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10화.
* * *
“후와아아… 지쳤어요.”
“모의 고사 수고 많았어. 오구오구 장하다 우리 미우짱.”
아무리 수능을 달리는 고3이라도 모의고사 치는 날에는 쉬어주는게 한국이나 일본이나 국룰이긴 하지.
이 날 만큼은 나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고타츠에 들어간 미우에게 귤을 먹여주면서 바빠서 신경쓰지 못한 미우의 근황을 챙겼다.
주로 어느 과목 성적이 올랐다느니, 어느 버튜버의 미적분 방송을 보고 성적이 올랐다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 옆에 기대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는 미우는 어디에서나 볼법 한 예쁘장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러고보니 일본은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나이가 20세였지?
언젠가 미우하고도 술을 까긴 까야하는데…
“후후, 언니 저 예뻐지죠? 좀 더 지적이고 우아한 엘리트 여성의 분위기가 나지 않나요?”
요즘 들어서 부쩍이나 여성스러움을 어필하려고 하는 그녀다.
왠지모르게 나에게 만큼은 어른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하고 싶어한다고 해야할까?
하긴 고3의 심리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도 내가 고3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에이펙스나 한 판 땡길래요? 무적의 메이드와 함께하는 기적의 여고생!”
기적의 여고생
학원에 들어갈 당시만 하더라도 평범한 중위권 성적이었던 그녀가 등수를 크게 끌어올린 후 붙은 별명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평균 5등급 받던 그녀가 갑자기 평균 2~3등급을 왔다갔다 한다고 해야할까나
“언제는 한국 음식점에 가고 싶다고 하더니.”
“그럼 에이펙스 신나게 땡기고 한국 음식점에 가면 되죠. 오랜만에 지글지글 구운 숯불 돼지고기 삼겹살에 불닭 반 접시 땡긴 다음 된장찌개에 밥말아 비벼먹고싶어요.”
…
이게 한국 고3인가 아니면 순수한 일본 고3인가
이제는 느끼한 돼지고기 라멘 먹을 때 김치가 땡긴다는 말을 하게된 미우의 입맛은 완전히 나와 닮아버리고 말았다.
마늘과 고추 향신료에 매료된 정말 평범한 한국인 입맛이 된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지만…
가끔은 그녀가 나와 떨어져서 생활하게 되면 어찌 지낼지 걱정이 된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간만에 나에 언니 방송 풀로 보려고 하거든.”
“에이… 그러면 비도 오는데 파전에 막걸리 콜?”
연극 톤으로 고조된 목소리로 눈을 찡긋거린 미우가 내 어깨에 팔을 슬쩍 걸치면서 말했다.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
“한국 드라마요.”
“참 내 기가차서…”
“학원 친구들에게 같이 사는 한국인 언니가 한국식 요리 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부러워하는 줄 알아요? 우리들 사이에서 한국 문화가 아주 그냥…
정형화 된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를 탈피해서 단아한 이미지 보다는 개성을 살리는 이미지로 멋지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한국의 문화에 감화받은 여고생이 어딜가나 있다면서, 미우는 나를 만난 게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 강조했다..
“… 너 그래서 요즘 들어서 부쩍 김치 볶음밥 해달라고 많이 하던데 이유가 그거였구나?”
“헤헤헤, 그래봤자 언니 건 좀 매워서 다른 애들은 잘 못먹긴 하지만… 뭐랄까, 이제 매운거 잘 먹는 여자는 곧 한국 문화 해박한 여자와 비슷하게 되었다구요.”
“어이구, 그래서 정말 파전 구워줄까? 간만에 가지는 휴일인데 파전 만으로 만족 하겠어?”
내가 짓궂게 말하자 미우가 손사래를 쳤다.
“그럴리가요, 으음, 뭘 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는 그 모양새가 마치 나를 음식 자판기로 생각하는 모양처럼 보여서 기가 찼지만 뭐 어쩌겠는가?
공부 열심히 하고 성적이 오르고 있는 귀여운 고3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나는 인심이 야박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게 음식에 관련된 일이러면 더더욱. 공부는 밥심이다.
“비오는 날, 스트레스 풀기, 한국 음식… 코타츠… 나베… 정답은 부대찌개다!”
스키야키나 샤부샤부보다 부대찌개를 좋아하게 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SNS에서 어느 부대찌개에 수상할정도로 진심인 서양인 아저씨가 부대찌개와 활짝 웃는 자기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계정이었는데, 나는 난생 처음으로 부대찌개의 비쥬얼이 이렇게 맛있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게 얇고 넓은 팬에 햄을 둥글게 가득 채운다음 각종 햄과 소세지를 아낌없이 투하를 하다니… 사진 속의 자글자글 거리는 부대 찌개의 소리만 들어도 입에 침이 싹 돌았다.
“면은 먼젓번에 선물 받은 사누끼 우동을 쓰죠.”
“허이구, 200 그람에 1천엔 하는 그 비싼 걸?”
“비오는 날의 부대찌개는 신의 음식이에요. 소주만 탁!”
정말이지 미우와의 대화가 일본어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내가 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황당함이 드러난 표정이 웃긴지 씩 미소짓는 미우의 얼굴은 악동에 가까웠다.
***
그날은 말 그대로 휴식의 날이었다.
나 또한 방송에 대한 스케쥴이나 합동 방송을 요청받은 것도 없었고, 오랜만에 들어간 에이펙스에서 적당히 이기고 지면서 즐겁게 게임을 즐겼다.
직장인도, 고3도 열광하는 게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는 같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국물은 치킨 스톡?”
“아니~ 다시마 멸치 새우 들어간 다시 육수~ 부족한 육수 맛은 다진 고기 살짝 넣어서 맛 더할거야.”
“김치는 그… 조금 오래된 녀석 쓸거죠?”
“응, 신김치라고 해. 소세지는 얼마나 넣을까?”
“이 위..정부? 부대찌개로요!”
그렇게 말하며 이탈리아 햄을 한 바퀴 빙 두르고 스팸과 대파를 넣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왕 먹을 음식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여고생의 마음을 아는 나는 가급적이면 정성을 들여서 세팅을 했다.
얼추 SNS에 보이는 부대찌개와 비슷한 비쥬얼로 세팅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수저를 차리고 노트북을 가져와 방송 시청 준비를 세팅하고 가스 버너를 준비하는 둥 나머지 준비를 해주었다
이후에는 행복하게 밥을 먹는 미우와 나에 언니의 생방송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로 나만의 덕질을 하는 저녁
정말로 평화로운 저녁시간이었다.
그래, 같이 살고 있는 타마가 언니의 방송에 난입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있지, 솔직히 말해서 타마는 날 너무 좋아해.”
이제는 유리아의 상징처럼 된 마인 크래프트 방송에서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툭만하면 개인 방송에서 내 이야기만하고, 댄스 연습할 때도 맨날 나만 바라본다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의 내용은 간단했다.
요즘들어서 부쩍 사이가 좋은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난스럽게 화제거리에 오르는 ‘누가 날 더 좋아해?’ 의 주제였다.
마치 좋아해 라고 말하면 지는 것으로 여기는 초등학생의 유치한 말장난처럼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묘한 기류는 확실히 ‘백합’이라 불릴만한 그런 것이었다.
또또 테에테에 한다.
둘이 사귀냐 진짜
애초에 친한 친구라고 해도 저렇게 오랫동안 같이 사는 게 말이 돼?
아싸 찐따 괴롭히는 아싸 공주라... 이건 먹힌다.
“게다가 이번에 크리스마스 파티 혼자 보내기 싫다고 은근히 어필한 거 너희들도 잘 알잖아?
같이 놀기러 한 이후에는 은근히 주변에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유리아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고 트위터에 막 광고하고 그랬잖아.“
그 때였다.
“이 녀석아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자빠져있어!”
불량한 양아치 연기톤으로 난입한 타마가 난데없이 방송에 등장했다.
본처 강림!
오늘 스케쥴 없다면서 방송에는 난입을 하네 ㅋㅋ
“내 쪽이 아니라 유리아쪽이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타마는 허리에 양 손을 얹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다 알고있어, 사실 유리아는 타마를 엄청 좋아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말 못하는 거 맞지?
역시 타마는 인기가 좋고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니까!“
평소에는 아싸찐따 모드이지만 유리아 앞에서는 한없이 당당해지는 타마의 그 말에 시청자 모두가 폭소를 했다.
그 후에도 서로가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냐 마느냐 하면서 밝은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둘 다 ‘사실 네가 더 날 좋아하지? 빨리 좋아한다고 말해!’ 라는 말을 서로에게 주고받으면서 마치 달달한 연애 프로그램을 보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라면 즐겨보는 버튜버들끼리의 사이 좋은 캐릭터성 폭발, 이른바 케미가 넘치는 달달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오늘 따라 화면 속에 보이는 유리아와 타마의 사이 좋은 모습은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히죽거리는 오타쿠의 미소가 아닌 떨떠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소 좋아하는 두 사람의 생방송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나에게는 저렇게 편하게 웃어주지 않는 언니가 타마에게는 저렇게 웃어주는 것을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두운 길을 걷다가 물 웅덩이에 발을 빠트린 그런 기분이 들은 나는 먹던 밥을 내려놓고 설거지를 하려 일어났다.
“언니 벌써 다 먹었어요?”
내가 수저를 놓고 일어나자 미우가 그렇게 물어왔다.
“응, 귤이라도 조금 가져다 줄까?”
“음... 오호,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다, 오늘은 제가 설거지를 대신 해드릴까요? 유나 언니 나에 언니 생방송 간만에 보는 거잖아요.”
“아니야, 금방하고 올게.”
“흐응.”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짓는 미우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듯 나는 부엌으로 도망쳤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이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언니의 방송을 볼 수 없게 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