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216화 (216/307)

〈 216화 〉 215화.

* * *

선라이즈 5기생들은 약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 뒤처지지 않고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선라이즈는 버튜버 프로덕션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본을 자랑하고, 버튜버들 또한 일년에 한 번 모집할까 말까 할 정도로 채용이 뜸한 편이었다.

물론 예전이라면 모를까, 3기생부터 들어가는 기준이 엄격해졌고 4기생부터는 1000:1의 경쟁을 뚫고 와야 한다거나, 전생에 30만 구독자 이상을 달성한 방송인이어야 한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문도 돌았고, 선라이즈 GB의 대성장 이후로는 누구나 인정하는 업계 최대 규모의 회사가 되어서 입사의 문턱은 더더욱 높아졌다.

코로나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일본 인터넷 방송 시장에서 가장 주목 받는 유형의 인터넷 방송인들은 버튜버들이었고,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 4기생의 입사 경쟁률은 2000:1 내지는 2500:1이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만큼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뽑힌 후, 그에 걸맞는 버튜버에 관련된 교육을 시킨 후 투입된 만큼 그녀들의 실력 또한 알아주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기존의 캐릭터성과 방송 스타일이 확고하게 정립된 선배들과 함께 방송을 하면서 이름도 알릴 수 있었다.

그것 이외에도 같은 일러스트레이터나(어머니) 모델러(아버지)를 두었다는 식으로 버튜얼 캐릭터간 혈연관계나, 선라이즈 특유의 기수제를 이용한 선후배 관계 같은 고유의 캐릭터성이 드러날 수 있었다.

심지어 선배, 후배 관계는 물론이고 동양의 엄격한 기준의 형과 아우에 성립하는 장유유서 정서가 없는 서양의 시청자들도 이런 선후배 관계성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라이즈의 새로운 버튜버들이 기존의 선배들과 합동 방송을 하는 날에는 이런 것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리아는 5기생들의 선배인거야 후배인거야?

­데뷔한 날짜가 한참 후인데 당연히 후배 아니야?

­그런데 메이드 라는 5기생들 데뷔 방송 이전에 나타났잖아

­그건 전생 아니야?

­응 아니야, 메이드 씨 퇴근하면 숨긴 꼬리 풀고 아리아 모습으로 노래부르고 다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아리아는 선배들을 덕질하기로 유명한 버튜버 오타쿠 기질이 다분한 버튜버였다.

기존의 일본 소속의 버튜버들이나 GB 소속의 버튜버들에게는 선배 선배 거리면서 애교를 부리면서 엉겨붙기로 유명한 아리아는 여태껏 4기생들과 합동 방송을 가진 적이 없었다.

메이드는 4기생들의 선배고, 4기생은 아리아의 선배다.

어찌 보면 족보가 꼬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녀들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아리아와 헤카테의 합동 방송에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목도하라! 헤카테님이 깨어나셨다!”

힘찬 대사와 함께 중2병 소녀 설정을 지닌 꼬맹이 마녀가 힘차게 방송 인사를 날렸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방송 한 켠에 조잡하게 확대해둔, 그러니까 헤카테 크기 만한 자루 포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자신을 놀리려고 드는 채팅창의 말썽꾸러기 팬들과 티격태격 거린 헤카테는, 씩씩거리던 표정을 지우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주 진귀한 동물을 사로잡았지!

감히 헤카테님의 영토를 겁 없이 거닐던 건방진 여우 한 마리를 말이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헤카테가 자루를 치웠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을 물린(물론 조잡한 합성이다)아리아의 모습이었다.

누가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아리아는 웁웁 거리면서 울음소리 비슷한 음성을 내었다.

“그...러니까 여우...”

“웁웁웁!”

“여우...잡았는데...”

여우를 포획했다고 말하는 헤카테의 말과 다르게

아무리 봐도 왠지 유튜브에서 노란 딱지를 때릴것만 같은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자 헤카테의 두 눈동자에는 소용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일단!”

잠시 후

두 손과 두 발이 묶였던 포승줄이 풀어지고, 입에 물린 재갈을 치운 구미호 아리아가 상처받은 여우의 표정을 지었다.

“선배를 보려고 선배가 계신 곳으로 왔는데... 다짜고짜 저를 폭행해서 기절시키고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시다니... 흑흑.”

평소에 하던 인사도 하지 않는 채

상처받아 눈물 연기에 들어간 구미호 아리아는

문자 그대로 여우였다.

과장스러울 정도로 울먹이면서 흑흑거리는 연기

하지만 원 바탕이 되는 보이스와 예쁜 구미호의 아바타로 애절함이 뚝뚝 묻어나오게 한탄하는 아리아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평소에 의젓함하고는 선라이즈 소속의 버튜버의 청초함만큼이나 거리가 먼 헤카테는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그 말이지! 그러니까 우연히!”

“그러니까, 우연히 후배에게 기강을 잡고자 다짜고짜 폭행을...?”

“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본 건 분명히 여우였고! 내가 붙잡은 건 네발로 기는 여우였단 말이야! 정신 사나우니 꼬리 흔들지 마!”

“그, 그러니까 네 발로 기는 플레이를 더 선호하신다는 말씀이시죠?”

하지만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요망한 연상의 후배가 헤카테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헤카테가 변명을 하면 할수록, 아리아가 그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어떻게든 헤카테를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듯한 대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촉촉한 목소리

아리아가 이전에 한 번 도전했던 심야 ASMR 방송에 했던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애절한 목소리가 방송에 이어졌다.

물론 그때와 다르게 이번의 목적은 시청자들을 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 선배인 헤카테를 놀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련한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장난기가 감돌았다.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에 방송의 수위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졸지에 후배의 손발을 묶고 변태짓을 강요하게 되어보이는 선배가 된 마녀 헤카테를 구원해준 것은 그녀의 친구인 루미에였다.

“선배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얏.”

사자를 연상하게 하는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방송 화면에 갑자기 나타난 루미에는 시청자들의 귀에 똑똑하게 들릴 정도로 아리아의 이마에 강렬한 딱밤을 때렸다.

“루미에!”

“헤카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후배에게 놀림 받아서야 체면이 서질 않잖아!”

한쪽은 천방지축 중2병 꼬맹이 리더, 다른 한쪽은 하극상 기질이 다분한 야심가 부하인 캐릭터 컨셉 덕분에 평소에 화합하기 보다는 티격태격 하는 라이벌 기믹이 강한 두 캐릭터였지만, 선배로서의 위엄이 추락하는 것을 보다 못한 루미에의 깜짝 난입에 아리아에게 완벽하게 넘어갈 것 같던 방송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 그치만 선배님들이 귀여운 걸 어떻게 해요?”

“키 크다고 어리게 보지 말란 말이야! 이쪽은 선배라고 선배! 헤카테 기죽지 마!”

­쉽지 않네ㅋㅋ

­하필 오늘 합동 방송으로 나온 게 헤카테와 루미에라니, 두 사람으로는 이기기 어렵잖아ㅋㅋ

­하다 못해 샤토라나 사나에가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꼬맹이s 들이 나오다니ㅋㅋ

­선배의 위엄, 카리스마 (폭소)

­확실히 4기생들과 5기생들 대하는 태도가 다르네...

“너 우리 방송에 나타나고는 인사도 제대로 안 했잖아, 어서 우리들의 시청자들에게 인사부터 하라고!”

“네, 안녕하세요? 선라이즈 GB의 프로젝트 드림의 구미호 아리아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기가 세다기 보다는 능글맞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었던 아리아와 칠칠하지 못한 리더 헤카테 대신에 5기생들을 이끌어나가는 이미지가 강한 루미에의 등장으로 인해서 방송의 주도권은 루미에에게 넘어갔다.

사실 넘어갔다기보다는 어린아이의 요구에 어울려주는 듯한 태도에 가까워서 ‘살짝 건방진 여우 후배’의 입장이 된 셈이지만...

아무튼 아리아는 5기생을 선배라고 부르는 식으로 협의를 본 듯, 본격적으로 방송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어서 선배님들 볼 겸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요,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어라, 아리아의 매니저 씨가 언질해둔 부분이 없는 거야?”

“네?”

“들어봐, 헤카테는 숲 속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마녀란 말이지?”

“네, 쓸쓸함을 잘 느끼는 헤카테 선배님이 다른 동물 친구들을 마법을 부려서 인간으로 만든 다음 선라이즈를 점령하기 위해 찾아온 걸로 알고 있어요.”

“나 외톨이 아니거든! 아무튼! 요는 숲속에서는 돈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 없는 약육강식의 사회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돈이 없어.”

“네...?”

어찌 보면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였으나, 이미 준비해둔 게 있다는 듯 헤카테가 초창기의 당황함을 싹 지운 위엄넘치는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의 부하의 이름을 불렀다.

“루미에!”

“자, 여기있어.”

그와 동시에 방송 화면에 복면에 세 개 등장하더니 버튜버들의 얼굴을 가렸다.

헤카테 방송 특유의 손으로 직접 그린 조잡한 복면이었지만, 의외로 어울렸다.

“에???”

“우리는 지금 은행을 털러간다.”

“선배의 위엄을 보여주도록 하지!”

그와 동시에 웅장한 게임 사운드가 들려왔다.

잠시 암전되었던 화면이 밝아지면서 영어로 된 타이틀이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다.

페이데이 2

4명이서 은행을 털러가는 FPS와 RPG 요소가 섞인 게임이다.

2013년에 출시 된지 꽤 오래된 게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장비로 무장을하고 은행을 털기 위해 범죄 계획을 세우고,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작전도 정할 수 있고 은행털이에 위협이 되는 감시 카메라나 경찰을 따돌리거나 부수고 제압하면서 현실적으로 은행을 터는듯한 특유의 재미가 있었기에 출시 후 꽤 인기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었다.

높은 동접자 수를 이루는 FPS 게임은 좋은 방송 소재가 된다.

하지만 명백히 아이돌을 표방하려고 하는 선라이즈의 버튜버들이 은행털이라니?

명백한 아이러니에 당황한 아리아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선배! 우리는 아이돌이잖아요!”

“아이돌의 자금 마련을 위해서 다 이러는 거야.”

“그, 그렇군요... 라고 대답할 것 같나요?”

“에? 아이돌이 은행을 털면 문제가 되는거야?”

헤카테의 캐릭터가 복면을 뒤집어쓰고 총을 만지작거린다.

옆에서는 익숙한 듯 루미에가 드릴과 널빤지, 열쇠 꾸러미와 빠루라고 불리는 쇠지렛대를 챙긴다.

“소문의 후배가 총을 그렇게 잘 쏜다면서?”

“아아, 믿을게 아리아 후배!”

게임을 켜면서 두 사람은 아예 다른 캐릭터가 된 것처럼 영화에서 나오는 악당같은 목소리를 흉내내며 터프한 어조로 아리아에게 말했다.

“어디보자, 초보자의 장비는...”

“스킬은 이렇게 맞추자, 후배의 총 솜씨나 좀 보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범죄 현장에 가담하게 된 아리아의 절규 어린 비명을 아무렇지 않게 흘리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는 아리아에게 ‘문제없어’라고 말한 두 선배는 능수능란하게 은행 털이 계획을 진행하게 되었다.

마치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피아들을 도와주게 된 불쌍한 시민처럼,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아리아가 처음의 요염하고 능글맞은 태도는 쓰레기통에 버린것처럼 당황한 스탠스로 계속 말했다.

“이, 이건 제가 생각한 합동 방송이 아닌데요? 분명히 아이돌!”

“쉿, 작전에 돌입한다.”

그 말과 함께 선라이즈 5기생 버튜버와 선라이즈 GB의 버튜버가 기념비적인... 은행털이가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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