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3화 (163/171)


163. 외전 1.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2)
2022.11.23.


가만히 배를 쓰다듬는데 황후께서 납셨다는 소리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요나가 재빨리 내 곁으로 와서 일어나는 나를 부축했다.

믿을 만한 사람만 곁에 두는 게 좋겠다는 의견에 힘입어 사용인들을 새로 뽑는 것은 나중으로 밀어두었던 터라 요나가 주로 내 곁을 지켰다.

16694464376112.jpg

“누워서 봐도 되는데요, 비.”

16694464376121.png

“아닙니다, 폐하.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요.”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친히 들어온 그레이스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웃었다.

16694464376112.jpg

“늘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던 황태자께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왔답니다.”

좋은 말로 ‘파수꾼’이지 그가 내 ‘시종’처럼 굴고 있다는 건 암암리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16694464376121.png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폐하.”

16694464376112.jpg

“아니요, 제 부인을 아낀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정도가 좀 심하긴 해도 최근 어두웠던 황실 분위기를 단번에 밝게 빛내준 황손의 아비라면 마땅히 이해할 수 있지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레이스가 제 시녀들의 손에 들려온 물건들을 연달아 티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다.

16694464376112.jpg

“내 고향에서 임부들에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좀 가져와 봤어요. 에페로를 낳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랍니다. 입덧 시기가 지났다고 해도 여전히 몸이 불편할 테죠.”

내 임신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늘 살뜰하게 챙겨주던 그레이스의 시선이 이제 만삭을 코앞에 둔 내 배를 걱정스레 훑었다.

16694464376112.jpg

“많이 답답하지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견디세요, 비. 순산하기만 하면 황제 폐하께서 나라라도 안겨주려 하실 테니까요.”

16694464376121.png

“예?”

내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떠오르자 그레이스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16694464376112.jpg

“만삭의 임부는 홀로 쉬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도 내가 눈치 없이 자꾸 오는 이유가 뭐겠어요, 비? 황제 폐하 때문이랍니다. 폐하께서 어찌나 황태자비를 잘 살피라고 닦달을 하시는지……. 며느리를 매번 보러오는 게 너무 팔불출 같아 보이진 않을지 걱정하시면서 늘 저를 대신 보내신답니다. 참 귀여운 시아버지가 아닌가요?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으시거든요.”

몰랐다.

나는 어찌 되었든 노에비안의 아내였던 적이 있었고, 바르데날도가 황태자비로 삼으려고까지 했다는 추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가 나를 탐탁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존의 위치에서 내게 그런 티를 내지 않았으니 내 짐작일 뿐이었다.

16694464376112.jpg

“허망함으로 가득하던 그분의 인생에 찾아온 새로운 빛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해요.”

그레이스가 황제에 대한 연민을 가득 드러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16694464376112.jpg

“게다가 비가 딸을 낳으면 이름을 ‘레티나’로 짓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전달해드린 뒤로 슬픔을 더 이겨내신 듯했어요.”

16694464376121.png

“그렇군요.”

나는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황제 폐하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분의 진심을 알고서 떠올려보니 늘 무뚝뚝하던 입매가 조금 풀려 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16694464376112.jpg

“……비?”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나더니 끔찍한 고통이 배를 강타했다. 나는 숨을 들이켠 채로 굳어 그레이스의 손을 꽉 잡아야만 했다.

16694464376112.jpg

“비!”

16694464376121.png

“배가…… 배가…….”

그레이스의 일렁이던 눈이 상황 파악을 끝낸 듯 결연해졌다.

16694464376112.jpg

“시녀장! 시녀장! 비께서 진통이 오는 것 같다!”

그레이스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통! 통! 하며 태동을 하던 아이가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16694464429164.jpg

 

***


16694464376112.jpg

“죽을 수도 있는데.”

1669446442918.png

“상관없어.”

16694464376112.jpg

“진짜 죽을 수도 있는데.”

로아드네스의 단정한 눈썹이 비틀렸다.

롯시는 못 이기는 척 결국 손에 든 주머니를 그에게 넘겼다.

블리에가 늘 ‘내 동생의 남편은 진짜 미친놈이야.’라는 말을 달고 다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터라 어안이 벙벙했다.

16694464376112.jpg

“내가 또 이번 세대에 역사를 기록한다면, 당신을 ‘미친 사랑꾼’이라고 명명해두지.”

1669446442918.png

“그거 영광이네.”

사납게 웃던 로아드네스가 받아낸 주머니를 품속에 소중히 품었다.

16694464376112.jpg

“차라리 내게 고통을 줄여줄 약을 만들어달라고 했으면 아주 흔쾌히 만들어 줬을 거야.”

1669446442918.png

“빨리도 말하네. 하지만 그런 약엔 대가가 있겠지. 그 고통을 조금씩 나누어서 오래 겪는다든가.”

16694464376112.jpg

“…….”

로아드네스도 털어놓을 곳 없는 제 마력에 대해 이골이 날 만큼 공부를 한 터라 지식이 상당했다. 마법으로 무언가를 이루었으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1669446442918.png

“그 어떤 하찮은 고통이라도, 아드리엔은 느껴선 안 돼.”

단호하고 명쾌한 말에 롯시는 할 말을 잃었다.

롯시는 팔짱을 끼고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로아드네스를 훑었다.

작당 모의가 끝나면 아내 보러 가기 바쁜 놈이나 늘 저렇게 제 몸가짐을 살폈다. 털 고르는 공작새가 따로 없었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로아드네스가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롯시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1669446442918.png

“아드리엔에게는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대마법사. 내 아내는 나 같은 시종 놈의 생채기 하나도 안타까워하는 천사니까.”

X랄도 병이었다.

그 천사가 블리에의 몸으로 얼마나 발칙한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는지 다 기억하는 제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뻔뻔했고.

롯시는 질린 얼굴로 얼른 꺼지라는 손짓을 했다. 옷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 다 떨어낸 금발의 미남이 간단한 턱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연구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오만한 황태자의 발칙한 부관이 마침 그 문 앞으로 요란하게 뛰어왔다.

16694464376112.jpg

“전하! 전하!!”

1669446442918.png

“무슨 소란이지?”

발칙한 부관, 닐은 평소의 게을러터진 얼굴과 달리 다급해 보였다.

16694464376112.jpg

“비 전하께서 진통을 시작하셨습니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16694464376112.jpg

“어서 가 봐.”

롯시는 괜히 저까지 긴장해 로아드네스를 재촉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롯시에게로 돌렸다.

지옥에서 온 사신같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경고등처럼 번쩍 켜진 붉은 눈이 이상하게 번들거렸다.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축객령으로 해소하려던 롯시에게 로아드네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16694464376112.jpg

“뭐 해? 당신의 천사께서 진통을 시작하셨다잖아.”

1669446442918.png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을 데려가야 더 안심이 될 것 같군.”

무시무시한 얼굴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롯시의 작고 통통한 몸이 로아드네스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낮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찰나였다.

짐짝처럼 그의 어깨에 들려진 롯시가 꽥꽥대며 블리에를 찾기 시작했다.

제 ‘천사’에게서 속박 마법을 제대로 배웠는지 엄청난 힘이 롯시를 꽉 짓누르기까지 했다.

16694464491907.png

“당장 안 튀어가고 뭐 하는 거야!”

도움을 청하려 부른 블리에는 롯시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로아드네스를 재촉하며 자신까지 마차에 올라탔다.

롯시는 그대로 블리에가 올라탄 마차에 떨궈졌다.

16694464376112.jpg

“저런, 미친!”

탁-!

욕을 하기도 전에 마차 문이 닫혔다. 성난 손길로 마차 창문을 여니 밝은 금발이 벌써 흑마를 타고 저 멀리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16694464376112.jpg

“저런 미친놈이 감히 나를 뭐로 보고!”

이런 치욕을 겪으면서 순순히 황궁으로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롯시가 마차 문을 다시 열기도 전에 이번엔 블리에가 마차 벽을 미친 듯이 때렸다.

16694464491907.png

“달려! 달려, 이 망할 말들아!”

롯시는 거칠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그보다 더 거친 블리에의 기세에 눌려 그대로 황궁으로 끌려갔다.

***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이 굳는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내 팔을 연신 주물렀다. 겁에 질린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니 나 역시 덜컥 겁이 났다.

16694464376112.jpg

“전하, 전하 절대로 정신을 놓으시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16694464376121.png

“올리브…….”

16694464376112.jpg

“전하는 못 보내요. 헬레네 님처럼 그리 덧없이 가실 순 없어요.”

올리비아가 내 팔을 주무르며 눈물로 두 뺨을 적셨다. 황실만 맡아온 산파가 창백한 얼굴로 아래를 살폈다.

16694464376112.jpg

“힘을 더 주셔야 해요. 아프시겠지만, 지금 힘든 건 황손께서도 마찬가지니까요.”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한다는 것쯤은 머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줄이기 위해 피워둔 약초향은 속을 메스껍게 했고, 힘을 주느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시작으로 목까지 열이 끓어올랐다. 귓속이 뜨겁고 깨문 입술에선 피가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났다.

아직 본격적인 진통은 시작도 아니라는데, 내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16694464376112.jpg

“순산하실 거예요. 나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셨죠?”

16694464376112.jpg

“리엔. 날 봐, 리엔!”

눈이 몽롱해지자 비앙카가 내 뺨을 약하게 때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로 얼굴이 흠뻑 젖어가면서도, 로아드네스가 보고 싶었다.

16694464376121.png

“나,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16694464376112.jpg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비릿한 피 냄새. 눈앞에 보이는 피에 젖은 흰 천들이 내 속을 뒤집었다.

한쪽에는 비앙카가, 한쪽에는 올리비아가 잡고 있는 손을 아무리 부여잡아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16694464376112.jpg

“이름까지 지어줬잖아, 리엔. 리엔! 아이를 생각해. 딸이면 레티나로 짓겠다고 한 거 기억 안 나니?”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떴지만 눈앞은 까맣기만 했다.

정신을 차려야한다며 격려하던 목소리도 열에 들뜬 내 귀에 끝까지 닿지 않았다.

16694464376112.jpg

“리엔! 리엔!!”

나는 이게 무슨 감각인지 정확히 기억했다.

16694464376121.png

‘나, 죽는 건가.’

보이지 않는 양쪽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16694464376121.png

“로안…….”

16694464376112.jpg

“리엔! 리엔!!”

16694464376112.jpg

“어떻게 좀 해 봐요!"

이 익숙한 감각.

내가 죽기 직전의 그 감각이었다.

깊고 어두운 물속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까지 끌려들어 가는 감각 말이다.

16694464376121.png

‘내가 죽으면…….’

아주 강하고, 절박하기까지 한 힘이 온몸을 옭아매고 더 깊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16694464376121.png

‘내가 죽으면, 로안은 어떡하지.’

폐부가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은 감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한 암흑으로 끌려들어 갔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피비린내와 약 냄새가 진동을 하던 산실이 아니었다.

16694464376112.jpg

“이제 정신이 드나 보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은 퀭한 눈을 한 롯시였다. 나는 이상하게 가뿐한 몸을 일으켰다.

16694464376112.jpg

“정말 귀찮은 사람들이야.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한단 말이야.”

16694464376121.png

“롯시 님?”

롯시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콘솔에 올려져 있던 거울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다소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롯시가 건네는 거울을 보기만 했다.

16694464376121.png

“롯시 님께서 여기는 왜……? 아. 아! 제 아이는요? 제 아기는…….”

16694464376112.jpg

“이거나 봐.”

속은 울렁거리지만 몸은 무척 가뿐하고 힘이 넘쳤다. 마치 블리에의 몸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처럼.

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강렬한 기시감은 뭐란 말인가.

퀭하게 질려 있는 롯시의 얼굴. 그녀가 건네는 거울을 받아든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16694464376112.jpg

“네 미친 남편이 한 짓을 좀 봐.”

16694464376121.png

“이게, 이게 무슨…….”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내가 아니었다.

16694464376112.jpg

“네 남편이 너 대신 진통을 겪겠다며 벌인 어마어마한 짓.”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로아드네스였다.

1669446462211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