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140화.
* * *
성인의 날의 아침이 밝았다.
한국에서는 성인의 날이 없었기에 나는 신정의 일본 특유의 새해맞이처럼 일본 고유의 이벤트에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두근거린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나에 언니였다.
평소라면 나에 비해서 한참 늦게 일어나는 언니가 전날 밤 늦게 퇴근해서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나를 깔고 앉고 키스를 하는 식의 과격한 방법으로 나를 깨웠다.
나는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 졸린 눈으로, 언니는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마냥 나를 보채더니 나를 아침부터 부려먹기 시작했다.
어제 사람들을 만나서 시달린 탓에 다소 정신적으로도 지쳐있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겨우 외출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우려대로 언니의 유카타가 조금 작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졌다.
“살이...찐거야 나?”
“...아뇨 그렇다기 보다는... 근육이 붙은거에 가까워요. 솔직히 언니의 이전 체형, 그러니까 불꽃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샀던 옷은 후리소데도 아닌 유카타니까 뭐... 이참에 사는 게 어때요?”
“... 이 새벽에 파는 가게가 있을까?”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성인의 날을 미완인 채로 참여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성인의 날이 있는 시기에는 일본 전통 옷가게 또한 특수 운영 체제에 들어가는 모양인지 아침부터 후리소데를 판매하거나 대여하는 가게가 제법 있었다.
나는 최적의 동선을 계산한 다음, 언니의 머리와 화장을 세팅할 수 있는 도구들을 싹 챙긴 후 차로 향했다.
“유나야 미안해... 언니가 미리 입고 미리 준비를 해야했는데...”
“아뇨. 사실 성인의 날 이벤트에 참여하자는 것도 즉흥적인 거에 가깝잖아요.
애초에 저희 사이에 이런 일로 미안해 할 일이 뭐가 있나요.“
“그, 그치만...”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언니의 입술에 내 검지를 올린 나는 그냥 미소지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침에는 그렇게 거칠게 키스를 하고는 이제는 이런 별거 아닌 일로 미안해 하는 것이 참 언니다웠다.
“언니의 행복은 저의 행복이에요.
언니가 누리지 못했던 당연한 일상들을, 한국인인 제가 겪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들을 함께 누려보자고요.“
“...응!”
“자자 얼른 출발합시다. 옷을 빌리던 사던 옷을 갈아입고 머리 세팅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얼른 가자구요.”
부릉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겨울 새벽을 뚫고 나와 언니가 탄 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켜두는 버튜버들의 방송 녹화본 대신에, 내가 찍어준 가게의 홈페이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원단과 디자인을 바라보는 언니는 뚫어져라 태블릿 PC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또한 운전에 조심하면서, 미우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일정을 조율을 마저 진행하였고, 우리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하쿠레이미야(???)라는 가게에 들렀다.
“어머나, 예쁜 여동생을 두었군요. 언니와 함께 성인식에 참여하러 오신건가요?”
새하얀 백발에 세월을 간직한 피부와 함께 인생을 보낸듯한 부드러운 녹색 기모노를 입은 할머니가 나오셔서 반기셨다.
“네, 이른 아침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올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성인의 날을 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지 다른 가게들도 사정이 비슷한 모양이더라구요.”
“언니, 생각해둔 거 있어?”
“응... 여기 이 검은 소재를 바탕으로 한... 흑백합(?白?)이라는 모델...”
누가 보더라도 언니와 여동생의 포지션이 뒤바뀐 호칭에 할머니는 잠시 당황한 듯싶었으나, 이윽고 우리들을 이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작은 여성분이 입으시는 것은 미나토마츠라라는 직인께서 개발하신 모델로 작은 아가씨처럼 단아하고 조그만 밤의 요정 같은 귀여운 여성분에게 어울리는 모델이지요.”
꽤 잘 나가는 모델인 듯, 그 모델은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다른 일본 의류 가게의 풍경에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뭔가 후리소데나 기모노라고 하면 다들 맞춤 제작을 해서 재단을 하고...”
“그런 맞춤 제작은 돈이 아주아주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재벌집 아가씨들이나 정치가문 아가씨들이 찾는 편이죠. 그보다 더욱 고급진 의류들은 화족(??)분들만 받는 직인(?人)들이 원단부터 맞춤제작을 하는 편이죠.”
벽에 걸린 화려한 일본 천들을 가르킨 할머니는 이윽고 반대편에 걸린 언니가 고른 모델처럼 사전 제작된 모델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죠. 고가의 후리소데나 기모노는 대여로, 직접 구매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큰 공방에서 제작된 옷으로 만들어진 모델을 구매하는 편이죠.”
잠시 말을 멈춘 할머니는 커다란 계산기를 꺼내서 탁탁 하며 숫자를 눌렀다.
“만약 이렇게 사전 제작된 모델이 아닐 경우, 이런 원단으로 옷을 맞춤 제작한다고 하면...”
계산기에 적힌 70만엔이라는 숫자에 나는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이정도 금액이 소모된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이대로 언니 옷을 잘 부탁드립니다!”
무섭다.
이래서 일본 드라마의 진짜 재벌집 사모님들은 무조건 기모노를 입고 나오는구나...
살짝 들여다 본 일본 의류의 세계는 무서웠다.
아무튼 내가 할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옷을 입고 나온 언니는 내 내면속에 남아있었던 졸음을 날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이고 세상에, 미안해요. 할머니가 수다를 떠는 사이에... 자, 아가씨 양 팔 벌려보세요.”
할머니는 언니의 옷 매무새를 세심하게 잡아주었다.
다른 밝은 색감의 천에 비해서 어두운 빛에 여러 송이의 새하얀 백합이 아름답게 천 위에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 자체를 백합으로 물들이는 듯 꽃은 사람을 한바퀴 감싸는 모델이었으며, 그 꽃에서 피어난 향기가 커다란 소매에 이어져 있어서 몸의 어느 각도에서 언니를 바라보아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었다.
내가 가져온 화장도구가 무색하게도, 할머니가 가게에 놓여져 있는 머리 장식으로 예쁘게 언니의 머리를 정리하자 나는 새삼스럽게 언니의 인형 같은 외모에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수줍음을 애써 떨친 채, 살짝 고개를 치켜 들어올리면서 조그맣게 ‘어때?’ 라고 말하는 언니의 그 모습에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뻔 했다.
가까스로 선반을 짚어서 쓰러지지 않는 나는 할머니에게 카드를 건넸다.
“이, 일시불로 부탁드립니다.”
“어머나.”
“그만한 가치가 있네요. 오기를 잘했어요.”
“네, 그러면 큰 아가씨는요?”
“네?”
나는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피부 사이에 번뜩이는 빛은 세월에 지친 노인의 눈이 아니라 백 번의 전쟁터를 해쳐나온 노익장의 눈이었다. 아니. 이것은 먹잇감을 늙은 사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유나도 맞추자.”
“네!?”
“나, 유나랑 비슷하게 차려입고 가고 싶어.”
거기다가 가해지는 언니의 ‘해줘’식의 말에 나는 정신적인 무장이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된다. 뭐라도 말을 해야했다!
“저, 저는 그 저기 저... 일단 저는 한국인이고 일단 저는 그...”
“할머니.”
문 쪽으로 슬금슬금 향하던 나는 할머니에 의해 손이 잡혔다.
뿌리칠수 없는 할머니의 억센 손에 나는 식겁했다.
아니 이건!
“마침 마루타마 백화점에서 새롭게 출시한 300년 공방에서 제작된 디자인 모델이 있는데... 작은 아가씨가 입은 검은 빛 후리소데와 참으로 짝으로 어울린답니다?”
“할머님, 그 말씀은 일종의 커플룩이라는 거죠?”
“물론이죠. 두 아가씨에게 참 잘 어울릴거에요.”
“저, 저기 구매자인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라는 말과 함께, 나는 결국 언니와 비슷하게 후리소데를 입은 채로 가게 밖을 나오게 되었다.
먼지가 묻는 게 걱정일 정도로 새하얀 후리소데, 의외로 때와 먼지가 잘 묻지 않는 생활 소재를 썼다고 할머니가 대답해주셨는데... 아무튼 간에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난 나는 멍하니 차의 시동을 걸었다.
“유나야 왜 그래? 어울린다니까.”
“그... 그게 아니라 할머니의 눈빛이 무서워서요.
마치 저승사자가 찾아와도 영입을 할 것 같은 분이시네요.“
그야말로 홀린 듯이 구매한 후리소데
가벼운 가격은 아니었기에 예상 외의 지출에 나는 조금 민감했지만...
뭐 어떨까, 언니와 같은 시간 비슷한 커플룩을 입고 보내는데 30만엔? 나쁘지 않다.
어제의 실적 발표회의 든든한 숫자 파티 이후 나는 그래도 저금만 하던 돈을 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코로나 때문인지 이번 성인식은 굉장히 넓은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평소에는 거리 공연을 하는 이 거대한 공원에는 성인식을 맞이하기 위한 지자체의 사람들이 방역을 지킵시다라는 표어를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은 10시, 현재시간은 9시 반
아침일찍 열심히 움직인 보람이 있게, 우리들은 정장과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마스크를 써도 알아볼 수 있는 연예인들이나 아이돌들을 취재하는 카메라도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런 사람들을 지나쳐 미우와 보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언니들 여기에요 여기!”
사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의 장소에 가니 거기에는 자신의 머리색과 어울리는 화사한 오렌지빛 후리소데를 입고 있는 여성이 펄쩍펄쩍 뛰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미우의 모습은...
잠깐
저거 미우 맞아??
파릇파릇했던 고등학생은 어디가고, 어디 대학생 신입생처럼 고등학생과 확실히 다른 발육과 한층 더 성장한 키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우는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영화에 나오는 성장 촉진제라도 맞은 듯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올려다 보던 미우가 이젠 나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녀가 아닌 여인이 된 미우는 왠지 모르게 낯설게 다가왔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 번씩 돌아볼만한 미인이 된 미우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채 다정하게 걸어와서 나와 나에 언니를 동시에 껴안았다.
“언니들 너무 예뻐요!”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 짓는 미우의 아름답게 화장된 얼굴은 이전과는 다른 매력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