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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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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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외전 3. 아카데미의 젊은 교수님
2022.12.17.
어느새 로열 아카데미에도 봄이 불쑥 찾아왔다.
론타 최고의 일간지 『제국 일보』의 기자 다프네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제국 일보에 기고 글을 보내준 아카데미의 젊은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다프네는 처음 그 기고 글을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생생했다.
론타의 성자라 불리던 전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뭔가 구린 점이 있는 것 같은 직감이 넘실거리던 시기였다.
언론에 대한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론타였지만 그래도 아예 황실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런데 황실에서 아주 오래된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 바르데날도까지 추문에 휩싸이자 다프네는 특종을 터트리기 위해 온갖 추잡한 소문이 나도는 곳들만 골라 취재를 다녔다.
허탕만 치던 어느 날. 편집장이 특종을 물어오라 아주 들들 볶는 바람에 늦게까지 신문사에 남아 일을 하던 밤이었다.
전서구도 아닌, 야식으로 주문한 뜨끈한 옥수수빵 바구니 밑에 문제의 그 기고 글이 처음 다프네의 앞에 도착했다.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두 얼굴]
보자마자 온몸의 막힌 혈류를 다 뚫어버릴 듯 속 시원한 제목의 그 기고 글은 다프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숨겨진 뒷모습이 낱낱이, 하지만 적당히 정도를 지켜가며 기술되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몇 년째더라.
손가락을 꼽아보던 다프네가 오른손으로 모자라 왼손을 들었을 때 로열 아카데미 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자 생활의 은인이자 동반자인 교수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이번 달 기고 글 마감일은 아직인 줄로 압니다만. 굳이 이리 걸음 하신 이유는?”
“저번처럼 연락이 뚝 끊기실까 봐 미리미리 안부차요, 하하.”
여자치고는 키가 제법 큰 편인 다프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는 로열 아카데미 특유의 투박한 검은 가면을 쓰고 정체를 감추고 있어도 우아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하긴. 로열 아카데미의 교수라면 어딘가의 왕족이었겠지. 영지조차 받기 힘든 황족이거나.’
론타가 대부분을 차지한 대륙이었지만 동서남북으로 크고 작은 왕국들이 즐비했다.
로열 아카데미는 론타의 황족과 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에는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은 이들만 로열 아카데미의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줬다.
경쟁에서 패배했거나 정쟁에 질린 귀한 분들은 영원히 졸업하지 않고 다니거나 학자나 교수가 되어 살아갔다.
그러니 교수에게도 마나석 가면은 예외가 아니었다.
가지런히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카만 흑발이었고, 음영이 진 마나석 가면 사이로 보이는 총기 어린 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이었다.
다프네는 이 젊은 교수의 진짜 얼굴이 궁금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이 젊고 우아한 교수는 몇 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자신의 신분인 로열 아카데미의 행정학 교수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로열 아카데미는 교수도, 학생도 무명에 가깝게 별칭이나 애칭으로 부르는 베일에 싸인 곳이었으니 조사도 어렵고 말이다.
다프네는 처음 들어와 보는 그의 집무실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벨벳 소파에 앉았다.
누가 봐도 남자의 취향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짙은 초록색의 소파는 남자가 이 집무실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손님맞이용으로 가져다 놓은 것치고는 1인용 소파는 단 하나뿐이었고, 차를 마시기는커녕 편지 하나도 겨우 쓸 만한 사이드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당연하게도 새롭게 소파를 들인다든가 하는 수고 없이, 제 집무실 의자에 앉아 다프네를 응시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행동이라기엔 지나치게 거리감이 있었다.
“이번에 승진했거든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교수님의 기고 글을 실을 수 있어서 단 한 번의 낙오도 없이 승진했어요. 덕분에 제가 곧 편집장이 된답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제가 편집장쯤 되면 이름을 알려주시겠다고. 그동안 이름도 모르는 분을 교수님이라는 신분만 믿고 기고 글을 게재해 드렸으니 이번 달은 기고 글도 직접 받아 가고. 교수님 성함도 여쭙고. 그러려고요.”
다프네는 서글서글 웃는 낯으로 수도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꽃바구니까지 꺼내 흔들어 보였다.
작은 사이드 테이블을 꽉 채우고도 남은 촌스러운 꽃바구니에서 꽃잎 몇 송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만큼 조심하셨으면 많이 하셨어요. 전 황태자 전하에 대한 기고 글을 아무리 신문에 올려도, 그분의 이미지가 아무리 땅에 처박혀도 황실에서는 그저 못 본 척한다니까요? 솔직히 지금의 황태자 전하께서 인기가 훨씬 많아요. 황실에서는 그걸 이용하는지도 모르죠. 오히려 교수님께서 정체를 밝히시고 활동을 하시면 혹시 아나요?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실지도 모르죠.”
아차.
다프네는 마지막 문장을 말하지 말 걸 하고, 살짝 입을 닫았다.
로열 아카데미가 어떤 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무는 곳인지 한순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 어쨌든 제 말은요. 이만하면 이름 정도는 알려주셔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다프네는 아까부터 말없이 책상만 두들기는 창백한 손을 보았다. 길쭉한 손가락은 책상조차 우아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표정은 볼 수 없지만, 그녀는 남자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좋습니다.”
“와!”
“대신 기고 글은 계속 이대로 보냅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고.”
“네! 성함이…….”
남자가 일어났다.
그녀를 지나쳐 창가로 간 남자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끈덕지게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노아.”
“예?”
“내 이름입니다.”
다프네는 어쩐지 남자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
황태자 부부는 매년 봄이면 동부의 피레타로 휴가를 떠났다.
가는 길에 마물 토벌도 하고, 피레타 저택만큼 거대하게 지어놓은 그들의 별장에서 아이들을 뛰어놀게 하고 말이다.
아카데미에 마법과 마력에 대한 과목이 신설됨에 따라 마력을 가진 황태자 부부는 동부로 가는 길에 조금 수고스럽지만 늘 직접 방문하여 연구 성과를 보고받았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 알현 신청을 하고 싶지만, 휴가 중에는 절대 알현 신청을 받지 않으신다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해요.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지요, 흐흐.”
다프네는 친히 로열 아카데미 입구까지 배웅을 나온 노에비안을 보며 웃었다.
“로열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은 매번 황태자 전하를 뵙지요? 황손들께서도 함께 행차하셔서 아카데미 곳곳을 누비다 가신다던데, 어떤가요? 정말 귀여우시죠? 저희 신문사 앞 가판대에서는 신문보다 그분들의 초상화가 더 잘 팔린다더군요.”
“그럼, 이만.”
노에비안이 미련 없이 다프네와 멀어졌다. 멀찍이서 다음 달에도 직접 오겠다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로열 아카데미 후문에 위치한 미로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레티나! 같이 가!”
“나 잡아뱌, 데온!”
아이들이 있었다.
양 갈래로 땋아 동그랗게 말아올린 금발이 녹음 사이로 찬란하게 부서졌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노에비안은 얼른 사라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퍽!
그리고 아이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노에비안은 처참하게 넘어지기 직전인 아이를 붙잡기 위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이는 누군가 그런 식으로 잡아주는 게 익숙한지 뿌리치지도 않고 부축을 받아들였다.
헥헥대며 쫓아오던 칼데이온이 멀리서 그 꼴을 보고 경악해 더 속도를 내서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노에비안의 품에 안긴 자그마한 아이의 붉은 석류알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순간. 노에비안은 이 아이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보았다.
아드리엔의 아이였다.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를 빤히 보았다.
아이가 낑낑대며 주워 건네는 가면을 보고서야, 그는 쓰고 있던 가면을 떨군 것도 모른 채 아이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어 있던 노에비안이 황급히 가면을 받아들어 썼다.
“교수님이에요?”
“……그래. 여기서 뛰면 안 된단다.”
당황스러움을 누른 목소리가 가면 안에서 흘러나왔다.
가면을 다 썼음에도, 그 안에 있는 짙푸른 눈동자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목격한 레티나가 가면 안의 얼굴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당장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속박된 듯 아이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신 눈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만약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난 당신 눈을 닮았으면 해.’
눈이 영락없는 아드리엔이었다. 길게 늘어지는 황금빛 속눈썹도.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간 커다란 눈망울도.
“저도 2년 후에 여기 입학해요! 미리 인사드릴게요! 레티나 헬레네 코즈마 드 론타예요. 레티나는 할머니의 이름이고요. 헬레네는 외할머니의 이름이에요.”
조막만 한 아이는 치맛자락을 들고 예를 갖추는 듯하다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노에비안의 품에 덥석 안기며 응석을 부리듯 비비적거렸다.
“레티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리 덥석 안기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랬잖아!”
“데온! 이리 와서 인사해! 여기 교수님이야! 우리가 2년 뒤에 만날 교수님!”
단순한 레티나보다 경계심이 가득한 칼데이온이 다가오자 노에비안은 이제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야 할 때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게 안긴 이 자그마한 아이를 거부할 순 없었다.
“……네 어머니의 눈과 닮았구나.”
“어머니를 알아요?”
내뱉자마자 후회한 말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예쁘장한 얼굴 가득 의문이 두둥실 떠오르며 노에비안의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저는 아버지랑 같은 빨갛고 예쁜! 사과 같은 눈동자인데요?”
“그래, 하지만 눈매가 닮았다. 색깔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레티나는 일말의 경계도 없이 노에비안의 눈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저는 색깔도 중요해요. 가면 속 교수님 눈, 예쁜 색이었어요! 에페로 삼촌과 똑같아.”
가면을 벗기고 싶어 죽겠다는 눈을 한 레티나가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듯 옅은 눈썹을 모았다. 그 모습마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짙은…….”
가면 때문에 색이 변한 잿빛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열심히 움직이던 붉은 시선이 표현할 단어를 찾아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대번에 밝아졌다.
“눈이 바다 같아요!”
“!”
“깊은 밤바다 같아.”
칼데이온이 씩씩대며 코앞까지 왔는데도, 노에비안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레티나, 내려와! 얼른!”
칼데이온은 어느새 낯선 교수에게 안겨 훌쩍 위로 올라간 레티나에게 간절히 두 팔을 뻗었다. 여기서 노에비안이 던지면 자신이 안아 들기라도 하겠다는 양 말이다.
노에비안이 한참 숨만 쉬며 제게 가까이 온 아이들을 차례로 보았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론타의 귀한 황손들은 제 아비와 어미의 아름다운 부분들을 반반씩 닮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보다 노에비안의 시선을 잡아끈 건.
그늘이 질 만큼 촘촘한 속눈썹 아래 그를 보며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늘 그의 가슴을 저몄던 아드리엔의 청명한 연녹빛 눈동자 같은 것들이었다.
“이게 누나한테 왜 이래라저래라야?”
레티나가 노에비안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칼데이온과 티격태격하더니 점점 멀어졌다.
노에비안은 자신을 떠나가는 아이들을 못 박은 듯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인사도 없이 사라질 것 같던 레티나가 그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작고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손이 꽃잎처럼 팔랑거렸다.
그를 경계하며 레티나를 잡아끌던 칼데이온마저 다소 부루퉁한 입을 하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팩 돌린 밝은 금발 아래 귀엽게 삐죽 솟은 귀가 달아오른 걸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정원을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레티나를 보며, 노에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따라 흔들었다.
미로 정원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잠깐 봄이 찾아왔다가 속았다는 듯 불어오는 꽃샘추위의 바람처럼.
따뜻했던 바람은 다시 황량한 공기가 되어 홀로 서 있는 노에비안을 감쌌다.
아이들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가면으로 감춘 자신의 두 뺨이 참혹할 만큼 흥건히 젖어 있다는 사실을.
정원을 빠져나온 레티나는 멀리서 흐느끼는 남자의 소리를 들은 것 같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