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84화 (84/307)

〈 84화 〉 83화.

* * *

“푸하하하하하.”

아이돌 컨셉이란 이미 무너진지 오래다.

이것은 세계적인 아이돌 문화의 선두주자인 한국의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교육 자료로 공부한 내가 내린 결론이다.

처음에 기획한 것은 토크 쇼 겸 예능 방송이었고

결과에 남은 건 처절한 폭로쇼와 망가진 몸 개그, 캐릭터들의 민낯 그 자체였다.

뭐 애초에 첫 방송 진행이 완벽하게 흘러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 긴급 정지 사유가 ‘자꾸만 들러붙는 엘프에게 메이드가 내린 벌칙을 수행하던 도중 고난이도 체조 동작을 따라하다가 낸 신음소리가 너무 야해서’라니

애초에 수익화를 노린 방송은 아니었고, 본래의 취지였던 ‘서로 교류가 적었던 2기생 3기생이 만만한 4기생과 5기생의 인원들을 가감없이 놀리면서 심리적 교리를 좁히자’ 는 훌륭하게 달성되었기에 우리는 만족스럽게 방송을 종료했다.

방송의 본래 목적은 달성했지만... 뭐라고 해야할까?이대로 괜찮을까?

미안해요 사장님.

나는 오늘도 사장님의 꿈을 짓밟고 말았다.

아직도 아카리가 웃으면서 ‘아카리는 닭의 목을 한 번에 잘라내는 걸 좋아해. 뼈가 부러지는 그 소리가 좋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서웠다.

순진한 시골 처녀의 일상이 우리같은 도시인들에게는 공포로 느껴질 수 있구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상이었지만... 방송에서 그게 적나라하게 폭로가 될 줄이야.

당장 내일 아침 [‘치킨 헤드 슬레이어 아카리’라니. 이게 일본의 버츄얼 아이돌?]이라는 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아무튼 예정보다 빠르게 끝난 방송에서, 우리들은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첫 방송 수고하셨습니다.”

“네, 다들 들어가보세요.”

스태프분들과 인사를 마친 후 나는 방송 정리를 위해서 잠시 남게 되었고 먼저 떠나는 다른 버튜버들을 배웅해주었다.

물론 모두가 떠나지는 않았다.

거리가 먼 아카리와 저녁 방송이 예정된 아그니를 제외한 카린과 루미에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바닥에 엎드린 카린과 그녀를 밟고 있는 루미에를 탈의실에서 발견했다.

“저, 그 알아요. 혐오 관계의 SM플레이...”

“아,아니야 아니야!! 메이드씨가 시킨 운동이 너무 격렬해서 허리가, 허리가 삐끗했단 말이야. 그, 그래서 루미에에게 좀 밟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어.”

과연

운동과 백만년 거리가 떨어진 이 아가씨는 고작 약간의 허리 체조만으로 근육에 무리가 온 것일까

하지만 루미에, 그러니까 샤야씨의 체구는 상당히 작은 편이고 다리에 근육이 별로 없다.

그녀를 물러가게 한 나는 대신 허리를 밟았다.

우드득

“꺄아아아악. 하으으으응”

“비명을 지르던 신음을 내건 하나만 하세요 좀, 기괴함이 두 배가 되잖아요.”

정확하게 뭉친 근육을 짓밟는 내 발 끝에 그녀가 시끄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게 고양이의 안마같던 루미에의 압력과 다르게 내가 누르는 압력은 그녀보다 훨씬 강한 편이고 이런 자극이 주어져야지 뭉친 근육이 풀어진다.

그런데 진짜 허리 조금 움직였다고 근육이 뭉치는구나 이 사람.

“제가 온천에서 말씀 드렸죠? 운동 안하면 건강 심각하게 나빠진다고요.”

“하지마아안, 엘프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방송을 할 수 없는걸. 그리고 술을 마신 날에는 운동을 하면 안 되잖아.”

“뭔소리에요. 엘프같은 몸 허접은 술 마신 날에 운동 해도 괜찮거든요?”

“뭐?”

“엘프씨 몸은 너무 쓰레기라서 술 마시고 운동을 해서 오는 몸의 부담보다 운동을 안해서 오는 문제가 더 커요.

그리고 애초에 사람이 24시간 술에 취해있는것처럼 살아가는데 굳이 더 술이 필요해요?“

“흑흑, 메이드씨는 나한테만 잔혹해.”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던 루미에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메이드씨는 건강에 관련해서 해박하신가 보네요?”

“네, 뭐 일단... 적어도 버튜버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에 상당히 관심이 많이 있는 편이에요.”

쓰러진 카린의 팔을 붙잡고 이래저래 당기면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켜준다.

원래라면 격렬한 운동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해주는 스트레칭이지만 이 사람은 고작 1분간 허리 운동을 하는 게 인생의 업적이 될 정도로 운동을 안하는 사람이다.

“흐으응, 메이드씨의 손길 기분 죠아아아...아아아악!”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헤헤, 버튜버의 입은 크고 묵직한 걸 물기 전에는 다물어지지아아악!”

“후배가 보고 있는 데 부끄럽지 않아요?”

“괜찮아요. 엘프씨에게 한해서는 그냥… 선배에 대한 존경심을 쓰레기통에 갖다 박았어요.”

아이돌치고는 거친 표현이지만 엘프와 몇 번 방송을 해보면 다들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래도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캐릭터라 미워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자신의 우상과 실제 만나 본 소감이 어때요?”

무엇보다도 루미에씨는 카린의 방송에 반해서 버튜버를 지원하게 되었다.

루미에가 성희롱과 섹드립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뺀다면 두 사람의 방송 스타일과 캐릭터성은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맨날 사장님이 박살난 자신의 꿈을 붙잡고 우는 그림이 이해가 되네요.”

“하...하하...”

“그리고 박살내는것도 꽤 재미가 있더라고요. 카린 선배님 말대로 너무 가식떨면서 방송을 하면 피곤해지니까 적당한 때 조금씩 내려놓으니까 방송 하기가 편해지더라구요.”

“브...브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V를 표시하는 카린씨를 보니 기가찼다.

그러니까 루미에가 빠르게 5기생의 중심으로 성장하고, 선라이즈 최고의 어그로꾼이 된 배경에는 카린씨의 조언이 있구나.

카린씨 당신은 저어엉말...

아무튼 탈의실에서 근육이 풀린 카린과 루미에, 나 세 사람은 같이 회사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길을 걷던 나는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린... 아니 유메미 씨.”

“응 왜?”

“옷 차림이... 그... 그게 디폴트인가요?”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유메미씨는 상당한 미인이다.

말 그대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예쁜 미인인데, 그녀의 패션 센스는 그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한 듯 처참했다.

그도 그럴게 물방울 바지와 후드티라니... 아무리 회사의 풍조가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하얀 바탕에 파란 물방울과 늘어진 후드티는 너무나도 보기 흉했다.

내 태클을 기다린 듯 사자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눈토끼같은 옷차림을 한 루미에, 그러니까 샤야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 어째서? 그, 그렇게 이상해 보일까?”

“진심으로 묻는 거에요?”

“으으응, 하지만... 내 눈에는 이게 예뻐 보였던걸...”

“뭐 에이비씨는 이런 거 신경 안쓰는 사람이라 괜찮겠지만 저는 못 참겠네요. 샤야씨 오늘 한가하시죠?”

“네? 네!”

“같이 쇼핑 좀 해요.”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이게...나?”

“끄으응, 당분간 카린 씨는 옷 절대로 스스로 사지 말고 제 라인으로 링크 보낸 다음 사세요.”

그녀의 옷차림 센스는 농담 아니라 남중남고군대를 나온 한국인 유학생보다 센스가 처참했다.

안 그래도 몸이 마른 사람이 되도 않는 오버핏 옷을 좋아해서 입고 있으면 허수아비에 거적데기를 걸친 기분이었고

기본적인 색감의 조화나 포인트 컬러의 개념도 없고, 어린아이처럼 무조건 화려한 무늬만 좋아하는데 상 하의를 그렇게 걸쳐 입으니 정신이 산만했다.

베이지 톤의 체크무늬 스커트와 따스한 가을 색상의 숄, 안에는 하얀색 셔츠로 포인트를 준 다음 따사한 모자를 쓴 유메미씨는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뜨거운 커피 캔을 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입만 다물고 꾸미기만 하면 미인

유메미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헤에, 이러니까 유나 씨 내 엄마같아.”

“하아, 어머님께서 패션에 관심이 별로 없으셨나보네요.”

“응, 어릴적에 돌아가셨거든.”

차가운 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냉막함이 부는 듯 했다.

나는 넋이 나갔고 두 사람 사이에 낀 샤야씨의 얼굴이 그녀의 옷만큼 새하얗게 질려갔다.

막상 그 말을 한 본인은 별 다른 생각 없이 커피캔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지만...

“미, 미안합니다.”

“어? 응? 아니야 워낙 어릴 적이라서 기억도 잘 안나.

아무튼 그 때 이후로 워낙 먹고 사는게 바빠서 옷차림에 대해서는 별달리 신경을 쓴 적이 없는거 같아.

돈도 없어서 애들끼리 옷 사러 가자는 말도 잘 안 했고...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다녔던 직장은 블랙 기업 그 자체라서 옷을 사러 갈 마음의 여유나 시간이 없었거든...“

커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면서 그 달콤함에 행복함을 느낀 듯 순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난 선라이즈에 들어오고 나서 버튜버를 하게 되면서 정말 모든게 행복해. 모든게 그 때와 비하면 달라졌으니까, 선라이즈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선배와 후배도 사귀게 되고... 나를 챙겨주는 사람도 만나게 되니까.”

“유, 유메미씨...”

“에이비씨가 엄격한 아빠라면 유나씨는 상냥한 엄마라고 해야할까? 아하하, 미안해 연상의 여성이 이러는 거 좀 별로지?”

“아, 아니에요 딱히...”

“흐으응...”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겨울 바람 탓인지 아니면 따스한 커피 탓인지 붉어 보였다.

당황한 나는 아무데나 시선을 돌리다가, 때마침 적당해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들어섰다.

“우리 유나씨, 할 말이 없어지면 먹을 것을 찾는 편?”

“아니거든요! 그냥 저녁 타임이고 배가 고파서 그런거라구요.”

“두 사람의 이상한 무드에서 저는 좀 빼주세요오오...”

헛소리를 하는 샤야씨의 불평을 무시하고 나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나를 놀리기 시작한 유메미씨의 놀림을 받아치면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의 축제를 준비하는 겨울날

그렇게 내 첫 방송은 올리브유에 볶아진 마늘 냄새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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