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128화 (128/307)

〈 128화 〉 127화.

* * *

한국에 있었을 당시 새해를 맞이하는 연간행사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감자칩을 으적으적 씹으면서 연애대상과 가요대상을 번갈아 보면서 한 해 드라마 이야기나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각에 종을 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생일 시절에는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정각에 신사를 가서 종을 치거나 참배를 하면서 신년을 기원하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이 새해 맞이였다.

그런 나의 신년맞이는, 버츄얼 상에서 진행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가상현실 기계를 몸에 부착하고, 방송인처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날의 방송은 신년에 연관된 가벼운 퀴즈쇼와 잡담이 주를 이루었다.

근하신년(????)이라고 적힌 가상 무대 속에서 메이드가 된 나는 정각이 된 그 즉시, 나와 같은 방송에 참여하고 있었던 멤버들과 함께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올리면서 등장했다.

오늘의 토크는 잡담 속에서 진행이 된다.

새해가 되는 그 순간,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심야조인 이나리와 마녀, 아그니와 에이아 네 사람은 기모노 복장을 입은채로 참가했다.

물론 나야 뭐 메이드복이지만… 아무래도 방송 어시스턴스니까 괜찮겠지?

“여러분들 2020년이 밝았습니다. 다사다난한 작년을 뒤로 두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순간에 같이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방송을 진행하는 저는 선라이즈 스태프 소속의 메이드 라 입니다. 오늘의 토크쇼에 참여해주신 여러분들의 소개부터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이나리님부터.”

“콩콩콩~ 이나리 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안녕하세요? 이나리입니다. 2020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이라니를 시작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정해진 인사 멘트를 올린 우리들은 텐션을 끌어올린 채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후우, 작년에는 저, 이나리 혼자서 공식에서 신년 방송을 진행했는데요, 올해에는 듬직한 후배분들이랑 같이 하게 되어서 참 영광이네요.”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이나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이나리 대선배님과 콜라보 방송이라니, 저야말로 영광이네요.”

“아뇨아뇨, 대선배라뇨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구요~ 오히려 마녀 씨가 대단하기로는 더더욱~”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버튜버끼리 겸양을 떨면서 서로를 치켜세운다거나…

“에? 아그니님은 원래 고향으로 안 돌아가신다고요?”

“물론이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긴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신나는 신년 맞이 축제를 즐기는 편이야.”

“에? 그러고보니 이집트에서는 어떻게 신년을 맞이하나요?”

“원래 이집트의 진짜 새해는 첫 초승달을 본 이후인데…”

다른 문화권의 사람으로부터 신년을 맞이하는 방법을 묻는다거나…

“아아아, 채팅창에 확실히 오미쿠지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네요, 여러분들은 언제 가실껀가요?”

채팅창을 읽으면서 버튜버들의 소소한 근황을 은근슬쩍 묻는 식으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잡담으로 인해서 적당히 긴장감이 풀렸다고 생각한 나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에이아가 오미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데… 본격적으로 우리들도 토크 오미쿠지를 해볼까요?”

방송 화제를 뽑기 시스템으로 뽑는 말 그대로 오미쿠지

어느 화제를 뽑을 것인가는 각자의 운에 따랐기 때문에, 그 난이도는 천차만별이었다.

가령… 새해 첫 포부를 밝히기, 새해 첫 비디오 게임을 말하기 같은 쉬운 난이도도 있었지만…

“이게 뭐야? 새해 첫 동물흉내 내기 (수탉)!?”

“평범하게 노래를 선정하라고!! 소란부시가 뭐냐구요!!”

새해 첫 날부터 ‘꼭끼옥ㄲㄱ꼬꼮ㄲ꼮!!’ 을 시킨다거나, 유명한 생선 잡이 노래인 소란부시를 시키는 개그를 시키는 잔혹한 함정들이 끼어있으니 그야말로 오미쿠지에 가까웠다.

가혹한 함정과 평범한 토크로 가득찬 한 바퀴 순행 이후, 다음 오미쿠지를 긴장한 표정으로 뽑게 된 이나리가 스톱! 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녀의 토크 테마가 정해졌다.

[새해 첫 드라마 연기 ­ 막장 드라마]

“에에?”

굳이 분류하자면 흉(?)에 가까운 선택지였다.

머리위에 쫑긋 솟은 귀를 축 늘어트리면서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후배들의 기대감 가득 찬 시선을 받았다.

아무래도 버튜버 방송계의 전설인 그녀답게, 이런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갈까? 라는 시선이 온라인에서도 느껴졌고, 채팅창도 새벽 1시를 향해 다가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웠다.

“좋아요. 이나리에게 이 정도는 가뿐하죠!”

오오 역시 이나리

선라이즈의 대 스타답게도 이런 돌발 예능 상황에도 익숙해보였다.

그런데… 왜 나를 뜨겁게 바라보고 있지?

“헌데 연기, 그것도 막장 드라마에 관련된 연기라면 당연히 맞은 배역도 있어야하겠죠?”

그건 그렇다.

근데 왜 많고 많은 버튜버들을 제쳐두고 나를 바라보고있지?

그녀의 입가에 씨익 걸린 미소를 본 나는 등 뒤가 축축해졌다.

“위기의 예능 상황, 곤경에 빠진 버튜버의 이런 ‘방송’을 돕기 위한게 바로 선라이즈의 스태프, 일명 ‘방송 어시스턴트 메이드’가 해야하지 않을까요?”

당했다.

당했다!

나는 간절한 시선으로 채팅창과 다른 참가자들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는 마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너의 재롱을 지켜보겠다’ 라는 파라오의 거만한 자세로 돌아간 아그니, 그리고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는 에이아를 보며 나는 절로 ‘크읏!’하는 소리가 나왔다.

채팅창 또한 갑자기 등장한 백합 드라마에 환장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나리의 장난과도 같은 그녀의 연기를 받아주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

“메이드님, 메이드님… 저와 당신이 보냈던 뜨겁고 정열적인 밤은 그저 하룻밤의 장난에 불과하였나요?

제 손목을 침대로 밀어붙이면서 사랑을 속삭이던 당신의 다정한 키스는 그저 제 환각에 불과하나요?”

아니 이게 무슨 드라마야!

이 망할 여우가 누구를 뭐로 만드는거야!

나는 그녀의 페이즈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덤덤한 남주 캐릭터를 떠올렸다.

그래 네가 나를 정치한다면 나 또한 정치하마

아니, 뻔뻔해지겠다.

이래보여도 한국의 아이돌 연습생, 드라마 레슨은 받아보았다!

나는 거만한 재벌 캐릭터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여자군요. 저는 이미 사랑하고있는 약혼자가 있는 몸입니다.

당신같은 여우와 놀아난 기억 따위는 없습니다만.”

“하지만… 하지만…!”

“나가주세요. 정말이지 새해부터 사람을 당혹하게 만드는군요.

이봐요. 에이아 부장님. 이 여우에게 새해 보너스나 주고 물러나게 만들어요. 정말이지, 이런 여우가 우리 회사에 돌아다니다니 참 당혹스럽군요.”

“네엣, 알겠습니다!”

나의 애드립에도 훌륭하게 연기를 받은 에이아가 슬금슬금 이나리의 뒤로 걸어왔다.

이정도면 훌륭한 연기겠지?

“하지만! 저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는걸요!”

“…”

정말 막장드라마 다운 폭탄성 발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른 버튜버들은 필사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서 끅끅 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고, 마녀같은 경우에는 아예 마이크를 꺼버렸다!

­ㅋㅋㅋㅋ 아 이래야 막장이지!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메이드 얼굴 굳은 거 봐

­NG라고 NG

­새해부터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라니… 이나리는 정말 전설이다. 가슴이 다 웅장해져

­근데 메이드도 잘 받아주긴하네 ㅋㅋ

“저와… 당신의… 아이라구요?”

“저에게서 사랑은 당신의 유전자를 가진 이 아기입니다. 어제 의사에게서 확진 받았어요. 이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고, 그리고 저는 당신 이외의 사람을…침대에 들인 적이 없어요.”

무방비하듯 축 처지며 뒷목을 드러내는 그 재스쳐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귀여운 여우 인간의 아바타에게서 치명적인 매력이 흘러나온 것 같았다.

나는 복싱 선수의 강력한 원투 펀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사고가 멈추는 것을 느꼈다.

나에 언니와 함께 먹은 새우 튀김의 힘을 끌어모으며 나는 반격했다.

“새하얀 여우 씨, 유감스럽지만…”

기가 막히게 버튜얼 아바타로 떨리는 눈의 연기를 하는 이나리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저는 당신을 이제 처음 봅니다. 아마 다른 사람과 착각 하신 것 같군요.

에이아 부장, 이분을 병원으로 모시다 드리게나.”

­쓰레기다

­우와아아

­이게 나쁜 여자의 표본?

­목소리 내려깔고 저렇게 말하니까 진짜 소름돋는다

­세상에 ㅋㅋㅋ 메이드에게 이런 면모가 있다니.

­하룻밤 사랑 착각ㅋㅋ 진짜… 나쁘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좋은데?

웅성거리는 채팅창을 보며 나는 이만하다면 충분하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면서 말했다.

“자아자아 이 정도면 훌륭히 드라마의 일부분을 보여준 것 같네요. 협력해준 에이아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물론 매력적인 히로인의 역할을 해준 이나리님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즉석으로 이런 연기라니, 정말 대단해요. 역시 선라이즈의 대 선배 이나리님!”

“흐흥, 이나리에게 이 정도 ‘연기’야 별 거 아니라구요!”

짝짝짝짝

나머지 멤버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돌연듯 시작된 이나리의 장난 섞인 드라마 연기는 무사히 끝마쳤다.

정말이지, 올해의 첫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정말 매섭게 장난을 치는 듯한 이나리씨는 무섭기 그지없다.

역시 신사의 딸이라 그런가, 새해가 다가오니 굉장히 강해지는구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으면서 두 시 까지 이어지는 새해 방송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방금 연기한 그 막장 드라마 연기로 새해부터 어떤 파생 영상들이 만들어 지게 되는지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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