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51화.
* * *
오늘도 책상 옆의 자명종 시계를 때리면서 일어났다.
여러 업무와 학업이 겹치면서 수면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침 양치를 하면서 유리아 언니의 키리누커 친구들이 만든 따끈따끈한 영상을 놓치는 건 있을 수 없지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찾았지만…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어라?
내 휴대폰이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항상 모니터 옆에 두던 아이패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거실에 두었나?
이상함을 느낀 나는 하는 수 없이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회사에서 준 이 고사양 업무 방송용 컴퓨터라 쓰고 게이밍 컴퓨터라고 읽는 이 컴퓨터는 내 개조를 통해서 수냉쿨러와 화려한 조명과 투명하고 우람한 거대한 케이스 속에 유리아 언니의 피규어를 넣어둔 내 걸작인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본체를 조사해보니 컴퓨터의 본체와 파워를 연결하는 선이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심각함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열고 나오려고 했다.
철그럭
내 발에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느 사이엔가 채워진 수갑이 철그럭 소리를 내면서 흉흉한 사슬이 나와 침대를 이었다.
“어?”
“유나야 일어났니?”
방문이 열리면서 나에 언니의 얼굴이 보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내가 전에 사준 ‘로고가 크게 보이는 게 싫어’라는 미니멀리즘적인 패션을 좋아하게 된 나에 언니에게 알맞은 하얀 원피스에…
피가 묻어있다.
“어, 언니?”
“아, 미안미안, 아무래도 자꾸 유나의 곁을 얼쩡거리는 아기 돼지들을 잡고 오는데 씻고 오지 않았어… 어떻게 하지? 날 야만스러운 여자로 보면 싫은데…”
야만스럽고 그 이전이 아니라
아까부터 묘하게 사이코패스 코모레비의 연기 톤으로 빠르게 독백하는 그 어조가 무섭다.
약간 나에 언니의 몸에 들어온 츠유를 보는 기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언니 그… 칼은?”
“앗, 어머나, 유나가 자주 쓰던 식칼인데… 못 쓰게 만들어버렸네…?”
쾅
나는 언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무, 무슨 일이지?
꿈
그래 꿈일 거야
그 착한 언니가 그럴 리 없어.
콰지직
“꺄아아악!”
제아무리 담대한 나라도 문을 찢고 들어온 피 묻은 식칼을 보면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다!
뭐야 이거!
“유나야, 유나야, 나의 천사, 나의 구원자, 나의 파멸자, 나의 안식처 유나야 유나야…”
이해할 수 없는 괴력으로 나무문을 찢고 언니가 들어온다.
자신의 팔에 박힌 나무조각이 아프지 않은 듯, 흐흐 웃으면서 다가오는 언니는 공포 그 자체였다.
“자꾸만 다른 여자들 꼬시려고 하는 고약한 우리 유나,
자꾸만 담당인 언니를 보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돌리는 나쁜 유나,
자꾸만 언니의 진심을 알아보지 않는 잔인한 유나에게…
벌이 필요할 거 같아.”
“언니, 지,지, 진정해요. 이, 이건 꿈이에요 분명히.”
“꿈?”
언니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유나야, 이건 꿈이 아니란다?”
이성이 사라진
동공이 탁해진 눈으로 나에게 걸어온다.
나는 도망치려고 하지만 발에 묶인 사슬이 움직임을 자꾸 방해한다.
언니의 칼이 아른거린다.
나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유, 유나야?”
차분해지는 차분한 방 색깔
묘한 의약품 냄새
나름 비싼 일인실이라는 걸 자랑하는 듯 부담스럽지 않게 장식된 방 배경
푹신한 침대와 비어있는 약통
“괜찮니? 물 좀 더 가져다줄까?”
옆에 놓인 물을 단숨에 비운 나를 보며, 얌전히 책을 읽던 언니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보기만 해도 차분해지는 차분한 크림 색깔의 라운지 웨어와 어울리는 베이지색 숄을 걸친 언니가 그렇게 물었다.
전에는 칙칙한 검은색만 입던 언니가, 이제는 잡지 속 모델처럼 이쁘게 차려입은 걸 보니 정말 천사 같다는 이미지가 든다.
나를 걱정해주는 저런 천사 같은 사람이, 꿈에서 그럴 리 없다.
“네, 부탁드려요.”
입원한 환자치고 몸이 건강한 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병문안 와준 사람이 있는데 내가 내 발로 물을 마시러 가는 건 뭔가 그녀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어지간하면 병문안을 온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녀들에게 응석을 부리게 된 나였다.
아무튼
악몽을 꾸다가 일어난 내가 흥분한것처럼 보였는지
언니는 냉수와 더불어 박하사탕을 가져다주었다.
역시 나에 언니는 천사야…
“고마워요. 언니.”
“아냐, 유나도 얼른 검사 마치고 돌아가자.”
입원한 지 5일 차, 나는 정밀 검사를 위해서 식사를 제한받거나, 이상한 약을 복용하는 등 듣기만 해도 입이 벌어지는 검사를 하고 있다.
솔직히 이런 거는 드라마 속 재벌 속 회장님이나 하는 거 아냐? 젊고 예쁘고 건강한(비록 과로로 쓰러지긴했지만!) 내가 하는 건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내 투정을 어린애 투정마냥 부정한 언니와 코이즈미씨는적극적으로 조사를 받게 했다.
이 정도 해줄 테니 쓰러지지 마라?
죽도록 일해라?
그런 건가?
그런 의혹을 숨긴 나는 일단 공짜라고 하니까 끔찍한 검사를 받고 있다.
내일까지 검사라니… 괴롭다.
소주에 삼겹살 먹고 싶어…
“힘들어도 조금 참아 유나야, 퇴원하면 언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녀의 자그만 손이 땀에 젖은 내 뺨을 쓰다듬어준다.
그 자그만 동작과 배려만으로도, 마음이 안정을 되찾는다.
언니 손은 약손인가?
사실 그녀는 피폐해진 현대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내려온 천사 비스무리한 존재가 아닐까?
내 삶은 사실 악마의 계략에 당해서 봉인된 천사를 다시 깨우는 거룩한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병원 생활을 하면서 느는 것이라고는 망상밖에 없는 내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상큼한 포도향과 단내나는 월하향이 섞인 손수건으로 내 뺨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체향이, 향기가 나를 진정시켜준다.
“언니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 예쁘고 천사 같은 그녀가
방송에 스위치만 들어가면 락커들 뺨치는 우렁찬 함성과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집착 얀데레 살인마 연기를 하다니
정말이지 방송 세계는 신기하다.
방송, 방송이라
그러고 보니 언니의 방송 방식은 조금 달라졌다.
캐릭터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방송 진행 방식에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입원한 동안, 언니는 스스로룰 바꾸기를 결심한 듯
예전과 달리
내 기획 없이 자기 스스로도 외부 합동 방송을 나간다거나
동기끼리 식사 자리를 가지는 등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그녀는 혼자서 일을 계획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듯 말이다.
“유나 너, 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
“네? 응? 아니요.”
“흐으응.”
마치 내가 이번에는 봐준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 그녀가 입을 꼭 다문다.
이전에 보이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경직밖에 없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제법 다채롭고요망하다고 할 수 있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신비하고 복잡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이 부분은 언니가 팔로 가리고 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책을 슬그머니 가방에 넣는 걸 보았다.
요즘에는 만화나 애니 말고도 다양한 책을 읽는구나
언니 바로 그거야
주류 문학들도 다른 틀에서 보면 하나의 메이저 연성이라고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도 하는지 모르는 채, 언니는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자, 이거.”
내가 사랑하는 허브로 양념 된 닭가슴살과 파프리카가 듬뿍 들어간 호밀 샌드위치다.
이건… 나에게 하는 고백인가?
“무, 물론 오늘 장내 검사를 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쓰읍… 먹는 게 자유가 된 건…”
고소하고도 시큼한 향이 나는
고기향을 듬뿍 머금은 마요네즈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내가 좋아하는 식자재의 조합을 본 나는
언니가 장난스럽게 흔드는 샌드위치에 자꾸만 고개가 따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언니의 손짓 따라 움직이는 내가 웃겼는지 언니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내가 추한 행동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서야 대형견 같잖아 나
“푸훗, 그래도 이건 유나가 말한 대로 건강함을 가득 담은 샌드위치니까.”
“그, 그렇죠?”
“일단 흐르는 침이나 닦고 말해.”
그러고는 그녀는 길고 굵으면서, 검은 빵과 알록달록한 재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내 입으로 물렸다.
간만에 먹는 짭조름한 소스 맛과 고소한 닭가슴살 그리고 매운맛의 향수를 덜어주는 파프리카의 매운맛에 눈물이 난다.
“어때, 맛있지?”
“멤(네)!”
“후후, 언니도 이제 칼을 덜 쓰는 요리라면 할 수 있게 되었다구.”
그렇게 언니의 자신만만한 말과 함께, 병원 내에서 은밀한 식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언니?
언니가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샌드위치는 나 혼자서도 먹을 수 있는데…
무슨 양 팔을 다친 사람의 식사를 도와주는 듯
양손으로 20센티 남짓한 샌드위치를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꾹 잡아준다.
뭐, 뭐지?
언니는 도대체 뭘 원하는거지?
언니는 당황스러워 하며 샌드위치를 입에 물린 나를 살펴보면서
숨이 켁켁 막히려고 하면 힘을 풀어주고, 적당히 씹었다 싶으면 목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 덕분에 소스나 재료를 흘리는 일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음식을 떠먹여져 본적이 적은 나는 저도모르게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언니 또한 마찬가지였을까?
식사를 마친 우리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솔직히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밍밍하고 간이 안된 병원 식사 사이로 들어온 샌드위치는 마약 그 자체였다.
흡연을 하는 범죄자가 출소 후 첫 담배를 땡기는게 그렇게 행복하다던데
나는 그 경험을 간접으로 느낄 수 있었던것 같았다.
배덕을 저지르면서도 몸은 욕망에 솔직한 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저, 저기 언니 손은 제가 닦을게요.”
“응? 아냐 유나 맛이 묻어나와서 맛있어.”
끈적한 하얀 마요네즈와 닭가슴살에서 나온 육즙이 언니 손에 묻은 걸 닦아주려고 하니, 언니가 입으로 자신의 손을 쪽쪽 빨아먹는다.
“윽, 깔끔하게 먹지 못해서 죄송해요.”
“응? 아냐 아냐, 이런 것도 신선한 경험인걸?”
자신의 손가락을 입 안에 넣어 웃으면서 빨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본 나는 저도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여러번 말하지만, 요즘 들어서 부쩍 성숙해진 나의 언니였다.
드디어 자신의 매력을 깨달은 듯, 점점 자신을 이쁘게 가꾸는 재미를 알아가는 듯
화장에도 취미를 들었는지 기본적인 로션을 바르기 시작한 언니는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아름다움이 묻어 나왔다.
마치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중학생 여성들이 으레 그러하듯 조심스럽게 치장에 손대는 언니에게는 풋풋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고
나에 언니는 마치 그것을 기다렸는 듯, 내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뭐, 뭐지?
마치 훈련받은 강아지에게 손을 내밀면 발을 올리는듯한 자연스러움인데 이거?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유나의 손길이 제일 좋아.”
“어, 그래요?”
“응! 그저께 비싼 미용실에 갔는데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어, 설마 거기요?”
“응 거기.”
이전에 마녀씨와 대화한 적이 있는, 머리카락이 긴 그녀가 간다는 미용실에 대해서 들었다.
거기 엄청 비싼 데던데…
“그런데 머리는 참 예쁘게 스타일링 되었는걸요?”
아주 용기를 내서 우주 같던 예쁜 검은 머리카락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밝은 갈색빛 부분 염색이 되어있다.
마치 은하수에 수놓아진 유성처럼 검고 긴 머리카락에 그려진 그 염색은 생애 첫 염색인 언니의 첫 도전일 것이다.
너무나도 사소하고 작지만 그래도 그녀의 용기 있는 한 걸음이 참 대견했다.
“그, 그래?”
“네, 객관적으로도요. 감성적으로도요.”
“음, 유나의 눈에 이쁜 거니까 정말 예쁜 거구나. 헤헤.”
염색은 가장 기본적인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라 믿고 있는 나는
나에 언니처럼 머리 가긴 예쁜 여성은 염색을 하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맞아요. 우리 나에 언니는 정말 예뻐요.”
“히히.”
나에 언니에게 방송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면 또 일 이야기를 한다며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근래 들어서 요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언니에게 펜으로 그림을 그려주면서 요리하는 과정을 설명한다거나, 맛집의 감칠맛의 비결 중 다수는 MSG에 있다거나, 일본인들은 마늘을 너무 적게 먹는다고 불평한다거나 하는 이야기 등으로 말이다.
예전이라면 방송을 킨 상태거나 만화나 게임,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만 흥미를 보이던 나에 언니가 이제는 일상적인 화제로도 다양한 반응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을 깨달은 어린 소녀가 여성으로서 성장하듯
그녀의 세계가 넓어지고
나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인연을 맺고 끊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운명의 짝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사랑스러운 언니의 앞날을
그녀의 축복받을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유나 무슨 생각해?”
“글쎄요, 행복한 생각이요?”
“헤헤 나돈대.”
우리는 면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길다고 느낀 병원 생활 중, 유일하게 짧다고 느낀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