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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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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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외전 2. 거슬리는 남자들 (3)
2022.12.07.
에페로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그를 보며, 하녀 한 명이 낮게 비명했다.
“괜…… 쿨럭! 괜찮으니까. 쿨럭, 소란…….”
기침 한 번에 각혈이 쏟아졌다.
하녀가 두 손으로 비명을 막고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에페로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들것에서 침대로 스스로 옮겨 누웠다.
파티장 3층 구석에 위치한 손님방이었다.
쿵쿵쿵쿵. 벌컥-!
빅토르가 노크도 없이 달려와 문을 열어젖혔다.
그와 함께 온 블리에를 확인한 에페로가 재빨리 등을 돌렸지만 빅토르가 훨씬 빨랐다.
널찍한 어깨를 콱 틀어잡고 벌떡 일으키는 바람에 억 소리도 못 하고 에페로가 일으켜 세워졌다.
“아!”
갈비뼈가 몇 대 나갔는지, 엄청난 고통이 쏟아졌다. 생각보다 심각한 에페로의 상태에 블리에가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황태자가! 때렸다!”
“빅토르, 나가! 쿨럭-. 아니에요. 대련이었어요. 나도 형님을 몇 대 때렸고요.”
“대련이었다면, 목검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만뒀어야 하는 거다! 내가 봤다! 에페로가 목검을 놓쳤는데 황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검을 꺼내라고 소리쳤다! 에페로가 진검을 꺼내자마자 다시 박살을 냈다!”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제국어 잘하는데? 소공작은 왜 불러왔고? 닥치고 당장 나가!”
빅토르가 제 목격담을 술술 풀어내곤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필요하면 불러라.’라는 말과 함께.
에페로는 또다시 터져 나올 것 같은 각혈 때문에 손수건을 찾아 품을 뒤졌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블리에가 제 품에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에페로는 제 눈앞에서 팔랑이는 손수건을 보고 움찔하더니 조용히 받아 입을 막았다.
그 후로 의사가 다녀갔다.
갈비뼈에 금이 살짝 간 듯하고, 몸에 타박상이 많은 것 빼고는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거봐요, 괜찮잖아. 그러니까 이제 나가요. 뭣 하러 이런 험한 꼴을 보러 와요?”
“나라고 얻어터진 꼴 보고 싶어서 왔겠어요? 저 곰 같은 엘라콘 왕자가 날 끌고 왔다고요.”
블리에는 초면에 친근하게 인사하던 빅토르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또한 아드리엔이 뿌려놓은 업보라 여기고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니 끝이 없었다.
잘 추지도 못하는 춤을 추자고 해서 개망신만 당하게 하고.
곧장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더니 한참 있다가 블리에를 찾아와 에페로가 다쳤으니 같이 가봐야 한다고 닦달을 하지 않겠는가?
블리에는 에페로에게 이 귀찮은 왕자를 좀 떼어놔 달라고 부탁하러 왔다가 이런 몰골을 봐버린 것이고 말이다.
안 봤으면 모를까 봤는데 매정하게 돌아서기는 힘들었다.
침대 머리에 위태롭게 기대앉은 에페로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화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는 대화하고 싶은 줄 아나…….’
블리에는 인내심이 그리 크지 않은 자신을 다독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난 1년간 거의 매일같이 만나온 덕에 대공저에 에페로를 위한 손님방까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가까이 지내며 도움받은 것도 그만큼 많으니 좀 참아주기로 했다.
“황태자께서 황궁에 붙어 있지 않는 동생이 걱정이라도 되셨나? 그나마 봐줄 만한 얼굴도 죄다 터졌네요. 봐요. 등에는 약 못 바르니까 발라줄게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황자님 몸 한번 만져볼까.”
“당신은 그런 말 진짜 아무렇지도 하는 게……!”
조금 성난 것 같은 에페로가 블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꺼낸 말인데 조금 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블리에의 얼떨떨한 얼굴을 마주한 에페로가 눈을 내리깔고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려버렸다.
“다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렇게 차갑지?”
“……황자님.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자꾸.”
“물고 빨고 죽고 못 살던 때는 언제였냐는 듯이. 누구는 곧장 동생하고 혼인해서 첫날밤에 아이까지 생기고. 누구는 또 그 동생 잘생겼다 몸이 좋다 온갖 말을 하면서 희롱하죠. 론타가 말도 안 되게 개방적인 나라라는 걸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블리에는 그제야 에페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녀와 아드리엔의 비밀은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고, 에페로는 그 극소수에 들어가지 못했다.
에페로가 굳이 알아봤자 달라질 것이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블리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의사가 놓고 간 약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보지 않고 벽만 보고 있는 에페로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왜 그렇게 얻어터지고 왔냐니까요.”
“형사취수제. 그거 없애지 말아달라 했어요.”
“!”
침대 끝에 걸터앉은 블리에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 황자가 비밀을 알아챈 걸까?
그래서 제 사랑을 위해 형님을 죽이고 아드리엔을 취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블리에는 굳은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에페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결국 답답한 블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요?”
“…….”
또다시 정적.
에페로는 또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탈의한 상반신이 온통 붉게 물든 데다가 서서히 거칠어지는 호흡 때문인지 흉곽이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도망?”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해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속하라고요.”
“할게요. 말해요, 빨리. 나 인내심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인내심이 크지 않다는 말에 붉은 머리카락이 잠깐 파르르 떨렸다.
블리에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1년간 지척에서 지켜보았으니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입술이 터진 채 붉게 달아오른 에페로의 얼굴이 블리에 쪽으로 조심스럽게 돌아왔다.
블리에가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걸 몰랐던지 생각보다 가까운 얼굴을 확인한 에페로의 눈이 강하게 일렁였다.
“나,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블리에는 그가 말하는 저의를 몰라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형사취수제를 폐지해달라 했다면 당연히 그 부인인 아드리엔이 저가 좋아했던 여자라는 걸 깨달아서가 아닌가?
“듣고 있어요?”
블리에가 엉킨 생각을 푸느라 대답이 없자, 에페로가 초조하게 말했다.
“나, 당신 좋아한다고요.”
“그게…… 형사취수제랑 무슨 상관인데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에페로의 얼굴이 조금씩 실망으로 물들었다.
사랑 고백에 대한 대답치고는 너무 취조하듯 묻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블리에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당신 계략 잘 짜잖아요.”
“…….”
“당신 계략 잘 짜니까. 아무리 동생이라도 수틀리면 황태자비 전하의 뒤통수를 치고 나중엔 황후 자리까지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후계자 수업을 그리 열심히 듣는 것도…… 힘을 키워서 나중에 배신하려는 거라 생각했고요. 이 나라엔 성녀가 하나 더 있으니 누군가 부추기면 당신이 이어서 황후가 될 수도 있잖아요. 자매가 황후가 되는 건 황실에서 흔한 일이라고요.”
이 황자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가? 블리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마나석 광산이 부족한 론타에 마물은 이제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됐잖아요. 형님의 힘으로 그것들을 죽이면 순도 높은 마나석이 마물의 심장에 생기는 것도 알았고. 형님은 몸 사리지 않는 분이니 나라를 위해 마물을 죽이다가 언젠가 재수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서요?”
“형님이 죽는 건 싫지만, 만약 형님이 잘못되면…….”
“동생을 처리하고 황후가 되어 있을 나를 취하겠다고요?”
에페로의 얼굴은 이제 제 머리카락과 완전히 같은 색깔이었다.
블리에는 침대 끝에서 내려와 팔짱을 끼고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황자를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 도대체 아드리엔은 제 몸으로 에페로에게 무슨 말들을 했길래 너무나도 당연하게 블리에가 계략을 짜서 아드리엔의 뒤통수를 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거란 생각을 하냔 말이다.
“참나…….”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로아드네스에게 밑도 끝도 없이 형사취수제를 폐지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면 이렇게 얻어터질 만했다.
형님이 죽고 나면 형님의 아내를 취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동생의 말에 갈비뼈 몇 대와 시퍼런 멍으로 대답한 거라면 꽤 자비로운 처사이기까지 해 보였다.
블리에의 어이없는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페로는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황자님.”
“네.”
부르니까 또 곧장 그녀를 올려다본다.
블리에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에페로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미묘한 반응에 불안감을 느낀 에페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왜 좋아요?”
에페로가 조금 멍청해 보일 만큼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좋은지 말해 봐요. 언제부터요? 우리 친구라면서요?”
“친구로 좋아했어요. 인간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해서 호감이었고요.”
흠.
아드리엔의 남자관계를 훔쳐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블리에가 잠자코 들었다.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에페로가 망설이다 덧붙였다.
“근데 여자로 느껴진 건…… 그러니까 당신에게 이성적으로 끌린 건 그냥 찰나였어요.”
블리에가 더 해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 하자 에페로가 한참 숨을 몰아쉬다 한숨처럼 답했다.
“저는 피레타 공작이 되고 싶어요.”
“?”
“피레타 공작이 되면 사내도 두셋쯤 들일 수 있을까?”
“뭐라고요?”
“그렇게 말했잖아요. 피레타 공작을 쳐낼 때. 그때 난 전율을 느꼈다고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블리에는 과거를 떠올렸다.
원수나 다름없는 아비의 말에 귀나 후비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답하던 순간들. 원하는 게 뭐냐는 물음에 황태자비 자리가 아니라 피레타 공작이 되고 싶다 말했던 순간들.
“이전에는 뭐랄까. 그저 동경하는 마음이었죠. 내가 형님을 동경하고 또 따르고 싶어 하듯이요. 보이지 않는 벽도 느껴졌고요. 근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당신을 완전히 새롭게 봤어요. 하는 짓은 위험하기 짝이 없어도 늘 좀 고지식한 느낌이 있었는데 아니더라고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내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재밌기도 하고 더 알고 싶어졌고요. 살면서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
“당신이 형님의 여자인 걸 아니까 마음을 숨기려 했는데…… 형님이 당신을 버리고 당신도 그걸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괜히 내가 화가 났어요. 주제 넘는 거 아는데, 그냥 그랬어. 기분 나빠요?”
블리에는 잠깐 숨을 골랐다.
“당신과 가까이 지냈던 지난 1년간 난 계속 당신이 좋아졌어요.”
“…….”
말을 종합해보면, 에페로는 아드리엔이 블리에였을 때가 아니라 블리에가 제 몸을 찾은 이후로 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것 아닌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알아요. 당신은 아직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내가 형님의 동생이란 것도 내키지 않을 테고.”
실컷 주절주절 떠들었는데, 블리에의 반응이 계속 미묘하기만 하자 에페로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시무룩해졌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생각해보니 전 연인에게 얻어터진 꼴로 이런 말이나 했네, 빌어먹을. 못 들은 거로 해요.”
에페로가 멍해져 있는 블리에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근사하게 말할 테니까, 잊어달라고요.”
그리고 이전과 같이 건방지고 오만한 황자의 표정으로 요청했다.
블리에는 누워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쓴 에페로를 보다가 말없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기분이 나쁘냐고?’
블리에는 문을 닫고 나와서야 제 기분을 찬찬히 살폈다.
‘미치겠네.’
당황스럽게도.
아주 당황스럽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굉장히 거슬렸다.
그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