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129화.
* * *
“그러니까… 연기였다 다 이거지?”
“네, 언니 생각해봐요. 제가 어떻게 이나리 씨를 임신시키겠나요!”
차 안에서 시작된 오해는 집에 도착해서 풀게 되었다.
기획 아이디어와 토크 쇼 전체를 둘러본 언니의 눈꼬리가 다시 잠잠하게 변하는 것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애초에 방송 예능용으로 서로 좋아해 사랑해 하는 것도 있는데, 대놓고 연기를 하겠다는 환경에서 임신 이야기가 나오는 게 뭐가 어때서! 하는 심정이었다.
아무튼 기존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집 안에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방송 장비들을 커리어에 집어 넣었다.
이제 컴퓨터만 따로 분리하고 차 안에 실으면 이사 준비는 끝이다.
원래대로라면 일본의 이사는 한국에 비해서 몹시 비용이 비싸고 번거롭다고 한다.
그만큼 서비스도 확실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확실히 도와준다고 하는데…
그 비용을 듣게 된 나는 그냥 스스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렌트 하우스는 소파나 침대가 딸려있는 계약이었으니까 그렇게 큰 이사짐은 없었다.
나는 마지막 추억을 내 머릿속에 저장하려는 듯 집 안을 둘러보았다.
기숙사를 나와서 처음 살게 된 쉐어 하우스
코로나로 인해서 나만의 감옥이 되기도 한 이 집
옆방의 소음을 따지기 위해서 씩씩대면서 걸어갔던 복도
야밤에 코코아를 끓이고 이웃의 이름을 듣고 어색한 자기소개를 나누었던 부엌
빈약한 몸을 움직이게 하며 함께 운동을 한 거실
낮잠을 자고 미우와 함께 카드게임을 한 협탁
난생 처음으로 타인인 말리아에게 알몸을 보여주게 된 욕실
머리를 감겨도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언니를 앉히고 머리를 빗어주게 한 화장대
그 모든 추억을 여기에 내버려두고 나는 천천히 1층으로 내려왔다.
살짝 시큰해지는 눈가를 꾹꾹 눌러서 눈물을 달래고 있을 무렵,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짐을 챙긴 언니가 1층으로 내려왔다.
몇 번 우체국에 소포를 보내서 저렴한 가격으로 모든 이사를 마친 나는 언니가 자신의 컴퓨터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첫 만남에서는 초등학생과 자웅을 겨루는 체력 상태였던 언니가, 이제는 무거운 데스크 컴퓨터를 직접 옮기는 것을 보다니 정말 무언가가 벅차오른다.
저 언니를 내가 만들었어… 하는 심정이었다.
“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응? 아냐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어서 트렁크나 열어줘.”
난생 처음 하는 이사도 언니와 함께하니 무언가 수월하게 진행 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평소와 달리 묵직한 엑셀의 감각을 느끼며, 동네를 빠져나오기 전에 한바퀴 쑥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인사를 받아주시거나 내 차를 보고 손을 흔들 정다운 이웃들은 1월1일에는 다들 집에서 따뜻하게 구운 귤을 까먹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네를 한번 더 돌아보고는 빠져나왔다.
“시원섭섭하네…”
그래도 친하게 호감도를 쌓아올린 이웃들인데, 하필이면 우리의 이사 날짜가 요 모양이라 인사도 못하고 나온게 아쉬운 나는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쫑긋거리면서 그 말을 들은 언니는 어색한 발음으로 나를 따라하듯 말했다.
“시우언소부소부”
그 혀짧고 아기같은 발음에 나는 그만 엑셀을 세게 밟아버렸다.
다행히 신정의 도로답게 아무 차도 없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타면 큰일날 뻔 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한국어가 있다고?
난데 없이 들린 언니의 기습적인 한국어에 당황한 나는 힐끔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창밖을 바라보며 우와아 라고 감탄하는 언니의 연기를 본 나는 혀를 찼다.
올해 들어서… 아니 요즘 들어서 유난히 나에게 장난을 이것저것 시도하는 언니였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운전 중에는 아무래도 운전에만 집중하는게 좋다보니 나는 차에 내리면 꼭 운전 중에는 장난치지 말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유나야 밖을 봐, 또 눈이야!”
한 번 내린 눈은 이참에 도쿄의 시민들에게 출석 도장을 찍으려는 듯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아름다운 눈이 나무에 앉아내리기 시작하고, 본의아니게 눈을 맞은 새들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을 털어내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차를 세우고 그 자연의 낭만을 만끽하고 싶었다.
한국의 눈과는 다르게, 중국의 미세먼지와 황사를 열심히 막아주고 있는 대한민국 덕분에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은 강설(?雪)을 여러 번 보아온 나조차 감탄할만큼 아름다웠다.
달리는 속도를 늦추며, 완벽한 도쿄의 도심속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느긋하게 밖의 풍경을 즐긴 우리는 이윽고 이전에 보러 온 맨션으로 들어왔다.
비싼 땅값, 혹은 발전된 기술을 자랑하듯 높게높게 짓는 아파트와 달리 일본에는 잦은 지진 덕분에 높은 집을 짓는 경우가 잘 없다.
때문에 일본의 아파트는 마치 컨테이너 건물을 떠오르게 하는 투박한 건물의 형태가 많았고, 그 투박함과 구조상 차이 덕분인지 사회 초년생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2년 전에는 기숙사에, 작년에는 아주 좋은 품질의 공동 주택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본의 아파트 생활을 겪지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나 또한 일본 아파트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었다.
하지만 회사 복지 덕분인지, 사쿠라장이라는 일본 매체에서 자주 등장할만한 평범한 이름을 가진 맨션에 들어선 나는 따끈따끈한(?) 신형 맨션 특유의 설비를 보고 감탄하기 시작했다.
좋은 주차장 설비는 물론이고, 보안 키나 암호 혹은 지문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는 오토록 시스템은 기본이고 한국에나 볼법한 무인 택배 보관함이 갖추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쿠라 장(Sakura Court)라고 고풍스럽게 적힌 건물의 내부에는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좋은 정원이 갖추어져 있었고, 설마하던 바베큐 설비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 정도 주거 조건을 우리 연봉에 구할 수… 있기야 있겠구나.
뭐, 우리야 회사의 사택, 그러니까 집세를 지원받아서 싸게 구할 수 있었고
한 세대에 같이 살게 될 언니와 나는 그 싼 월세 마저도 더욱 싸게 낼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유나 인생, 집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얻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들은 이전에는 겉에만 둘러본 이 사쿠라 장을 세세하게 탐험할 수 있었다.
주거 계약서나 부동산 계약서 같은 업무는 진즉에 끝냈고, 남는 일은 주택에 들어서서 집안의 파손이나 흠집같은것을 발견해야하는 일, 그리고…
“상자, 상자, 상자!”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를 본 나에 언니가 비명을 내지르듯 가리켰다.
얼추 보아도 열 개가 넘어가는 거대한 상자의 사이에 들어선 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삿짐은 제법 되었다.
물론 그 양은 일반 이사를 하는 평범한 가정집보다는 작지만, 우체국에서 알음알음 보낸 소포들이 집 앞에 쌓여있는건 또 다른 압박감을 준다.
비록 우리들의 짐이 주로 옷과 생필품 정도였고, 주차장의 카트에 실어 온 우리들의 방송 장비가 전부였지만 아무래도 새해부터 이사를 하는 일을 하게 될거라 생각하지 못한 우리는 제법 고생을 하면서 집 안에 짐을 들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이전의 풀옵션의 쉐어 하우스와는 달리 가구를 하나하나 사야하는 이 집은 정말로 황량했다.
그래도 신축 건물 답게 새 집 느낌이 나는것도 좋고, 공사도 깔끔하게 마감 되어서 그런지 눈에 피로하지 않는 연한 녹색의 벽지가 가득 한 이 집은 둘러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혼자서 살다면 크고 둘이서 살면 조금 좁은 느낌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거실
거실은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식 식탁이 있는 부엌과 연결되어 있었고
넓은 개수대와 오븐과 식기세척기가 들어가도 괜찮을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있었다.
부엌을 지나서 나가면 밖을 나갈 수 있는 베란다가 있었다.
높은곳이 싫다는 언니의 의견에 따라 1층에 이사 온 우리는 베란다보다는 정원에 가까운 공간이 트여있었는데 추운 지금이면 모를까, 날이 풀리면 여기에 정원용 테이블을 두고 티타임을 가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거실과 복도 사이에는 화장실과 방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변기가 놓여진 말 그대로 화장실, 말린 몸을 닦을 수 있고 여러 화장용품을 둘 수 있는 화장대 공간, 그리고 샤워기와 욕조가 있는 목욕탕이 이루어진 이 근사한 공간은 반짝반짝한 마감재를 쓴 덕분인지 빛나고 있었다.
하얀 바닥에 비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 언니와 나는 솔직하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게 이전 집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욕조가 내 입장에서는 좁았고, 화장실에는 벗겨지지 않는 묵은 때가 있어서 조금 더럽다는 이미지였는데 이 집은 말 그대로 호텔의 화장실과 욕실처럼 깔끔했다.
아무튼 거실은 커다란 방과 작은 방으로 나뉘어졌다.
그 방을 본 나는 살짝 걱정했다.
만약 혼자 산다고 하면 커다란 방은 작업용 공간, 작은 방은 침실로 두면 적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살게 될 경우…
“침대를 큰 방에 하나만 두자.”
“에?”
“내가 작은 방 쓸게.”
당당하게 작은 방을 쓰겠다고 말하는 언니에게 나는 미안해졌다.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인데, 그래도 큰 방을 언니가 써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유나보다 작잖아. 그리고 내 게임과 콜렉션은 유나 방이 될 이 큰 방에 두면 되니까 괜찮아.”
“그… 그치만… 나이 어린 제가 작은 방을 쓰는 게…”
“뭐래? 내가 너보다 훨씬 작잖아.”
언니의 당돌한 발언에 나는 말을 잃었다.
확실히 나는 언니보다 크긴 하지…
묘하게 설득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작은 방이라고 해도 방송용 장비 두고 내 개인 물건들을 두기에 적당하기도 하고…”
언니는 큰 방에 달려있는 옷장의 문을 드르륵 열면서 말했다.
드레스룸이라도 구현을 한 듯 옷을 걸어둘 수 있는 조그마한 세 공간에 들어선 언니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내 옷도 여기에다가 보관하면 공간은 충분해.
속옷과 양말, 셔츠 정도만 내 방에 두면 되겠네.”
“그러니까 외출복 같은건 다 여기다가 두시겠다는거죠?”
“응, 어차피 외출 나갈때에는 유나가 나 꾸며줄 거 아니야?”
마치 나를 메이드 부리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평소에도 내가 알아서 언니를 꾸미는 걸 좋아하다 보니 나는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언니를 부담없이 쓰다듬고 껴안고 내 손에 예쁜 언니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솔직히 말해서 창작욕과 예술욕을 충족시키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누가 어느 방을 쓰고 무엇을 어디에다 둘지 모든 결정을 내린 우리는 입주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제 이 계약서를 부동산에 제출하고, 전입신고를 하면 모든게 끝난다.
기나긴 여정 끝에 지친 우리들은 아직 치우지 못한 상자가 가득한 거실에 주저앉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쉐어 하우스에 사는 이웃 관계였다면, 이제는 같은 집에서 살게 될 동거인이 되었다.
새 집으로의 이사리는 인생에서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이 기회는 언니에게도 무언가를 자극하는 게 있었는지 언니는 대뜸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유나야.”
이전의 언니라면 잘 하지 않았을 적극적인 의사표현에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이내 미소 지으며 언니의 손을 마주잡으면서 답해주었다.
“네, 잘 부탁드려요. 나에 언니.”
태어난 해도, 국적도, 모국어도, 자란 환경 모두가 다른 우리는 마침내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새해 첫 날, 이웃 사이에서 동거인이 된 우리들은 손을 마주잡으며 따스한 온기를 교환했다.
올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생활은 어떻게 될까?
두근거리는 새해의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