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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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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 유학생활 2년차의 나는 쌓여져가는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아파져 오는걸 느꼈다.
황금 같은 1학년을 보내고 본격적인 부 활동과 학교활동이 이루어지는 2년차에 닥친 코로나로 인한 학과 특수성으로 인한 한 학기의 휴학?
1학년 때 많은 친구들을 사귀어두고 마스크를 쓰고 만날 사람 만나가면서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다.
대책 없는 국교 단절로 인한 귀국금지?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와 바다건너 도망쳐 나온 나는 딱히 집이 그립지는 않았다.
코로나 우울증?
외향적인 성격이라 사람 만나는 게 줄어들자 우울해졌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운동을 나간다던가, 미뤄둔 영어 공부를 한다던가, 정 심심하면 유일한 취미인 협곡에서 스트레스를 발산했다.
오히려 학교 공부와 사회생활로 인해 평소에는 잘못하던 요리나 베이킹 같은 취미들을 하나하나 실현해가면서 나름 충실하게 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쿵!
옆방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샷건소리에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찼다.
“아니 너희들은 유리아에게 왜 그러는 건데!! 왜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사이타마라는 지역상, 인구밀도가 그렇게 높지 않는 이 도시에 울려 퍼지는 샤우팅은 훌륭한 방음 소재로 지어진 신축 건물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피해가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방 사이에는 방음소재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대충 흘러내리는 머리를 머리끈으로 묶은 나는 비장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수면양말을 질질 끌며 룸메이트의 방앞에 선 나는 처음에는 점잖게 노크했다. 하지만 방안의 난동소리가 점점 커지자 종래에는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겼다.
“쿠로가와씨? 쿠로가와씨. 쿠로가와씨! 잠시 나와 보세요, 저희 얘기 좀 해요.”
그렇게 문을 두들기를 어언 1분, 안에서는 어쩌지? 잠시만 기다려 봐…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 열리며 민폐스러운 이웃이 모습을 드러냈다.
170센티가 넘어가는 나의 가슴팍에 미치는 150센티의 자그마한 일본 여성이 그 작은 얼굴을 내밀었다.
이곳에 이사를 온 지 어언 다섯 달이 넘었지만, 그동안 모습을 마주친 적이 극히 드문, 몹시 낯선 룸메이트를 보며 나는 아직은 유창하지 못한 일본어로 불평했다.
“쿠로가와씨? 지금 새벽이 두 시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시는 건가요? 이웃에게 대한 배려라는 게 도대체…!”
화난 목소리로 툭 쏘아 붙이기를 몇 마디, 방문이 열리며 뛰쳐나온 그녀는 이윽고 무릎과 팔꿈치, 머리를 땅바닥에 세게 박았다.
그것은 일본에서 극한의 사죄를 보이는 그림 같은 도게자였다.
티비에서나 보던 그 깔끔한 동작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폐 끼치는 이웃이라 미안 합니다 미안 합니다.”
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웃과의 드라마틱한 갈등을 꿈꾼적은 없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들어가길 몇 마디가 되었다고 이런 자세인가?
일본인들과 어울린 지 일 년이 넘어 대충 타테마에나 혼네같은 특성은 이해했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쉽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건 또 처음 본다.
아니 자기 과오를 인정을 해도 낯선 사이에 도게자를 박는 건 지나친 과례다.
“하지만 유…나씨? 전 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고 무엇보다도 전 이 시간대가 아니면 안 되기도 해요 그리고 부탁하건데 이야기를 꼭 부디 들어 주세요. 저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진심으로 당황한 듯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 설득력보다 연민이 찐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일단… 전 그렇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에요, 일단 아래에 가서 이야기해보죠.”
“감사합니다, 이런 부족한 몸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비굴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기를 숙이는 쿠로가와씨의 언행은 나름 다양한 사람을 만난 삶을 살고 있는 나조차도 만나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리고 병약해 보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뭐라 쏘아붙일 맘이 사라진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넣으며 말했다.
“녹차가 좋으세요? 우롱차? 현미차도 있어요.”
“네… 네? 저, 저에게 차를 타주신... 다구요…?”
이게 사람인지 놀란 토끼인지 모를 정도로 놀라는 쿠로가와씨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코코아를 타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려 보이니 단거 좋아 하겠지 따위의 이유였다.
그리고 정말 간만에 내 이웃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작고 여린 여성이었다. 제아무리 일본여성의 평균 신장이 조금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너무할 정도로 작았다.
기쁜 듯이 머그컵에 담긴 코코아를 호로록 하는 그녀의 얼굴은 커다란 머그컵에 반절이상 사라질 정도로 작았으며, 머리카락은 상당히 길었다.
다만 관리하지 않아 푸석푸석해 보이고 다듬어지지 않는 머리칼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앙상하게 마른 몸과 늘어진 잠옷은 그녀를 병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듯한 떨고 있는 아기 동물
딱 그런 인상이다.
그런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지 마시던 코코아를 내려 둔 쿠로가와씨는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양손을 제 가슴 앞에 모으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 쿠로가와씨, 제가 평소에는 일찍 자고 잠귀가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이 시간에 이렇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반복되게 사죄하는 그 말에는 진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일단 사과를 듣기 위해서 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이 시간대에 큰 소리를 내시면…”
“하…하지만…. 전… 전…”
“네 말씀하세요.”
우물쭈물 하던 그녀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일단 내일 이야기할게요. 제가 지금 중요한 일하다가 와서 길게 말씀을 못 나누겠어요.”
그 말을 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용기를 낸 듯,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또박 또박 말하는 그녀를 보니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인기피증 따위의 정신질환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내 이웃은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수면을 방해받은 분노는 이미 사라졌고,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가 없는 나는 내일을 기약하고 그녀를 올려 보냈다.
“네… 내일 이야기해요. 그럼 들어가 보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아 밤에 늦게까지 활동하면 피부 망가지는데
나는 구글에 ‘이웃과 갈등 사례일본편’ ‘유학생입니다. 이웃이 시끄러운데 어떻게 해야 하죠?’ 따위의 글들을 검색하면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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