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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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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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외전 4.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
2022.12.21.
피레타에 마련한 별장은 황태자 부부에게 또 다른 집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로아드네스는 쌍둥이의 엘라콘어 선생님이었으며, 아드리엔은 쌍둥이만을 위한 과자점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피레타 저택만큼이나 거대한 별장의 방 하나에는 황태자 부부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어렸을 때 입었던 아카데미 교복들. 주고받았던 편지들. 서로가 서로에게 했던 선물 등이 장식장에 멋들어지게 전시되었다.
“이건 뭐예요?”
“처음 네 어머니와 아카데미에서 마주친 날. 네 어머니가 두고 간 깃펜.”
“이건요?”
“네 어머니가 몇 년 전 황궁에서 벗어두고 사라진 구두.”
“로안, 이건 왜 주워다 놨어?”
“벗어던진 걸 가져다주었더니 또 맨발이었잖아. 그러니 다시 찾아왔지.”
블리에와 몸이 바뀌고 처음 노에비안을 만나 테라스에서 울면서 입을 맞추었을 때.
그때 정신없이 나오느라 또 벗겨진 신발을 알고 보니 로아드네스가 가지고 있었다면 믿겠는가?
아드리엔은 참 다양하게도 집요한 남자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로아드네스는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끌어당겼다.
“나머지는 정리가 더 필요하겠군. 개인적인 물건들은 황궁 말고 이곳에 다 가져다 두기로 했지만 짐이 생각보다 많아졌어.”
“레티나가 도울래요!”
유리 장식장에 코를 박고 물건들을 들여다보던 레티나가 방방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인데 말괄량이 손에 들려줄 순 없지.”
로아드네스가 레티나를 번쩍 안아 들고 작은 손바닥에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레티나가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꺄르르 소리를 냈다.
로아드네스에게 안기려고 그 다리에 매달려 있던 칼데이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부지. 레티나가요-.”
“데온! 말하지 마!”
“어제 로열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덥석덥석 안겼어요!”
“교수님이야! 선생님이야! 레티나는 인사했어요!”
레티나가 금세 울상이 되어 변명했다. 로아드네스가 그런 레티나를 달래며 이름을 불렀다.
“레티나?”
“잘못했어요, 아부지.”
가뜩이나 빵빵한 볼이 불룩해지고 입이 댓 발 나왔다.
내리깐 속눈썹이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혼내려다가도 이런 표정을 하면 로아드네스는 금방 함락당하고 말았다.
혼낼 생각도 없었지만 로아드네스는 그 말랑한 볼에 입맞춤을 퍼붓기 시작했다.
“자, 오늘은 손님들이 잔뜩 오는 날이니까 흙 묻은 손을 닦고 손님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아드리엔은 뒤늦게 로아드네스에게 안겨 비비적거리는 칼데이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로아드네스에게서 떼어내자, 때마침 들어온 올리비아와 마지, 요나가 아이들을 데려갔다.
아이들이 씻는 걸 지켜보기 위해 뒤따르려던 아드리엔은 갑자기 허리를 감싸 안는 손길에 놀라 멈추어 섰다.
그리고 눈앞에서 묵직한 문이 쾅. 닫혔다.
“아드님 머리만 쓰다듬어 주실 겁니까, 비 전하?”
은근하고 낮은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린 아드리엔이 뒤돌았다.
동시에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놀라서 입을 열자마자 열기가 입안을 휘저었다. 아드리엔은 그 열기에 호응하다가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떼어냈다.
“은근히 질투한다니까, 아들한테까지.”
“가끔 레티나에게도 질투해. 여기 온 이후로 계속 널 뺏어가서 맛없는 차나 마시려는 할머니 윈스터 후작도.”
로아드네스가 빠져나갈 수도 없을 만큼 세게 끌어안고 아드리엔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따끈한 품에 녹아들어 기대 있기를 몇 분. 아드리엔이 뭔가 생각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 네게 줄 게 있어.”
품에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로아드네스를 질질 끌고 방의 구석으로 간 아드리엔은 황궁에서 도착한 짐 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상자 하나를 꺼냈다.
“손님맞이용 옷이야.”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약한 의문이 떠올랐다.
“옷을 선물한다고?”
옷이라면 계절별로, 색깔별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마담 르블레아 덕에 화려한 제복이 넘쳤다.
우뚝 서 있는 로아드네스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아드리엔이 그를 등지고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상자 안에서 옷 하나를 꺼내 팟! 하고 뒤돌았다.
아드리엔의 손에 들린 건 눈에 익은 정복 재킷이었다.
재킷 옷깃 위로 반달로 휘어진 아드리엔의 눈이 빼꼼 나왔다.
“기억 안 나?”
예전에 마차에서 실랑이하다 단추를 두 개나 뜯어먹은 그 재킷이었다.
그들이 연인 사이가 되기 전 결투를 하러 떠나는 기사처럼 맡겨둔 정복 재킷.
그것을 알아챈 로아드네스가 순간 아무 말 없이 바느질된 단추 두 개를 응시했다.
황실의 꽃인 장미 모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다른 금장 단추와는 달리 예쁜 동백꽃이 양각으로 새겨진 금장 단추가 달려 있었다.
“……네가 달았어?”
“응.”
결투를 앞둔 기사는 연인에게 재킷을 맡긴다.
그것을 받은 연인은 재킷 안쪽에 수를 놓거나 단추 하나를 바꿔 달고 다음에 만나면 그것을 돌려준다.
재킷을 맡기는 것도, 그렇게 돌려주는 것도 상대에게 구애하는 론타의 전통 방식이었다.
“수를 놓거나 바느질하는 건 내 특기가 아니라 좀 걸렸어.”
아드리엔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로아드네스는 건너 건너 들었던 그 상황이 제게 찾아온 게 믿기지 않는지 한참 그것을 보기만 했다.
“로안?”
“전생이 있다면 난 아마 나라를 구했겠지. 초대 황제 칼데이온이었거나.”
로아드네스가 재킷을 든 아드리엔을 통째로 끌어안고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몸짓이었다.
“로안! 놔 줘!”
“사랑한다는 말 말고는 다 금지야.”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앞은 그의 몸에, 등은 벽에 갇힌 채로.
아드리엔은 오븐에 넣어둔 쿠키가 완전히 구워질 때까지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레티나!”
“데온, 너 아부지한테 일렀지! 나!”
“레티나가 잘못했잖아! 그건 혼나야 하는 거야!”
“네가 잘못했어! 넌 날 위험에 빠트렸어!”
나란히 씻고 나온 쌍둥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시 투닥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레티나를 이길 수 없는 칼데이온은 제 누나와 함께 부모님과 머물렀던 추억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하녀들에게 물으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갑자기 침실에 쉬러 가셨다고 했다.
대낮에 왜 침실에서 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했다.
밖에서 누가 올까 봐 망을 보던 칼데이온은 짐을 뒤적이는 레티나를 재촉했다.
“레티나! 빨리! 뭘 찾는데 그래?”
“찾아따!”
레티나가 결국 원하던 걸 찾아냈다.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드문드문 쓰던 일기장이었다.
꽁꽁 감춰둔 걸 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기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자그마한 손이 야무지게 책을 들어 올리곤 방방 뛰었다. 칼데이온이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헤헤-.”
레티나가 책을 활짝 펼쳐보았다.
“엑!”
“왜 그래?”
“엘라콘어야!”
레티나는 엘라콘어에 제일 자신이 없었다.
칼데이온은 바깥에 기울이던 귀를 떼고 성큼 다가왔다.
로아드네스가 직접 쌍둥이에게 가르치고 있는 엘라콘어는 칼데이온의 특기였다.
칼데이온의 연녹빛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해석해보자!”
***
블리에는 달콤한 과자 냄새가 진동을 하는 정원에 들어섰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정원 한가운데에 매년 그랬듯 손님맞이를 위한 거대한 티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멀찍이서 짐을 들고 뒤따르는 남자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피레타에서 아주 자리를 잡을 생각인지 나갈 생각을 않는 객식구들이었다.
처음엔 에페로가 투덜거렸고, 다음엔 빅토르가 받아쳤으며 말없이 둘 중 한 명을 마법으로 넘어뜨리고 모른 체하는 롯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블리에는 애써 남자들의 목소리를 모른 척했다.
아직 주인들이 나와 있지 않은 걸 보니 또 둘이서 부둥켜안고 뒹굴고 있는 모양이지.
블리에는 매년 있는 이 행사에 익숙해져서 심드렁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소담하게 깎아놓은 근처 수풀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뿐만 아니라 코완의 두툼한 황금색 꼬리가 그 수풀 아래에서 살랑대고 있는 게 아닌가?
블리에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저런 귀여운 움직임의 중심에는 항상 그녀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잘난 척하더니! 이리 줘!”
“심정을 서술하시오? 이건 시험 문제에 자주 나오는 거야!”
“앞에는 뭐라고 적혀 있는데?”
하나는 꿀처럼 진한 금발. 하나는 햇살을 머금은 레몬처럼 산뜻한 백금발. 또 그 곁에 있는 한 마리는 다소 누런 금색 머리통.
쌍둥이와 코완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무언가를 해석하고 있었다.
곧,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블리에의 그림자가 그 위를 드리웠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칼데이온이 문장 하나를 해석했다.
“남편의 정부……로 환생해버린 심정을 서술하시오……. 10점? 이거 문제였나 봐!”
“정부가 뭔데? 어?”
하얀 손이 아이들 사이로 불쑥 들어와 일기장을 낚아챘다.
아드리엔이 엘라콘어로 꾹꾹 눌러썼던 한 맺힌 일기장이 블리에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모님!”
“이모!”
“요 녀석들 몰래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일기장을 되찾기 위해 쌍둥이들이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블리에!”
그리고 동시에 정원으로 들어서던 아드리엔이 그들을 발견했다.
쌍둥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두 손 가득 김이 폴폴 나는 과자 바구니를 든 채로 들어왔던 아드리엔이 바구니를 급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블리에의 손에 들린 물건을 알아본 아드리엔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모! 정부가 뭐야?”
“이거 답이 뭐예요?”
쌍둥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기장을 빼앗기 전에 뭐라도 알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모! 정부가 뭔데요? 이거 답이 뭔데?”
블리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빠르게 일기를 살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달려오는 아드리엔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하는 내 조카들아.”
심술 빼면 시체인 그녀의 붉은 입술이 꿈틀대며 벌어졌다.
“누가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말해보라고 하면 말이다.”
“우웅?”
“그 기분 참 엿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렴.”
“우에엥?”
레티나가 맛없는 피망을 씹은 표정으로 이모를 올려다보았다.
“더 나아가서는 심정이고 뭐고 아주 x 같다고까지…….”
“블리에!”
언니한테 소리 지르는 본새 좀 보라지.
중얼대던 블리에가 달려오는 아드리엔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도대체 애들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 말도, 그렇지?”
블리에가 쌍둥이에게 윙크하고는 아드리엔을 달랑 들어 끌어안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쌍둥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이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밌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어느새 어머니의 일기장을 훔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쌍둥이가 코완을 앞세우고 그들에게 줄 선물을 한가득 들고 오는 손님들에게 뛰어갔다.
“왈! 왈!”
티테이블에 반가운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고 있었다.
비앙카와 그레고리 부부가 가장 먼저 쌍둥이를 안아들었다.
뒤이어 손님방에서 머물며 일하던 마담 르블레아는 물론이고 노우라 주세타와 그녀의 남편이 그들을 에워싸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별장을 구경하던 아카시아 백작과 이번에 결혼을 앞둔 아이린까지 요나와 마지의 안내를 받아 정원에 나왔다.
빈센토와 닐, 그리고 그들이 모시고 등장한 윈스터 후작까지 합세하자 정원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여전히 블리에에게 안겨서 잔소리를 하는 아드리엔을 로아드네스가 빼앗아와 품에 가두어 안았다.
매년 찾아오는 피레타의 따뜻한 봄날.
둘러앉은 사람들 주위로 달콤한 쿠키 냄새가 진동했다.
뒤늦게 블리에의 남자들이 하나같이 투덜대며 등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아름다운 화음처럼 들렸다.
화창한, 아주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