. 로아드네스는 내가 황실의 정쟁에 의한 피해자이니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황제께 강력히 요구했다.

나는 이전처럼 트로비카 대공이 될 자격은 없었지만 대신 트로비카 영지의 일부와 수도에 있는 대공저를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 대공저는 블리에와 롯시에게 빌려주어 블리에는 그곳에서 후계자 수업을, 롯시는 내 부탁으로 앞으로 마법에 대한 제재가 풀릴 론타를 위해 조언을 하며 머무는 중이었고.

로아드네스는 롯시에게 자문을 구하러 거의 매일같이 대공저로 향했다.

가끔은 뭘 하는지 좀 지쳐 보이는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허전해진 옆자리를 괜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하지만 마음마저 쓸쓸하진 않았다.

여덟 달 가까이 로아드네스와 붙어 있다 보니 내 마음은 충만한 사랑으로 흘러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대로 나는 튤립에 코를 묻곤 조용히 미소 지었다.

통!


“아.”

태동이었다. 씩씩한 발차기로 제 존재감을 알리는 아기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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