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5화 (165/171)


165. 외전 2. 거슬리는 남자들 (1)
2022.11.30.


론타의 황제 율리어스가 실로 오랜만에 연 성대한 파티는 웅장함의 극치였다.

단순히 아름답게 꾸민 것이 아니라, 론타 황실 연회의 진수를 보여주듯 압도적인 푸른빛과 황금색으로 뒤덮인 아틸차드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까지 들게 했다.

황태자 즉위 파티보다 웅장한 이 황실 파티의 주인공은 황제나 황태자 부부가 아니었다.

오늘은 론타 황실이 오래 기다려온 황손들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강력한 마력의 증거라고 밝혀진 ’코즈마‘라는 중간이름을 하사받은 쌍둥이 황손들을 보기 위해 수도 귀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 거대한 이벤트의 초대장은 비단 론타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개중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도 있었다.


“네 선에서 막았어야지, 빅토르!”

“나. 없다. 힘. 알고 있다. 너.”

“몰라! 가뜩이나 마음 심란한데 저런 걸 달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다했다. 최선. 막았다. 일 년!”

일 년 만에 만난 친우를 갈군 에페로는 저 뒤에서 따라오는 화려한 인영을 보고 머리를 짚었다.

10명이 넘는 빅토르의 누나 중 한 명이자, 엘라콘의 여왕인 옥사나 반셰이크였다.

아침 일찍 아주 급작스럽게 연락이 와 황궁 앞이라고 한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그게 자그마치 여왕이라니.

사정이라도 들어보겠다고 귀를 기울였지만 돌아온 대답들이 더 어이없었다.

자그마치 1년 동안이나 허락 없이 제국을 돌아다녔다는 대답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정체를 감추고 쥐새끼처럼 잘도 돌아다녔네. 이 넓은 론타를. 이거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알아?”

“잘한다. 누님. 제국어.”

“그게 문제야, X끼야.”

아틸차드홀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문이 더 빠르게 번지게 생겼다.

옥사나는 보석으로 유명한 엘라콘의 여왕답게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을 입고서 보석이 그녀를 삼키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을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보석들이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 영롱하게 빛났다. 높이 올려 묶은 분홍 머리가 그의 속도 모르고 발랄하고 당차게 흔들렸고.

수수한 차림의 황궁의 관료들과 파티를 맞아 몰려든 귀족들이 옥사나가 지나갈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당연했다.


“에페로야. 잘생긴 황태자는 언제 만날 수 있지?”

“여왕님. 경고하는데, 형님을 보고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건 여전하구나. 난 그래서 네가 좋다만.”

숨 쉬듯이 들이대는 옥사나는 에페로에게 익숙했다.

날 때부터 당당하고 도도했던 여왕은 거절이란 걸 받아본 적 없던 여자다.

그 유명한 ‘론타의 2황자’가 방문하겠단 의사를 전했을 때 그녀는 대놓고 제 궁에 침실 하나를 새로 꾸미라 지시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왕다웠다.

로아드네스의 방문을 기대했던 그녀는 로아드네스가 방문 계획을 취소한 뒤로 엘라콘으로 다시 들르기는커녕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던 것에 조금 뿔이 나 있었다.

아무리 에페로가 서신으로, 빅토르가 말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도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과는 달랐다.

즉, 로아드네스가 신혼의 단맛에 젖어 있는 지난 일 년간 그런 여왕의 심술과 분노를 받아낸 사람은 에페로와 빅토르였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황태자 로아드네스를 호시탐탐 흠집 낼 기회만 노리는 이들이 숨죽이고 있는 판에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 에페로는 나름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게다가 황태자가 되고 결혼을 한 뒤로 로아드네스의 신경은 온통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 있으니 엘라콘과 관련한 모든 사항은 에페로에게 떠넘겨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옥사나가 몰래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을 지켜봤으며, 거기서 황태자의 미모에 홀려 비슷한 사내를 찾겠다며 이 넓은 론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지 않는가.


‘정말 미친 여자야.’

에페로가 질린 얼굴로 아틸차드홀 앞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여왕의 방문 소식에 손님맞이에 분주한 시종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에페로야. 황태자는?”

“형님께서 일일이 나와서 반기셔야 하는 일입니까, 이게? 공식적으로 서한을 보내고 방문을 했어야죠. 제 권한으로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조카들이 태어난 이후로 황궁이 평화로운 참입니다.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마시고 조용히 놀다가 가세요.”

에페로가 달려 나온 시종장에게 자신이 맡겠으니 다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귀찮아도 자신이 맡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금 더 천천히 진행하려 했으나 여왕이 밀고 들어오는데 황궁 앞에서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아드네스에게 언질은 해두었지만 아드리엔에게 온통 신경이 가 있는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놀다 가게 하라’는 말이나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엘라콘과 관련된 일에 모르는 일이 없어야 하는 에페로의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했다.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나라인데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와서 로아드네스에게 불리한 말이나 한다면 귀족들에게 물어뜯길 구실만 주는 게 아닌가?


‘롯시를 찾는 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로아드네스가 황태자가 된 이후, 론타는 마법에 대한 금지와 재제를 조금씩 풀고 있었다.

주변 대륙을 통틀어 마나석 광산을 독차지하고 있다시피 한 엘라콘과의 협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말이다.

에페로는 부디 옥사나와 로아드네스가 어떤 식으로든 부딪히지 않고 자신이 겨우 유지하고 있는 우호 관계가 깨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이왕이면 엘라콘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귀족들에게 각인시켜야 로아드네스의 입지도 더 단단해질 테고 말이다.


 

***

아틸차드홀 2층에서는 태어난 지 100일이 된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별들’과의 알현이 한창이었다.

2층 층계참에서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과 주변국의 사신들부터 차례로 황금 요람 속에 있는 황손들과 조우했다.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에게 뭐라 속삭이거나 요람을 흔들어줄 때 빼고는 줄곧 싸늘한 얼굴을 유지했다.

귀한 자식들을 처음 밖으로 선뵈는 자리이니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리가 마침내 계단을 올라왔다.


“형님. 아침에 급히 말씀드린 엘라콘에서 온 손님들입니다.”

“반갑다. 또 본다.”

에페로의 불안한 시선이 해맑은 빅토르를 지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옥사나에게로 향했다.

저 도톰하고 맹랑한 입술에서 무슨 폭탄이 나올지 긴장되어 손발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그 팽팽한 긴장감은 다른 손님들에게도 전달되었던지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옥사나는 말없이 로아드네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어 그 곁에 서 있는 아드리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보석을 감정하듯 진득하고 분석적인 잿빛 시선이 얼마간 그리 머물렀을까.

옥사나는 로아드네스의 눈썹이 꿈틀대기 직전에 아드리엔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 눈으로 본 것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분들에게 경의를.”

에페로의 걱정과는 달리 옥사나는 아드리엔과 로아드네스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주인공인 쌍둥이에게로 다가갔다.

에페로가 걱정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로아드네스가 아이를 봐도 좋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요람에서 손님을 상대하던 론타의 두 황손은 유모들의 손에 덜렁 들려져 얼굴을 내보였다.


 
쌍둥이 중 먼저 태어난 레티나는 아드리엔을 쏙 빼닮은 진한 금발에 로아드네스의 눈을 빼다 박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낯선 옥사나를 반겼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데다 100일밖에 안 된 아기라 많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게 분명한데도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이 방긋 웃으며 사람을 녹였다.

아기가 웃으며 두 손을 짝! 모으자 세상이 다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에페로는 저도 모르게 헤 풀어지려는 입매를 단단히 여몄다.


“내 딸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에게도 친절하군.”

로아드네스가 유모의 품에서 제 딸을 받아 안아 들며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점잖은 정복을 입어도 성난 몸을 다 감출 순 없어서 거대한 사내가 아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좀 우스꽝스러웠다.

아기가 그의 손에 들린 빵 한 덩이처럼 보일 만큼 작았기 때문이다.


“로안.”

“응.”

그는 나무라듯 이름을 부르는 아드리엔의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내리곤 기꺼이 입을 맞추었다.

살짝 닿기만 했어도 파장은 컸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실의 일원이 대놓고 애정행각을 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때와 장소는 좀 가리시지요, 형님.”

“왜. 보기 좋은데.”

옥사나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되려 에페로를 말렸다.

다행히 로아드네스는 에페로의 지적에 크게 개의치 않는지, 이번엔 제 딸의 뺨에 입 맞추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여왕님. 제 아들 칼데이온에게도 인사해주세요.”

아드리엔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권했다.

칼데이온을 안은 유모가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레티나와의 시간에 흠뻑 빠져 주변이 보이지도 않는 로아드네스를 가리기 딱 적당한 위치였다.


“오.”

이미 레티나에게 반쯤 홀려있던 옥사나의 눈이 빨려 들어갈 듯 두 번째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방금 자다가 일어났는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칼데이온이 옥사나와 눈을 맞추었다.

마주친 눈동자는 바로 곁에서 빙긋 웃고 있는 론타의 황태자비, 아드리엔과 완전히 같은 연녹빛 눈동자였다.

청록에 가까운, 무수히 많은 에메랄드 중에서도 최상급 에메랄드 색깔.

그리고 마력으로 해치운 마물의 심장에서 발견되는 마나석 보석과 같은 색 말이다.

한쪽 눈에는 점막에 가깝게 작은 점이 콕 박혀 있었는데 별것 아닌데도 시선이 이끌렸다.

아이임에도 윤곽이 또렷한 코와 샹들리에 빛을 다 머금은 밝은 백금발은 제 아비의 것을 떼어다 붙인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운 아이들이로군요.”

“전하. 여왕께서는 아름답고 반짝이는 걸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십니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직접 몇 번이고 아름답다고 하시는 건 드문 일입니다.”

에페로가 황급히 옥사나의 말을 설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딸의 볼을 물고 빨기 바쁜 로아드네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아드리엔만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인데도 말이다.

잠깐 당황한 채 눈을 깜빡이던 아드리엔이 정신을 차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론타 최고의 미남이니 아름다울 수밖에요.”

느리지만 정확하게 흘러나오는 엘라콘어에 이번에는 옥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순식간에 환기하는 음성이었다.

새초롬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옥사나의 입가에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은 미소가 걸렸다.


“아하하-. 하지만 그리 말씀하시는 황태자비께서 가장 탐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옥사나가 따뜻한 말과는 달리 다소 사납게 웃었다. 짙은 잿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가족을 빠르게 훑고 떨어져 나갔다.

언뜻 화기애애해 보이는 이곳의 분위기와는 달리 엘라콘의 여왕과 황태자 부부가 가까이 있을수록 아래에서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더 긴장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2황자였던 로아드네스가 엘라콘으로 향하다가 황궁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시기가 있었다.

엘라콘과의 불화 때문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던 시기였다.

엘라콘이 두려워 엘라콘과 관계가 좋은 에페로를 황태자로 옹립하려는 소수의 귀족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 옥사나 반셰이크는 오늘…….”

갑자기 1층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여는 옥사나를 보고 에페로가 흠칫 놀라 소리쳤다.


“여왕님……!”

“마력을 가진 진정한 후계 부부를 만나, 공표하려 한다.”

빅토르마저 깜짝 놀라 제 누님을 말리려 손을 뻗었다.


“누님!”

“오늘부터 엘라콘은 론타 제국과 맞닿은 모든 국경을 개방하고 지지부진하던 국교를 정상화하여 엘라콘과 론타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한다!”

옥사나의 목소리에 긴장하고 있던 귀족들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옥사나가 다정하게 황태자비 아드리엔의 어깨를 감싸 쥐며 시종이 가져온 샴페인을 들어 올리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속셈이지?”

쏟아지는 박수의 갈채 속에서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의 어깨에서 옥사나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며 경계했다.


“쌍둥이 황손께서 물려받으신 게 부모님의 아름다운 외양만은 아닌 듯해서 말이에요.”

옥사나는 빅토르의 팔에 다정히 매달리며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풀어진 입술 끝에는 날카로운 직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후계가 론타에서 둘이나 탄생했군요. 미리 화친을 맺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우리 엘라콘을 위협할 인재가 되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