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6화 (166/171)


166. 외전 2. 거슬리는 남자들 (2)
2022.12.03.



 
다소 얼떨떨하지만 어쨌든 좋은 소식이라 1층의 분위기는 상기되었다.

황태자 부부와 여왕이 서 있는 자리는 아직도 미묘한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미묘한 공기를 대신관 텔른의 음성이 가르고 들어왔다.


“이토록 축복된 날, 축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십지로부터 완벽한 황태자파이자 충신이 되었다며 조롱을 받는 대신관 텔른이 2층까지 단숨에 올라와 두 팔을 벌렸다.

쌍둥이 성녀님이 참석하는 자리라면 언제든 기꺼이 얼굴을 내비치는 그가 론타에 찾아든 희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황제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옥사나와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에페로는 당초 막무가내로 혼인 동맹을 맺겠다 외치진 않을까 걱정했던 옥사나가 제법 얌전하게 굴어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페로가 아는 옥사나는 현재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변덕스럽긴 해도 무언가 계략을 꾸며 사람의 뒤통수를 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엘라콘 문제는 이로써 한시름 놓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듣기로 요즘 여왕의 관심은 강력한 마력을 가진 후계를 낳는 데 있었으니까 말이다.

황제와 악수를 하고 돌아온 옥사나는 아쉬운 듯 로아드네스를 응시하다가 에페로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사실 이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저 황태자에게 내 침소로 들라고 외치고 싶은 걸 참았단다.”

“옥사나!”

에페로는 혹시 아드리엔이 이 말을 들었을지 힐끔대며 낮게 비명했다. 옥사나는 황금을 칠한 송곳니가 드러날 만큼 웃어 보였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슬픈 게 싫어. 내가 황태자와 맺어지면 저 아름다운 황태자비와 쌍둥이들이 매일같이 눈물로 살 것 아니냐?”

“누가 여기서 여왕님, 당신을 좋아하기라도 한다고?”

“지금 네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면 내 하렘에 있는 아름다운 사내들이 엉엉 울겠구나.”

옥사나가 능숙하게 에페로의 뺨을 툭 치고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로아드네스에게로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진심이 담긴 악수 요청이었다.

그새 손녀의 얼굴을 보러온 황제에게 레티나를 넘긴 로아드네스가 무감각한 얼굴로 그 손을 맞잡았다.

힘자랑을 하듯 콱 틀어잡는 악수에 옥사나의 한쪽 눈썹이 쑤욱 들려 올라갔다.


“그런데 두 나라가 화친하기 위해선 결혼 동맹이 필수인 걸 아시려나 모르겠군요.”

“…….”

이번에는 로아드네스의 눈썹이 잠깐 움직였다. 아름다운 것을 눈에 새기듯 진한 시선을 보낸 옥사나가 의도적으로 황금빛 송곳니가 보이도록 웃었다.


“하여 오늘부터 이 론타를 돌며 내 남편감 하나는 데려갈 생각이에요. 몇 년이 걸리든. 못 찾으면 에페로라도 데려갈 테니 그리 아시길.”

곁에서 에페로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한 나라의 왕이 용케 오래도록 자리를 비우는군.”

“엘라콘은 내 자매들의 것이기도 하니,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간답니다. 론타에서 미남들을 데려가면 더 좋아할 테죠.”

“그런 나라에서 잘도 컸구나, 에페로.”

악수를 마친 로아드네스가 아직 토하는 시늉 중인 에페로를 불러 일렀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진지한 얼굴이 된 에페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까지 빠짐없이 보고 있던 옥사나가 피식 웃었다.


“에페로가 없었다면 엘라콘은 단숨에 론타로 쳐들어왔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불같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니까요.”

“아, 그랬다면 재밌었겠군. 론타는 질 생각이 없으니까.”

옥사나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곡 연주가 시작된 1층 홀로 유유히 내려갔다.

로아드네스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서늘한 얼굴로 시종이 받쳐 들고 온 거대한 황금 접시에 담긴 물에 손을 넣었다.

깨끗이 손을 씻은 로아드네스가 어느새 요람 속 조카들을 훔쳐보고 있는 에페로에게로 다가왔다.


“에페로.”

“예, 형님.”

“잘했다.”

좀처럼 듣기 힘든 형님의 칭찬에 에페로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로아드네스와 에페로의 시선은 옥사나를 따라 동시에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새로운 황태자 부부와 빨리 찾아온 황손에게 쏟아지던, 호의적이지만 불안한 시선들이 놀랄 만큼 사라졌다. 황태자가 바뀌고 황손이 태어나며 나라에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이 조금 부풀어 오른 분위기였다.

파티의 주인공처럼 춤을 추는 엘라콘 여왕에게 먼저 다가가는 이도 있었다.

에페로는 그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찍이 상석에 앉아 흐뭇하게 보던 그레이스 황후와 눈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감동과 안심은 잠시 뒤로 미뤄둘 때였다.


“형님. 이전에 해주신 약속 말입니다.”

이제 실질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차례였으니 말이다.

에페로는 급격히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늘 태산같이 거대한 제 형님을 응시했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다소 자비롭게 빛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콘과의 문제. 해결한다면 청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로아드네스가 에페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간 살짝 자라나 흩날리는 붉은 머리.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장신구며 반항적인 눈빛은 여전한데.

몇 달 전 있었던 신년 가면무도회에서 성년이 된 이후로 눈빛이 조금 진중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변화보다 로아드네스가 눈여겨 본 건 그 눈빛 안에 스민 낯선 감정이다.

에페로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아래층에서 빅토르에게 이끌려 춤을 추기 시작하는 블리에를 발견하곤 벼락같이 내뱉었다.


“형사취수제.”

레티나로 다시 뻗어지던 로아드네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동시에 반듯한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평소 같으면 로아드네스의 반응에 움찔했을 에페로였지만 이번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거 이제 폐지하신다고 한 거, 취소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아드네스의 이성이 뚝, 끊겼다.


 

***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에 오니까 멀미가 날 지경이군.”

“그동안 잘도 싸돌아다녔으면서 엄살은.”

“네 오빠가 그 말버릇 고치라고 여러 번 지적하지 않았나?”

“스승님 따라다니면서 능숙해진 건 마법보다 욕이야.”

“너한테 욕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수천 년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니 그런 사소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블리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말솜씨가 늘어났다. 롯시는 피로함을 느끼며 파티장 구석에 몸을 기댔다.


“맨날 보는 조카들이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파티장까지 쫓아와? 이제 파티는 슬슬 질린다더니.”

블리에는 근 1년간 수도에 머물면서 후계자 수업뿐만이 아니라 온갖 곳에 다 불려 다녔다.

처음엔 그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에 이끌려 신나게 다녔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성녀’ 블리에의 이미지를 충족시켜야만 했기에 흥미를 잃은 참이기도 했다.

뒷말하는 사람들 정수리에 샴페인도 들이붓지 못하는 귀족이라니!

아드리엔이 만들어 놓은 이 기괴한 연극에 참여하느라 블리에는 성질에도 안 맞는 자비로운 미소를 장착해야만 했다.


“오늘은 다른 나라 사신들도 잔뜩 온다던데? 잘생긴 놈 있으면 한 놈 낚아야지. 안 그래?”

“……스승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나마 자유로운 것은 연애였다.

아드리엔이 제 앞길에 훼방만 놓은 것은 아닌지 블리에는 그런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면서도 인기가 너무 많아 탈이었다.

아름다운 미망인이었던 그녀가 단번에 최고의 신붓감으로 탈바꿈하자 고향인 피레타며 현재 머물고 있는 대공저며 청혼서를 가지고 온 시종들로 발 디딜 틈이 없기도 했었고.

멀찍이서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 아이린 시스코메틴의 오빠, 콘스탄틴 시스코메틴을 애써 외면하던 블리에는 황태자 부부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이전의 오만하던 미소는 찾아볼 수도 없어요. 유모가 넷이나 있는데도 밤에는 늘 직접 쌍둥이 황손들을 재우신다더군요.”

“맙소사. ‘그’ 황태자 전하께서요?”

여기저기서 들리는 황태자 로아드네스에 대한 찬양에 블리에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롯시는 황태자의 ‘황’이라는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냈다.


“저놈의 실체를 다들 알아야 하는데. 그 대단한 황손들을 낳기까지 얼마나 생난리를 피웠는지.”

“스승님도 처음엔 안 믿었잖아? 내가 분명 경고했는데 말이야. 내 동생한테 360도로 돌아버려서 멀쩡한 척 돌아다니는 미친놈이 내 동생의 남편이라고.”

“그리고 너는 기꺼이 그 미친 짓을 돕고?”

“제일 처음 도운 건 스승님이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지 몰라. 나야 내 동생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데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력이 돌아와 건강해졌어도 저 애는 내내 아프고 약했던 애니까!”

블리에가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속삭였다.


“스승님이 제일 나빠. 어지간히도 그 마법 실험해보고 싶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블리에가 신경질적으로 롯시를 흘겼다.

아드리엔의 미친 남편이 블리에가 썼던 고대 마법을 펼쳤다. 정확히는 조금 더 안전하고 일시적인 비슷한 마법이었지만.

마력을 일부러 다 쏟아내 본인을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고, 스스로 ’살아 있는 죽음의 약‘까지 꿀꺽 삼키고 말이다.

아드리엔이 과부가 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블리에는 그 장면을 보고 기함하면서도 마법진 그리는 걸 도왔다. 이미 비슷한 걸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 않았다.

블리에는 루비처럼 반짝이는 자그마한 마나석 보석 하나를 기억했다.

로아드네스의 마력이 왕창 들어가 붉게 변한 작은 마나석이었다.

그만한 마력을 회복하는데 꼬박 1년이 넘게 걸린다는 말에도 제 마력을 모조리 그 보석에 쏟아 넣은 로아드네스는 롯시에게 도와준 대가로 그것을 줘버렸다.

블리에는 롯시가 그 보석을 자식처럼 쓰다듬고는 곧장 주머니에 넣어 소중히 품에 넣는 걸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 거대한 마력을 쓸 만한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블리에가 비밀을 캐내듯 스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딴청 부리는 게 분명한 롯시의 얼굴이 언뜻 상기되어 있었다. 거슬렸다.

하지만 롯시의 성격상 목걸이가 된 그 붉은 마나석을 대체 어디 쓸 건지 말해줄 리 없었다.

롯시의 품에 감춘 목걸이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던 블리에가 아쉽게 중얼거렸다.


“나도 뭔가 보상을 달라고 해야겠어. 얼떨결에 도왔다고 어물쩍 넘어갈 생각일랑 말라고 똑똑히 전해야겠고.”

블리에가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 그때.

아까부터 그녀에게 친한 척을 하길래 함께 춤을 췄던 분홍 머리 곰 같은 엘라콘 왕자가 멀리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문은 몇 분 전 로아드네스와 에페로가 사라졌던 바로 그 뒷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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