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125화.
* * *
정신을 차려보니 익숙한 천장이다.
그도 그럴게 여기는 나에 언니와 이로하가 방송을 하는 방송방의 천장이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로하의 방에 가까웠는데... 내가 왜 여기서 혼자 자고있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오전 아홉 시, 착한 어른은 출근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로하의 냄새가 잔뜩 배인 방을 나오고 나서야 나는 어젯밤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크리스마스가 지난 26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서둘러 거실로 내려오자 이로하와 코토나시, 말리아가 바닥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고, 어느 사이엔가 돌아온 마미 선배와 나에 언니가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주위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음식물의 잔해가 남아있는 그릇들을 보니 골치가 아파졌다.
술이 덜 깨서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부여잡고 있자니, 손님방이 열리면서 츠유와 츠무기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그러고보니 비교적 일찍 잔 편인 두 사람은 광란의 술파티에서 벗어났지... 자매의 잠버릇은 비슷한 모양인지 엉망진창이 된 흐트러진 머리리를 서로 만져주다가 나를 보고는 해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나 언니.”
“잘 주무셨어요?”
“어... 응... 아마도.”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엉망진창이 된 거실과 뒷정리를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쿡쿡 쑤시는 머리를 보아하니, 오늘 하루종일 고생을 할 것이 짐작되었다.
“언니 배고프시죠? 라면 끓여드릴까요?”
츠유가 앞치마를 매면서 말했다.
“어차피 나머지 사람들은 늦게 일어날 거 아니에요? 고생한 언니를 위해 이정도는 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말하자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제까지 매던 앞치마를 착용한 츠유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힘없이 앉아있자니,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다가온 츠무기가 내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나를 무슨 무서운 맹수 취급하듯이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녀는 용기를 내어서 내 머리를 빗으로 빗어주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츠무기 씨.”
“앗, 말 편하게 해주세요.”
“그럴까요?”
“네, 저도 편하게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
언니라...
물론 언니라고 불린 적은 드문 적이 아니다.
당장 크리스마스 이전에만 하더라도 같이 살던 미우도 나를 언니라고 불렀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해야할까나, 고등학생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과 중학생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미우는 나와 나이차이가 크게 나지 않지만 츠무기는... 다섯 살 이상 차이가 난다.
즉 강산이 반 정도 바뀔 세월이고, 첫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시작하는 그런 세대가 바로 츠무기의 세대다.
그런 멍청한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자 코를 간질거리는 냄새와 함께 츠유가 나를 불렀다.
츠무기의 손을 잡고 주방에 가니 설마 하던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 향기가 내 코를 찔렀다.
냄새를 맡아보니 마늘향이 강렬하게 올라오는게...
“어라, 마늘쫑을 썼네?”
“어제 돼지고기랑 같이 구우셨더라구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냉장고를 확인해보니 남아 있더라고요.”
“오 고마워, 그런데 내가 술 마시고 한국 라면 찾는 거 어떻게 알았어?”
숙취에는 콩나물 국, 매운 라면, 복국이 진리다.
매운 것을 전혀 취급하지 않는 이로하의 집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의 신라면을 맛보게 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글쎄요, 왜일까요?”
“그거 언니가 유나 언니 좋아한다면서 사온...웁웁”
황급히 츠무기의 입을 가리는 츠유를 보고 난 진실을 알아차렸다.
오호라, 그러니까 츠유는 나를 위해서 굳이 자신의 가방에 신라면을 편의점에서 사온거구나...
흐응, 그래, 그렇다는거지?
내 눈썹이 짓궂게 올라가자 크흠크흠하며 헛기침을 한 츠유는 등을 돌려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어째 설거지를 하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는 게, 츠무기가 수거한 그릇을 적절한 손목의 스냅을 쓰면서 빠르게 닦는 동작이 프로다워 보였다.
“설거지... 잘 하네?”
“제 본가가 라멘집이라서요. 라멘집 딸들은 뭐 어릴 때부터 자기 얼굴 만한 커다란 접시 씻는 용돈벌이 정도는 해요.”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츠유네 아버님이 라멘집을 한다고 했지, 빚 때문에 고생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라멘집을 하는 아이돌이라, 너무 일본틱한 설정이 아닌가?
하지만 그게 진짜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츠유랑 함께 라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는것도 좋을 것 같다.
일본에는 유난히 라멘에 엄격한 사람들이 많고, 라멘 오타쿠들만이 공유하는 가치관 비스무리한게 있다는 것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나는 라멘집 딸이 말하는 라멘론(?)에 대해서 관심이 갔다.
달그락달그락 거리면서 설거지를 하는 츠유의 모습과 뽈뽈거리면서 집안 곳곳에 놓인 접시와 컵을 수거하는 츠무기의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배를 꺼냈다.
붉은 기가 감도는 아카나시(赤?)는 산미가 적고 단맛이 강한게 한국의 배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맛이 좋다. 물론 그냥 씹어먹어도 맛있지만, 아무래도 해장에는 역시 음료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설거지를 하고있는 츠유에게 양해를 구하고 믹서기를 꺼냈다.
우웨에에엥!
믹서기 소리가 시끄럽게 거실에 울려퍼지자 그제야 잠에서 깬 사람들이 좀비처럼 식탁으로 모였다. 평소라면 일을 나가거나 방송 회의를 하거나 해야할 버튜버들은 단체로 휴방을 예고하고 휴식을 취했다. 뭐, 크리스마스에도 열심히 일 했으니 회사도 오케이 해주지 않을까.
“구우웃...모니이잉...”
말리아는 자신에게 들러붙는 코토나시를 몇 번 밀어내다가 이내 포기한 듯 지친 손짓으로 식탁에 엎어지듯 앉았다. 코토나시는 껌딱지처럼 말리아에게 붙어있었고, 마미 선배는 이로하의 눈곱을 떼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 언니는 스리슬쩍 나에게 다가와서 내 무릎위에 앉았다.
마치 제 자리가 여기라고 주장하는 듯한 나에 언니의 천연덕스러움에 기가 찬 내가 말했다.
“여기가 언니 지정석이에요?”
“왜, 안 돼?”
“...그런건 아니에요.”
평소라면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주거나, 눈곱을 떼어주면서 장난을 칠 나였지만 왠지 모르게 언니에게 느껴지는 기백에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언니는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려두었다.
“쓰다듬어줘, 빨리.”
“예이예이.”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까, 나는 언니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한 눈을 보냈다.
뭐, 왜, 뭐.
나도 내가 기계 같다는 거 안다고.
**
아침은 대충 어제 남은 스튜와, 빵, 그리고 스파게티 소스를 활용한 리조또로 해결했다.
일을 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각자의 소지품을 챙기면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활기찬 사람은 다름아닌 츠무기, 여기서 가장 어리다는 걸 증명하듯 쌩쌩함을 자랑하는 그녀는 보는사람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뒷정리를 도왔다. 급기야 나중에는 여기에 모인 전원의 연락처를 모으게 될 정도로 그녀는 좋은 인상을 남겼다.
부럽다, 저런 귀여운 여동생 나도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먼저 가볼게요. 즐거웠어요.”
“여러분들 하시는 일 잘 번창하길 바랄게요.”
츠유와 츠무기가 그렇게 인사를 올리고는 먼저 떠났다.
아무래도 츠무기는 오후에 부활동이 있다 보니까, 두 사람은 올때처럼 택시를 타고 떠났다.
“흐아암... 말리아, 저희는 어쩌죠?”
“어쩌긴... 저희도 이제 집에 가서 방송 준비 해야죠.”
두 사람이 떠난 후에는 묘하게 늘어진 코토나시를 채근한 말리아가 선물 보따리와 자신들의 짐을 챙겼다. 그녀는 자꾸만 늘어지려는 코토나시의 등을 자꾸 때리면서, 자신들이 머무른 흔적을 치우고는 현관 밖으로 나섰다.
“회사측에 보고는 저희들이 할게요. 아무래도 어제의 짧은 방송 출현이지만 그것 때문에 마츠시타 매니저님이나 다른 해외쪽 스태프분들이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
“맞아요. 저희가 알아서 다 보고 할게요. 헤헹, 그래도 어제 방송이 워낙 성공적이여서 혼날 것 같지는 않네요.”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사람은 그렇게 나에게 당부를 하고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 동안 나에 언니가 여기에 머물렀던 흔적을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준비했다.
“언니 어때, 즐거웠어?”
“응. 엄청 즐거웠어.”
“어느 정도야?”
“내 인생 최고의 파티였어.”
나에 언니의 방송 장비를 옮기다가 이로하와 마미 선배의 대화를 들은 나는 미소지었다.
그런 내 미소를 보고 궁금해하던 나에 언니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는 이로하와 마미 선배를 보고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나에 언니, 여기서 행복했어요?”
“응, 이로하는 내 생에 첫 친구인걸.”
“어라라, 저는요?”
“그건...”
두 눈을 잠시 감은 언니는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말했다.
“비~~밀”
“그런게 어디있어요~”
“자아자아, 어서 이사 준비나 마저 하자구.”
그 모습이 얄미워 보인 나는 언니의 머리를 헝클었다.
나에 언니도지지 않는 다는 듯 내 팔뚝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에 언니는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이로하네의 집에서의 숙박을 오늘 부로 마무리 하게 되었다. 정들었던 방을 떠나면서, 그 모습을 기억하려는 듯 언니는 천천히 집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짐이 놓여져 있는 현관으로 나왔다.
“그래, 우리 자매의 집에서 가장 길게 머무른 쿠로가와 나에 씨, 만족 하셨나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로하에게도, 마미...에게도 말이죠.”
처음으로 마미 선배의 이름을 불러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잠시 맴돌았다.
하지만 이내, 같은 지붕 아래에 잔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야 이름을 놓냐는 내 투덜거림에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뭐, 당분간은 무리겠지만 언제든지 놀러 와요. 나에...언니는 제 언니의 소중한 친구니까요.”
“잠깐, 내 의견은?”
“언니, 이 집 지분은 내가 60%인거 알지?”
“그으으...”
하여간 마지막까지 자기 언니의 기강을 잡는 마미 선배는 여전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 끝에 모든 짐을 차에 실은 나는 시동을 켰다.
“그럼, 다음에 또~”
“어차피 회사에서 지긋지긋하게 볼건데 뭐. 그래도 당분간 아싸 연합은 해제야 해제.”
“다음에 만날때는...적이다.”
그 지극히 오타쿠스러운 대화를 끝으로, 나는 차를 출발했다.
아싸 연합이라는 즉흥적인 콘텐츠로 시작된 오프라인 합동방송, 그 이후 난생 처음으로 친구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일을 같이 하고, 인기가 높아진 두 사람의 임시 그룹은 이내 회사를 대표하는 유닛이 되어서 같은 음악을 준비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미묘하다는 것이라고 느끼며, 언니와 나는 차 안에서 버튜버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사이타마의 집으로 돌아왔다.
쉐어 룸 하우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사이타마의 저택
우리 두 사람은 아주아주 오랜만에 단 둘만이 있게 된 그 저택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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