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2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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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중학교 시절의 학교는 날카로운 면도날로 도려진 듯 흐릿한 기억만 가득했다.
그도 그럴게, 당시에는 아이돌 연습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라는 장소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공부에도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학교에 오면 자기만 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에게는 ‘날라리’라고 찍혔지만 그래도 그 날라리 유나가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대형 아이돌 기획사의 연습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뭐 대놓고 나를 불량아 취급하는 일은 없었다.
교사들의 간섭 없이 보장된 수면시간,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정식으로 대형 아이돌 기획사의 연습생인 나에게 귀찮게 집적거리는 남자애들은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뭐 나름 평안하게 보낸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일까, 사립 중학교들 중에서도 한 손안에 꼽힌다는 오차노미즈 여자중학교를 방문한 나는 감수성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생각하는 후줄근한 오래된 건물의 중학교 건물이 아닌, 만화에서나 볼법한 현대식의 수려하고 깔끔한 외관을 지닌 중학교의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 학교보다 건물이 더 세련되어 보였기 때문일까?
후줄근한 후드에 조깅 바지를 입고 들어가기에 너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런 누추하신 분이 귀한곳에 오시다니...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여기 들어와도 되는 거 맞아?”
이건 뭐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도 아니고, 중학생 애기들이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게 부끄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세수하고 눈곱이라도 좀 떼고 나올걸
휴가의 분위기에 취해서 너무 대충살고 말았다.
“에이 언니 괜찮아요.”
그런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츠무기는 해맑게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나를 끌고 갔다.
원래 이런 곳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라고 엄격하게 말하는 경비 아저씨가 제지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의외로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그렇게 후드티에 조깅바지를 입은 동네 백수 패션을 한 한국인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일본의 여자 중학교에 들어왔다.
성인인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한데, 대문을 넘어서고 건물에 들어온 순간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방학임에도 느껴지는 아이들의 활기가 전염된다고 해야할까?
한국 애들이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입고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녀들 또한 교복을 예쁘게 접어 올리거나, 아니면 부 활동용 간편한 옷들을 입은 체 활기차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랄까, 한국 아이들에게 ‘방학때 학교 나오렴’이라고 하면 ‘날 죽일셈이야?’ 라는 얼굴로 바라보겠지만, 일본의 아이들에게 ‘방학 때 학교 나오렴’이라는 건 조금 다른 의미인지 생기 가득찬 얼굴로 애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나도 그들의 분위기에 중독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학생들이 많이 나오네?”
“네, 이번에 도쿄 올림픽이 내년으로 연기 되면서, 그동안 걸어 잠궜던 학교 문들이 열리게 되면서 애들이 많이 왔거든요.”
공부에 대한 압박이 심하지 않는 환경이라면, 학교라는 공간은 젊은 학생들의 소중한 커뮤니티 장소다.
온라인으로서는 나눌 수 없는 페이스 투 페이스만의 공기라고 해야할까?
서로의 섬세한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고 카메라로는 알기 어려운 서로의 향기나 손짓 등으로 비언어적인 소통을 나누는 건 정서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구나...”
“네, 저도 전학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뭐랄까 여기 학교에는 유독 방학 때 학교에 놀러오는 친구들이 많은 모양이네요.”
“응!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어머니들이 지겨운 학원에 보내지 않으시거든!
우리야 뭐 학원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캬피캬피하게 노는게 좋지!”
유독 입이 근질거리는 티를 내는 츠무기의 친구로 보이는 금발머리 여학생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츠무기 양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야카와 시오리라고 해요.”
“츠무기의 이웃인 김 유나라고 해요.”
하야카와 양은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었던 내 손을 꽉 쥐었다.
그 태도에 살짝 당황한 마음이 들었는 데, 그녀의 초롱초롱한 두 눈을 보니 차마 떨쳐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언니 진짜 아이돌 아니시죠? 제가 알기론 유나라는 이름을 쓰는 한국의 아이돌은 없는 데 말이죠.”
“어... 응, 나는 아이돌이 아니야.”
버츄얼 아이돌이지...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꼭 누르며 나는 가능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 태도가 그녀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는지, 안 그래도 반짝거리는 두 눈이 더욱 빛나는 게 느껴졌다.
오타쿠들이 말하는 인싸의 삶을 살아온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동경하는 사람이 보이는 선망의 열기였다.
나는 그녀를 모르는데 그녀는 츠무기를 통해서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기분 나쁘게 느껴질 그런 정보의 괴리였지만, 이름을 막 알게 된 중학생이 나를 이렇게 동경한다는 것은 의외로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하야카와! 언니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하지만 이렇게 잡지에서 툭 튀어나온 예쁜 언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게 드물잖아! 언니! 진짜 예쁘다! 화장품 뭐 써요? 세상에, 탈색을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했어요? 언니 입고 있는 후드 되게 한국 드라마에서 나올 법만한 거다, 언니도 그 동대문이라는 곳에서 쇼핑을 한 건가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국뽕을 빼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해도 현재 일본의 10대들, 특히 중학생과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한자를 한국어로 발음하는 한국식 이름’을 아는 게 유행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어린 학생들 사이로 한류가 강하게 와닿았다고 한다.
이렇게 유행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미우를 통해서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고등학생 3학년인 미우가 보이는 반응과 중학생 1학년? 2학년?으로 보이는 하야카와 양이 보이는 반응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나름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방송인이 되어서 그런지 이전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인 이런 타인의 열성적인 반응이 이제는 우쭐한 마음이 들 정도로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거대하고 순한 골든 리트레버가 눈앞에서 꼬리를 흔든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나는 이 활기찬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학교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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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카와 시오리는 느닷없이 전학을 온 이나바 츠무기 와 이렇게 친하게 지낼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야구부 매니저인 자신과 전학을 오자마자 육상부의 에이스를 차지한 그녀와의 접점은 같은 반이라는 점과 운동부 계열의 부활동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읽고 있던 패션 잡지에 써진 한국어를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을 때 그녀가 지나가듯 정확한 발음을 알려줄 때, 그녀 또한 자신처럼 한국을 좋아하는 ‘유행을 잘 따라가는 센스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 후 반장이라는 이유로 화장실을 갈 때조차 그녀와 함께 꼭 붙어 다니게 되었다.
사실 사설 초등학교 때부터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올라가는 오차노미즈 중학교에서 전학생이 적응하는 것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명문 중학교라고 할 수 있는 오차노미즈 중학교에 전학을 온 아이들은 강해 보이려고 지나치게 거만하거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이거나, 아니면 같은 학생 주제에 자신감이 주눅 든 채 기를 펴지 못하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었기 때문에 츠무기처럼 담담하게 지내는 학생은 보기 드물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같은 중학생이 보더라도 상당히 침착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뚝뚝한것도 아니고, 다른 학생들처럼 감정 표현을 활발하게 하고, 넥타이를 매는 법이나 교복을 교칙에 어긋나지 않게 적절하게 옷을 가다듬는 법, 머리에 차는 액세서리를 고르는 센스나 매일같이 잘 관리된 구두를 신고 오는 편이다.
그렇다고 치장에만 정신이 팔려서 학업을 등한시하는 날라리도 아니었고, 가냘파 보이는 몸에는 튼튼한 근육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잘 챙기는 모성스러운 무언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녀와 알면 알수록 점차 더 빠져들게 되었다.
침착한 사람됨, 과하지 않는 센스,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착한 척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일본인이 아닌 츠무기는 그야말로 자신의 단짝 같은 친구였다.
까불거리며 경망 되게 행동하고 세상만사 자신감 가득 찬 행동으로 살아가는 어디의 누군가에 비해서 츠무기는 그야말로 여신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차분한 츠무기가 드물게 감정을 극적으로 발산하는 때가 있었으니 ‘예쁘고 활기차지만, 너무 활기차고 자기 일에만 열중해서 돌보기 피곤한 언니’와 ‘이웃에 사는 닮고 싶어 하는 멋지고 예쁜 한국인 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떄였다.
특히 하야카와는 한국인 이웃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츠무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유나라는 한국인은 요즘 ‘좀 아는’ 여자아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멋진 한국인 언니’에 대한 인터넷 이야기 그 자체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츠무기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키워갔던 그녀는 츠무기의 이웃을 보기 위해서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위한 17가지의 계획을 짜고 있는데, 그런 소문의 이웃을 우연히 보게 된 하야카와는 말로는 사람을 알 수 없다는 옛말을 믿게 되었다.
듣자하니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해외 업무를 하는 엘리트 직장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밤낮이 뒤바뀐 삶을 살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 탓인지 처음 멀리서 본 그녀의 몰골은 집에 어슬렁거리는 자신의 친언니 같은 친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염색물이 빠지면서 신비롭게 그라데이션이 그려진 머리카락, 수면 부족임에도 처짐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운동부 매니저가 감탄할만한 근육 상태, 화장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천연 미인의 얼굴상,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감출 수 없는 타고난 카리스마를 보고 있자니 인터넷에서 가끔 떠도는 ‘한국 아이돌들의 일상 사진’을 찢고 나온 듯한 미모였다.
저런 우상(Idol)이 옆에 살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게 되겠지?
어쩌면 츠무기가 다른 운동계 여자아이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됨을 가진 것이 저 사람때문이 아닐까?
성인 여성 따위 나이 많이 먹은 아줌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편견을 부수는 우아하고 자신감 넘치는 유나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온갖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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