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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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에서 이 년 가까이 살아가면서 놀란 점을 꼽자면
하나는 금요일 오후 5시에 은행에 송금을 하면 다음 주 월요일 오전 9시 은행 업무 개시 시간에 송금을 처리하는 일본의 놀라운 은행 처리능력이나
간단한 증명서를 발급 받기 위해서 무려 직접 버스를 타고 15분 걸리는 시청(市??)에 가서 3분만에 끝나는 업무를 위해 30분 이상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점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는 QR을 활용한 동선자 체크 서비스나, 카드 사용 내역으로 확진자를 추적하는 방면, 코로나로 문제를 앓고있는 해외에서 들어온 입국자들의 동선도 놓치는 굉장한 일본의 행정들이 있지만...
그래도 10월 중순부터 이어지는 할로윈 축제 분위기와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일본은 축제의 민족이라고 묘사하는 여러 매체가 있는데, 정말 그에 걸맞게 일본에는 축제 하나 만큼은 정말 진심이다.
물론 한국 또한 크리스마스에는 진심인 분위기이긴 한데, 여기는 뭐라고 해야하나...
“할로윈? 그 때에는 잭 오 랜턴을 만들면서 노는 게 당연하잖아?”
“이참에 우리끼리라도 코스프레 파티를 해볼래? 믿고 맡길만한 샵에 주문하려면 내일 까지가 적기야!”
“아, 안 그래도 가볍게 즐길려고 어떻게 구성해야하나 고민중이었어, 유나야 좀 도와줘라.”
뭐라고 해야할까나
나에 언니, 타마, 마미 선배 세 사람이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하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특히 앞의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에 혼자 보내는 게 익숙한 아싸들인데 이 두 사람은 할로윈에 놀랍도록 진심이다.
그도 그럴게...
“짜잔~ 이게 내 코스프레 콜렉션이야!”
“... 이게 취미 맞죠?”
“응! 얘는 뱅드림이라는 게임에 나오는 히카와 사요라는... 아, 유나는 잘 모르겠구나. 뱅드림이 뭐냐면...”
도쿄 교외지역에 있는 두 자매의 집은
무려 옷을 원상태로 보관해주는 고급 디지털 옷장 두 개에는 코스프레 옷들이 가득했고, 분장실에는 시대를 주름잡은 캐릭터들의 가발이 널린 이 곳은 진짜 오타쿠의 집이었다.
아직 덕력이 부족해서, 옷 만으로는 캐릭터를 알아보지 못한 나를 위해 타마는 하나 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역시 게임을 좋아하는 오타쿠 답게
애니메이션 캐릭터 보다는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옷들이 훨씬 많았다.
캐릭터의 성우의 역력을 읊는 그녀의 옆에 선 나에 언니는 그녀의 컬렉션을 헤집다가 한 옷을 들고 말했다.
“꺄아악, 이거 키아나 옷 아니야? 설마 타마쨩도?”
“유리아도 설마?”
서로 하던 게임을 알아 봐서 그런지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껴안았다.
뭐라고 해야할까나
언니의 저런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게 얼마만이지...
생각 외로 언니가 나 의외의 사람에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라는걸 깨달으니 시원섭섭했다.
중국에서 만든 게임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이야기를 하는 그녀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소외감을 느낀다.
“유나야?”
“아, 네 마미 선배.”
“이렇게 된 이상 클레도 부르는 게 어떨까? 아무리 고3이라고 해도 모두가 노는데 혼자만 공부 하는거 너무 좀... 그렇지 않을까? 아. 물론 나같은 고졸의 말은...”
“아, 아니에요. 안 그래도 언제 미우를 부를 까 고민했거든요.”
“아, 미우라고 하는구나...”
“네, 사케이 미우라는 아이에요. 요즘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거 같아서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을 했는데... 일본의 할로윈 분위기는 장난 아니네요.”
“어... 한국은 조금 다른가 봐?”
“네... 한국은 어떻냐면요...”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든 언니들이 서로의 덕질을 하는 동안 두 동생들은 잠시 할로윈에 대한 인식 차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파티의 예산과 구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수입이라면 어디가서 문제 되지 않는 네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보낼것인가, 가 주된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게...
“와... 가치코이(버튜버에게 진심으로 된 사랑을 느끼는 행위, 또는 사람) 정말 무섭네요.”
“그런 면에서 크리스마스 혼방 확률 100%를 자랑하는 우리 언니는 단 한번도 불타오른 적이 없지.”
“으으, 그건 그래도 기분 나쁘긴 하네요.”
마미 선배의 놀라운 이야기 중에는
크리스마스에 방송을 하지 않는 멤버들의 리스트, 더 나아가선 할로윈 저녁에 방송을 하지 않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오프라인에서 연애를 할 것이라고 추정이 되는 사람들의 버튜버의 리스트가 공유 된다는 오타쿠 커뮤니티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쓸데없는 논란을 만드는 게 싫으니 일단 할로윈 방송을 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데.”
“저 두 사람 안 그래도 공포 게임으로 친해졌으니 제가 끝내주는 공포 게임 또 알아볼까요?”
“그러면 언니 진짜 나 미워할걸?”
“그러게요, 그러면 뭘 하지...”
사람 다섯이 모이면 롤을 가는게 한국의 암묵적인 룰이지만
일본은 약간 애매했다.
뭘 해야 좋을까
“뭘 고민해? 노래 불러야지 우리 유나.”
마치 닌자처럼 나의 뒤를 다가온 나에 언니가 쇼파에 앉아있는 내 어깨 위로 얼굴을 올리면서 말했다.
“회사 내에서 재미있는 소문이 퍼졌더라 유나야?”
평소의 조용한 아가씨같은 모드의 나에 언니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화가 난듯한 나에 언니가 내 볼을 쿡 찌르면서 말했다.
“으음, 그 그게 말이죠...”
“난 또 한국인인 유나가 일본 노래를 잘 몰라서 단 한번도 언니랑 같이 노래방 가자고 권유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화를 낸 다음에 침울한 톤으로 돌입
그야말로 시청자들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언니의 완벽한 설계에 당한 나는 ‘으윽’같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한국과 일본의 가라오케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조금 다른편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거 인과응보야 후배야’ 라고 보는듯한 마미 선배의 한심한 눈초리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래 부르지 말 걸
“너 방금 노래 부르지 말 걸? 같은 생각 했지 유나야?”
...
내가 이렇게 표정이 잘 읽히는 사람이었나?
“내, 내가... 내가 그렇게... 싫어? 언니랑 같이 노래 부르는 게...”
화를 낸 다음 침울한 톤으로 돌입, 이후 울먹이는 3단 연계에 혼이 나간 나는
언니와 함께 노래 부르겠다는 약속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나왔다.
작은 악마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언니를 보며 나는 허탈했다.
옛날에는 언니의 장난이 연기처럼 느껴지긴 했는데, 요즘엔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점점 더 예뻐지고 점점 더 자신의 매력을 잘 살리는 언니는 참으로 요망했다.
언니가 내 얼굴을 마음대로 만지작 거리는 걸 내버려 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초기의 그 귀여운 언니 돌려줘...’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본 마미 선배는 마트에서 가져 온 세일 전단지를 나에게 넘기면서 힘내라고 말했다.
...
나 여기서 내가 제일 약한 거 아닐까
요즘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
“그래서 10월 31일에 파티를 하자고요?”
“응.”
“거기에 방송 장비까지 곁들여서 클레, 유리아, 타마, 메이드까지 합쳐서 4인 노래 방송이요?”
“그 전에는 코스프레 파티를 해서 논 다음이래... 옷들은 그쪽에서 준비해준다고 하니 노트북만 들고오면 될 거 같아.”
“우와아아, 언니 최고!”
공부를 끝내고 온 미우에게 파티 소식을 전했다.
그녀 또한 저번 노래 방송 이후로는 딱히 스트레스를 풀 만한 이벤트가 없었기에 크게 반겼고
노래 방송 직후 친 시험 결과 또한 좋게 나와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뭐 한국의 수능은 11월이지만 일본은 1월이니 괜찮겠지?
“근데 유나 언니 괜찮아요? 나에 언니 조금 화난 거 같은 데...”
“아무래도 내가 언니의 매니저인데 내가 언니가 아니라 너랑 같이 불러서 화 난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너도 조심할걸?”
“으으, 화난 나에 언니 무서운데.”
“처신 잘 하는 수 밖에.”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뭐 해요?”
다섯 개 째 커다란 호박을 냄비에서 꺼내는 날 보며 미우가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주방에서 아주 가끔 장식을 위해서 쓰는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당연히 잭 오 랜턴 연습하는거지.”
할로윈의 상징
속을 파낸 호박을 무섭게 꾸미는 전통적인 그것
마트에서 파는 기성품 보다, 내가 하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는가!
“에엑, 뭐든지 잘 할거 같은 유나 언니가 연습을?”
“난 노력파 천재거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잭 오 랜턴이다
그리고 생각 외로 어려웠고, 기왕 만드는 거 이쁜 거 만들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내 조각 재능은 뛰어난 거 같지 않다.
“그래서 당분간은 호박 죽 호박 전 호박 튀김 호박 무침이야.”
미우의 표정이 썩어갔지만 뭐 별 수 없지
그래도 호박은 몸에 좋은 식재료니까, 안 그래?
툴툴 거리는 미우의 칭얼거림을 배경음 삼아서
나는 네 번째 잭 오 랜턴에 도전을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일본에 와서 사귄 사람들 중
지금의 선라이즈의 버튜버들이나 매니저들처럼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의외로 드물었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남의 집에서 파티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너무나도 할로윈이 기대가 된다.
“언니 초등 학생이에요?”
“파티를 즐기는 유나는 어린애라고.”
정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