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69화 (169/171)


169. 외전 2. 거슬리는 남자들 (5)
2022.12.14.


아드리엔은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에 짓눌렸다.

그녀에게 온전히 몰입한 로아드네스가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붙여왔다.

아드리엔의 살갖에 짓눌린 입술 새로 뭉개진 고백들이 온몸을 적셨다.


“로……안…….”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탐욕스러운 정복자는 사랑을 애원하면서도 입술은 떼지 않았다.

예민해진 감각을 가르고, 탐닉하는 열기에 아드리엔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그 눈물에 따라붙었다.

그녀가 슬퍼서 우는 건 못 견뎌 하면서도 이럴 때 우는 건 만족스럽다는 듯 낮게 웃으니 참 교활한 남편이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시트를 빠르게 갈고 깨끗하게 씻겨주기까지 하는 로아드네스는 일한 지 20년은 족히 된 시종같이 능숙했다. 시종 일이 천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황태자가 이런 잡일까지 한다고 하면 다들 비웃을 거야.”

“그럼 그 입들을 찢어놓을까.”

낮게 웃으며 이불속에서 다시 그녀를 품어 안는 가슴에 아드리엔이 푹 파묻혔다.


“또 그런 못된 소리나 하지.”

“아드리엔. 난 너 말고 모두에게 관대하지 못해.”

“레티나와 칼데이온에게도?”

하얀 등을 지분거리다 슬금슬금 움직이던 못된 손이 잠시 멈칫했다.


“우리 아기 천사들도 내겐 네 다음 순위야.”

그리고 초저녁부터 불타올랐던 몸이 전혀 지치지도 않고 슬그머니 그녀의 몸에 다시 붙었다.

아드리엔은 움찔하다가 그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로아드네스는 익숙한 듯 그녀에게 팔을 내어주고 다시 몸을 붙여왔다.


“으응…….”

아드리엔이 한차례 몸을 들썩이자 로아드네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아드리엔이 잠시 굳었다가 서서히 몸을 풀었다.


“로……안……. 에페로 님을 때렸어?”

드러난 뒷덜미에 거친 숨결이 흩뿌려졌다.

아드리엔이 오소소 돋는 소름에 몸을 움츠릴 새도 없이 로아드네스가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읏…….”

“그놈 얘긴 하지 말자. 겨우 화를 다스린 참이니까.”

로아드네스가 허공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아드리엔을 더 품에 안았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그의 열기에 아드리엔의 감각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


“그놈 편을 드는 건 아니지?”

어느새 흩어진 이성 사이사이로 로아드네스의 낮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왔다. 아드리엔은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아 잠시 숨을 고르고 답했다.


“난 네 편이지. 하지만 에페로 님을 때릴 필요는…….”

“아드리엔, 자식한테도 질투하는 놈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마. 부탁이야.”

부드러운 입술과는 달리 까끌까끌하고 거칠어진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더듬었다.


“우리 사이에 거슬리는 놈들은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까, 그러니까…….”

보드라운 살결을 더듬다가 다정하게 움켜쥔 손이 뜨거웠다. 그와 닿은 모든 곳이 다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같았다.


“너한테 미쳐 있는 놈 좀 불쌍하게 생각해줘, 아드리엔.”

나도 어쩔 수 없어. 폭군이 되더라도 거슬리는 놈들을 다 치워놓지 않으면, 다정한 네 머릿속에 나 아닌 다른 놈 이름이 잠시라도 스쳐 지나는 걸 참을 수가 없어.

속삭임은 끝이 없었다.

부드럽지만 뜨겁고 집요한 손길.

함께 쏟아지는 조금은 거칠고, 귀여운 협박이 섞인 애원.

사랑한다는 말 사이사이에, 가지고 또 가지고도 목이 마르다며 치대는 남자에게 아드리엔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거칠게 터져 나오는 날숨까지 그의 입에 다 쏟아부어 주고서야, 그녀의 남편은 평소처럼 낮게 웃어주었으니 말이다.


‘낮에 알아듣게 타일러야지.’

최대한 에페로의 이름은 빼고, 사정을 설명하고 넘어가 달라 설득하면…….

아드리엔이 눈을 내리깔고 상심하는 표정 한 번만 지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그녀의 남편은 격렬한 밤과는 달리 순종적이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리라.


 

***

다음 날.

에페로가 오랜 침묵을 깨고 아침 일찍 대공저로 도착했다.


“생각 많이 해봤는데. 내 마음 안 바뀌어요.”

“무슨 뜻이에요?”

“솔직히 너무 놀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이에요.”

곧 도착할 옥사나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에 여념이 없던 블리에는 갑작스러운 선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며칠 새 눈이 퀭해진 에페로는 생각보다 마음고생을 많이 한 얼굴이었다.


“……대답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아뇨. 대신 매일매일 처음인 것처럼 고백할 거예요.”

에페로가 조금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음 정리를 끝내서인지 그는 조금 홀가분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짐 마차에 여행을 준비하는 짐들이 실리고 있었다.


“매일 하긴 어려울 텐데요. 전 오늘부터 옥사나 님을 수행해야 해서.”

“아, 그거. 나도 가기로 했어요.”

얼굴을 붉히던 에페로가 돌연 빙글거리며 답했다.


“네?”

“방금 형님께 무릎 꿇고 사죄하고 오는 길이에요. 형사취수제는 실언이었고, 당신을 좋아하니까 도와달라고요. 그러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그걸 황태자께 말했다고요?”

“네. 대신 꼴도 보기 싫으니 황태자궁이든 황태자비궁이든 당분간 얼굴 비추지 말라시던데요. 그래서 방금 조카들 방에 숨어들어 가서 몰래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온 참이죠.”

큭큭 웃으며 벌써 조카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에페로의 얼굴에 이전과 같은 장난기가 묻어났다.

블리에는 진실을 다 알고도 자신이 좋다는 에페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에페로가 ‘그래도 당신이 좋다’라는 답을 들고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사실 좀 당황했다.

자신이 마치 이 집안의 가주라도 된 양 여왕이 곧 도착할 테니 사용인들에게 속도를 높이라며 닦달하는 꼴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어? 누구지?”

블리에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에페로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블리에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줄줄이 세워진 짐마차 끄트머리에 롯시의 짐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별관 연구실에서 제 짐을 가지고 나오는 롯시가 보였다.


“누구예요, 저 남자?”

경계심 가득한 에페로의 목소리가 로비를 왕왕 울렸다.

그냥 남자도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이 아름다운 남자가 별관에서 나오자 에페로가 득달같이 뛰쳐나갔다. 도둑을 발견한 개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블리에는 자연히 어젯밤 롯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 평생의 숙원은 진실을 밝히는 거였어. 내 모든 걸 바친 일들이 묻히는 게 참을 수 없이 힘들었지.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 같은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평생 이루지 못했던 숙원을 네가 이뤄주고. 살아가는 목적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어느새 들여다보니 너밖에 없더구나.’


‘정이라 생각했는데. 내 남은 평생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상상해보니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본래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블리에는 시비를 거는 에페로에게 대답하며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스승의 눈을 애써 피했다.

갑자기 진심을 퍼부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과식한 사람처럼 속이 더부룩한 기분을 느꼈다.


“소공작 님! 엘라콘 여왕께서 곧 도착하신답니다!”

마리가 밖에서 들어오며 그녀에게 황실에서 온 서신 하나를 건넸다.

아드리엔이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과 거의 동시에 도착한 듯 대공저 입구에서 시끌벅적한 행렬의 소리가 들려왔다.

『블리에, 내 반쪽에게.

블리에 피레타로서 떠나는 첫 여행을 축하해.

비록 일 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난 네가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귀었으면 좋겠어.

차기 공작으로서든, 그냥 블리에라는 한 사람으로서든, 어렵고 힘든 선택은 많은 것을 경험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실패하고 상처받아도 네겐 돌아올 집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해. 』

 


“……귀엽고 요망한 것.”

잠시간 혼란으로 얼룩졌던 블리에의 얼굴이 편지를 반복해 읽고는 말끔해졌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리 깊게 생각했다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남자들이 아닌가?

갑자기 아주 놀라울 만큼 마음이 가뿐해졌다.

몇 달 동안 얌전한 척하던 걸음걸이가 다시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짐을 모두 실었습니다, 소공작 님.”

마리의 전언에, 블리에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아름다운 남자를 모으는 것 말고는 세상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얼굴의 옥사나가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침부터 번쩍번쩍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화려한 차림의 여왕 뒤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드는 빅토르가 보였다.

블리에가 간단히 예를 갖추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어찌나 거대한지 장정 예닐곱쯤은 우습게 태울 만큼 컸다.

그리고 그 큰 마차 안에 여왕과 빅토르는 물론이고 실랑이를 하던 에페로와 롯시까지 타 있었다.

블리에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에페로와 마주해야 했다.


“이게 말이 되냐고? 여자 아니었냐고? 목소리가 중성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키가 이렇게 크냐고? 왜 젊어져? 왜 잘생겨졌지? 왜 허여멀건 한 남자가 롯시라고 거짓말을 하냐고?”

“난 단 한 번도 여자라고 한 적 없다.”

“말투 똑같은 거 소름 돋아. 소공작, 알고 있었어요, 설마?”

‘날 불편하게 하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

롯시를 감상하며 추파를 던지던 옥사나가 블리에를 향해 아주 재밌다는 듯 빙긋 웃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하렘은 엘라콘 왕궁이 아니라 피레타 저택에 생길지도 모르겠군. 론타는 황제를 제외하곤 일부일처제던가? 그런 구닥다리 법은 바뀔 때도 되었지.”

“론타가 정신 나갈 만큼 개방적인 나라여도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죠?”

“과연? 에페로야. 네가 나서서 법을 바꿀 수도 있다는 데에 광산 하나를 거마. 쟁쟁한 후보자들을 제치고 네가 피레타의 데릴사위가 되려면 많이 노력해야겠는걸. 내 빅토르도 괜찮은 신랑감이거든.”

거슬린다, 거슬려.

블리에는 제 앞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아.’

온갖 시선이 자신을 색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붉은 눈.

누군가의 잿빛 눈.

또 누군가의 푸른 눈.

망할.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엘라콘에서 자란 어린 시절.

하렘을 만든 여왕과 그 자매들을 부러워하며 온갖 미남자와 뒹구는 상상을 하긴 했지만, 막상 제게 온갖 남자들의 관심이 쏠리자 적응이 안 됐다.

이렇게까지 거슬리고 신경 쓰일 일인가?


 
담담한 얼굴로 감정을 갈무리한 롯시.

다리와 팔을 꼬아 앉은 채 잔뜩 골이 난 얼굴의 에페로.

그리고 여왕이 표정 관리 좀 하라며 타박을 해도 헤벌레 웃으며 몸을 바짝 붙여오는 빅토르까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아까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적당히 즐기다가 쿨하게 떠날 사람들이라면 좋을 텐데.

저렇게 하나같이 자신 외에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사내들만 꼬이느냔 말이다.


‘하여간 거슬리는 남자들.’

저 인간들이 버티고 있는 한은 그녀의 자유로운 연애는 순탄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 여행이 재밌어 죽을 것 같다는 여왕의 벼락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차가 대공저를 지나 흙먼지 속을 달렸다.

푸르른 창공을 뒤로한 채 달리는 마차는 출발부터 떠들썩했다.

그 속에서 어떤 관계가 얽히고설킬지는 아직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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