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0화.
* * *
잠에서 일어난 나는 행복함을 느꼈다.
붉어진 얼굴로,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내 몸 위에서 자고있는 나에 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구나
새로운 날의 시작하는 순간 가장 처음 보는 것이 아침 햇살에 비춰지는 사랑스러운 사람의 모습이라니
그렇게 운동시키고, 그렇게 밥을 먹였는데도 나에 언니는 여전히 솜털처럼 가볍다.
도쿄의 집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 그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마치 유리 공예품을 침대에 놓듯이 그녀를 부드럽게 눕힌 나는 시계를 보고 놀랐다.
내가 열 두 시간이나 잠을 잤다고?
당황해서 호들갑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니 이미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미우와 만화책을 읽고 있는 츠유, 그리고 작곡을 하듯 오선지에 음표를 새기는 마미 선배를 볼 수 있었다.
“여, 여러분들?”
여기에 하숙 생활을 하고 있는 미우야 그렇다 치더라도, 코모레비나 마미 선배를 아침에 내 집에서 보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어제 방송 수고했어. 언니답지 않게 긴장을 바짝 하는 게 꽤 귀여웠어요! 언니.”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코모레비가 그렇게 말했다.
“어제 방송 평가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스탠드 옷걸이가 쓰러졌다고 변명 했으니까요. 메이드는 어제 방송 장비가 고장 나서 잠시 고치러 갔다고 말하니까 다들 믿어 주더라구요.”
아 맞다.
나 어제 방송했었지!
지상파의 방송이 아닌 인터넷의 방송이었고
이미 여러 버튜버들의 디스코드 음성 채팅이나 게임 합동 방송에 목소리가 나온 적 있었고
심지어 스튜디오에서 내가 쓴 대본을 가지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지만
내 의지로, 내가 주최하는 100% 나의 책임을 지는 방송을 호스트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마지막에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노래를 부르고, 코모레비의 진행에 맞춰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라?
“나... 어떻게 된거야?”
마미 선배가 작곡을 마친 듯, 펜을 탁 내려놓고 폐기된 종이들을 돌돌 말아 머리를 툭 치면서 말했다.
“어제 픽 하고 쓰러졌어. 지나친 긴장으로 인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참 나,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애가 노래 좀 했다고 긴장하는 거 정말 신기하다니까.”
“...”
“너보다 노래 못 부르는 녀석들이 잘난척 하면서 ‘나는 노래 천재야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가지고 있어’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부르는 애들이 얼마나 많는데, 정작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자신감이 그렇게 없어 할 줄이야.”
“세간에서는 그걸 재능 낭비라고 하죠. 언니 은근히 현실에선 강한데 온라인에서는 덤벙거리네요.”
그러고는 두 사람 다 나를 향해 퐁퐁(일본어로 덤벙거리는 사람을뜻하는 ポンコツ의 줄임말)거리면서 놀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미우도 거기에 합세해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그 동안 쌓아올린 퍼펙트한 한국인 유학생 유나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데는 단 한번의 방송이면 충분했다니!
하지만 진짜로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코모레비의 센스있는 마무리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었고
마미 선배가 아니었으면 또 혼자 쓰러지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으으...
그런 생각이 지나고 나서야 머릿속에 반짝이는 의문을 물었다.
“그런데 나에 언니는요? 도쿄에 있어야 할 언니가 어째서...?”
“... 믿을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어제 네가 쓰러지는 그 순간 쿠로가와 씨가 집으로 돌아왔어. 뭔가... 찌릿찌릿한 그런 게 왔나본데?”
“네?”
무슨 초능력자 영화에서 나오는 육감도 아니고
어떻게 내가 쓰러진 순간에 도쿄에서 여기로 올 수 있단 말인가?
자동차로 삼십분 걸리는 거리인데... 그리고 어제는 거의 즉석으로 진행한 방송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마미 선배의 말을 듣고 있자니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도대체 어떻게...?
“사실 문을 열어준 나도 정말 놀랐어.”
“예전부터 나에 언니는 감이 좋았거든요.”
우리들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미우였다.
접시를 천장에 올려놓으면서 냉동실에 넣어둔 초코파이를 꺼내서 한 입 배어물고는 예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령 예전에도 학업과 업무로 과로로 쓰러진 나를 재빨리 발견한 일이라거나
전철을 타고 다닐 때, 기가 막히게 연착이 될 만한 노선들을 피하거나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우산을 가지고 나온 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는 둥
의외로 나에 언니의 감은 아주 날카롭다고 했다.
정말 의외였다.
나를 만나기 전 나에 언니는 상당히 산만하고 생활에서의 주의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날카로운 모습이 있다니?
아침에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자는 귀여운 언니의 모습과 정말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언니가 자고 있는 동안에 저희 셋이서 고민을 해보았는데요.”
숨겨진 보물 지도를 꺼내듯, 만화책 사이에 끼어둔 접혀진 종이를 꺼낸 츠유가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니 언니는 항상 우리들 뜻에 휘둘려서 방송을 하고 노래를 했잖아요? 사실 언니가 천생 방송인이면 모를까, 일반인에 가까운 언니를 이렇게 사적으로 부리는 것에 대해서 어제 반성을 많이 했어요.”
“아, 아냐 이제는 괜찮아! 난 단지!”
“아니에요.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저희들인데... 그건 좀 너무했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저희가 계획을 해보았어요. 언니 보고있죠?”
그 종이에는 유나를 위한 특별한 휴가 계획
휴가라고? 내가?
“선라이즈의 최초의 과로사를 할 뻔해서 강제 휴가 시스템을 도입하게 한 장본인이 다시 쓰러지다니 있을 수 없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긴장으로 인한 기절과 피로로 인한 기절은 다른 거지만...
내 심신 상태를 걱정한 그녀들은 어느 새 나 대신에 휴가 신청을 했나보다.
심지어 미우는 오늘 학원도 빼놓는다고 그 계획서에 쓰여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좋아하는 거 잔뜩 넣어봤어요. 그거 아세요? 이번에 선샤인 시티에...”
“아니 그런 건 너무 오타쿠스럽잖아, 유나라면 이케부쿠로의 도부 백화점에서 이번에 새로 입고된...”
“맞다, 저번에 내 여동생이 말했던 건데 신쥬쿠에...”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그녀들은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가본 장소들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찾지 않게 된 그 장소들을 이야기 하는 그녀들 모두가... 너무 고마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예전처럼 친구들과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새로운 패션 아이템을 찾고, 살 수 없는 가방들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매일같이 챙겨 보던 패션 잡지 대신 패미통, 게임 라보 같은 게임 잡지를 읽게 되었고
대학생 친구들의 대화에 어울리기 위해서 챙겨보던 예능 프로그램이나 지상파 연예인 프로그램 대신에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틈날 때 마다 확인하던 인스타그램 대신에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연예인들을 팔로우 하는 대신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성우들을 팔로우 하게 되었다.
옷장을 채우던 옷들이 낡아지더라도 그대로 입고 나가게 되었고, 계절마다 한 벌씩 사던 옷들은 이제 버튜버들의 굿즈 의류로 대체되었다.
만화와 게임을 모르던 내가 이 일에 적응하기 위해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바꾸었고, 타인을 위한 쇼핑이 아닌 나를 위한 쇼핑도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위해서, 내가 쓰려진 사이에 이런 계획을 준비하다니...
한국의 가족조차 신경 쓰지 못했던 사실을, 낯선 땅에 만난 그녀들이 챙겨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내 속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온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건 이케부쿠로의 주차장에... 어?”
한창 노트북에 지도를 띄우며 열변을 토하던 마미 선배가 나를 지켜보더니 말을 멈춘다.
“어, 언니 울어요?”
“안 울거든!”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이 행복함을 가슴속에 다 껴안으면 터져버리고 말 것이니까, 그 행복을 눈물로 잠시 흘려내야 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아껴주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고맙다.
아닌 척 해도 같은 여성들은 언제나 나를 적으로 보아왔으니까.
겉으로는 나에게 친한 척을 해도, 언제나 돌아서면 재수없거나 남자에게 꼬리 치는 애라고 몰아가는 여자들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유학을 가서도 꼭 있었으니까.
너희들이 나를 미워한다면 나도 너희들을 미워할 이유를 만들어주마같은 태도로 항상 당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가 없지는 않았나 보다.
이렇게 나를 아껴주고 좋아하는 여성들을 모두 껴안으면서 온 세상을 가지는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되다니.
“수, 숨막혀요!”
“가, 가슴...! 가슴 좀 치워!!”
“유나 언니 정신차려우붑”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녀들 모두가 내 가족같은 존재들이라고.
아래층의 소란에 잠에서 깬 나에 언니가 충격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녀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