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223화.
* * *
있을 때에는 모르다가 없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느껴진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유키하라 언니가 나에게 딱 그런 존재인 거 같다.
처음에는 그깟 운전 면허가 뭐길래 합숙까지 한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운전 면허 시험 문제 예시들을 보고, 한국처럼 조금 가벼운 마인드로 도전했다가는 꽤나 피눈물을 흘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의 운전 면허와 다르게 일본의 운전 면허는 시험이 굉장히 빡빡하다고 볼 수 있었기에 합숙을 마냥 수학여행처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래도 언니가 실기를 다 외우기 전 까지는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기에도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까닭에 나는 아쉬웠다.
그래도 당분간은 일을 새로 크게 키우지 않고, 성우 교습소에 다니면서 목소리 튜닝(요시노 여사님은 내 목소리 조정을 이렇게 부르신다)을 하는 위주로 하고
그 튜닝이 끝난다면 당장 ASMR 방송에 도전해서 다시는 ‘아리아 형님’소리가 나오지 않게 제대로 교육시킬 예정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콘텐츠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하고 있자니
언니의 100만 구독자 이벤트를 어떻게 해주지?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어디 근처 비싼 레스토랑이라도 데려갈까?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일단 언니에게 오늘은 제대로 축하인사를 전해줘야지하는 굳센 결의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
[땅]
문을 열자마자 폭죽소리가 나를 반겼다.
어두웠던 집 안에 불이 켜지며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나를 반겼다.
“어?”
“유나 언니 생일 축하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붙었으나 집은 여기에 구해두고 오리엔테이션에서 코로나에 걸려서 병원에 있는 줄 알았던 미우가 나를 반겼다.
“미, 미우?”
병원에 있는 줄 알았던 애가 갑자기 나를 보러 오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히 퇴원까지는 한참 남은걸로…
“후후후.”
마치 이 모든 일의 배후라는 듯 게임에서나 볼법한 악역 같은 포즈를 짓고 웃음을 터트린 이나리가 그녀의 하얀 머리를 꼬면서 나에게 미소지었다.
아, 이나리 너란 사람은 도대체!
그리고 이나리에게 정신을 팔린 사이
나는 나를 노리는 사악한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엇? 하는 사이에 다가온 나에 언니가 조그만 케이크를 내 얼굴에 그대로 덮어버렸다!
세상에 이런 생일 빵 문화라니!
당황함 반 분노 반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언니를 노려다 본 나는
‘헤헤’하고 웃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화도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다들 이러던데.”
“그거 어디서 배웠어요?”
“응? 한국 드라마와 뮤직 비디오.”
“푸하하, 유나 씨 엉망이네요!”
해맑게 웃은 언니 뒤로 그리우면서도 반가우면서도 왠지 보기 싫은 유메미 씨가 나타났다.
늘 말하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미인이지만
섹드립이 끊이지 않는 재앙의 주둥아리와 촐싹대기로는 저기 쇼파 위에서 바운스 점프를 하는 중학생 호시무라도 한 수 접어줄 행동거지에 나는 한숨이 나왔다.
“뭐야 그게! 생일 축하하러 온 사람에게!”
상처받은 척 눈물을 찔끔 흘리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거 다 가짜 눈물이니까 말이다.
나는 과격한 생일빵(…)문화에 다소 겁먹은듯한 츠무기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후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언니의 100만 구독자를 축하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면서 집에 왔는데
정작 축하는 오늘이 생일이라는 걸 방금 기억해낸 까닭에 지금 축하를 받고 있는건…가?
뭐랄까…
생일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는 나는 이런 것이 너무 서툴렀다.
그게 서프라이즈 파티의 본질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전개 이런 구도는 너무나도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익숙해진 언어가 된 낯선 땅에서, 가족에게서 받아 본 환대보다 더 큰 환대를 받은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런건 너무하잖아…”
이 조그만 집에 용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행이게도, 이 말은 한국어로 내뱉았다.
주방에서 서투른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굽고 있는 츠유
제집 안방인것처럼 소파에 드러누워서 이쪽을 향해 씨익 웃고 있는 사토 카가
그런 카가의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샤야 카기
뒷감당은 생각하지 않고 벽에다 ‘Happy Birthday’라고 적힌 문구를 테이프로 붙이는 유메미 씨
익숙한 동작으로 냉장고에서 온건한 케이크를 꺼내는 이나리
인사조차 하지 않는 채 초조한 눈빛으로 오븐에서 막 꺼낸 파이를 잘라보는 말리아와 그런 말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사히
크림으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주는 미우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을 자연스럽게 잔에 따라서 나에게 건네는 언니
일본에서 쌓아올린 인연들이 한 군데 모인 심정은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영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가 가슴속에 차오르게 했다.
너무나도 낯설고 서투른 경험인 까닭에,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았다.
“오늘, 언니 100만 구독자 축하를…”
그 말을 들은 언니의 두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이윽고 장난스럽게 휘었다.
“얘들아! 유나가 헛소리한다!”
그것은 절대 군주 국가에 떨어진 지엄한 왕명보다 거룩한 힘을 가졌다.
나와 언니의 집을 제각기의 형태로 혼란스럽게 꾸며내던 그녀들이 왕명을 받드는 병사처럼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윽고 나의 사지를 제압했다.
“일과 타인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챙기지 않는 못된 유나에게 벌을 내리자!”
“술! 술! 술!”
상황에 따라서 인터넷으로 즉흥 연기를 자주 하던 버튜버답게 그녀들은 순식간에 언니가 원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뮤지컬 배우들처럼 익살스럽게 화려하게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움직인다.
그녀들의 애정이 가득 담긴 성난 손은 기어코 나에게 술을 들이키게 한다.
술의 쌉싸름한 쓴맛과 과실주의 달콤한 향, 그리고 그 술을 더욱더 맛있게 하는 그녀들의 애정과 배려 덕분에 나는 홀린듯이 연거푸 술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습게 보인 모양인지 언니는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에 여기에 모인 모두를 움직이는 언니는 말 그대로 여왕이었다.
“하지만 얘들아 잊지 말자! 오늘 이 파티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생일을 숨긴 고약한 유나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선라이즈의 자랑스러운 골드 버튼의 소유자에게 아직 축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하얀 여우의 고약한 선동에 혁명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할 것을 지시했던 여왕은 잠시 후 나와 똑같이 술을 강제로 들이키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뭐…
100만 구독자를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끼가 많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 여럿 모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소란이었으나
그 이웃들이 내 집에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좁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면 불쾌지수가 높아진다고 하던가
하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것은 결국 어깨를 부딪히며 친근감을 나타내는 무언가가 되었다.
처음 보는 사이건, 아닌 사이건, 애초에 버튜버라는 직업 자체가 소통을 하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재능을 요구하는 직군이라 그런지
코로나로 인해서 오프라인 콜라보를 잘 하지 않았던 여러 사람들이 모이면서 나의 생일 파티와 언니의 100만 구독자 달성 기념 파티를 겸하는 이 서프라이즈 모임은 이윽고 오타쿠들끼리 모인 친목의 장이 되었다.
“이나리 선배님은 진짜 하얀색 머리네요?”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잘거리는 듯한 미우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응, 이 머리카락은 유전의 일종인가봐. 가끔씩 발현되는 머리카락이라고 하더라고.”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듯 생각을 도통 알기 어려운 이나리 선배가 대답했다.
“으가가각! 아파! 근데 시원해!”
“이것이 독일식 치료법입니다. 센빠이.”
허리가 아픈 카가에게 거칠게 안마를 하는 아사히가 뜬금없이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헤, 헤이 아이 캔트 스피크…”
“카린 선배, 저, 저 일본어 잘해요!”
“아 그래? 짜샤 그럼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렴.”
대다수의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 공포증 비슷한 반응으로 말리아를 처음 만나본 유메미 씨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이런 구도에 익숙한 듯 제 언니 옆에 꼭 붙어서 파이를 오물거리는 츠무기와 그 옆에서 카기 씨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혼란속에서 집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와 언니는 음식이 묻고 술로 달아오른 얼굴을 서로 마주보며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바보, 왜 생일 이야기를 안 했어?”
술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듯 언니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아시다시피 오늘이 4월 1일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말해도 애들이 안 믿어주었고, 이 날은 예전의 ‘그 사건’이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고, 대학생 시절에는 갓 일본에 넘어와서 정신이 없어서 챙기지 않았는데 그게 이렇게 된 기분이 드네요.”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이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지 나는 있는 그대로 술술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이 제 생일인 거?”
“아, 유나의 매니저인 유키하라씨가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았어.”
“아….”
오늘 낮에 만난 유키하라 언니의 모습이 슬쩍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런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도 나에게 일언반구 없이, 표정의 변화없이 평소처럼 대했다…이거지?
정말 기가 찬다.
따지고 싶어도, 지금은 운전 연수를 위한 합숙에 들어갔으니 따지지도 못한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당한 셈이었다.
“뭐랄까, 오늘은 정말 생일이라는 자각 없이 언니를 축하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사소한 축하는 없어도 괜찮아. 유나는 나의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준 사람이니까, 곁에만 있어도 행복한걸?”
“…언니.”
“나에게 있어서 유튜브 골드 버튼 보다도 유나가 이렇게 내 옆에 있는 게 축복인 셈이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바보처럼
마치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연적이고 운명적이면서도 우스운지
술로 인해서 말랑해진 두뇌와 겉잡을 수 없게 된 감정을 가지게 된 우리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생일
누군가가 태어났음을 축하하는 날이다.
하지만 4월1일이라는 만우절에다가 학기가 4월 1주차부터 시작되는 일본 대학의 특성 상 잘 챙기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연습생을 그만두게 된 그 사건이 일어났던 까닭에 내가 태어난 날을 그닥 신경쓰지 않게 되었기에 나는 이 날을 무의식적으로 기피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이제는
언니의 100만 구독자를 달성하는 날…다음 날 정도로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별로 의미 없던 날이, 좋아하는 사람의 대단한 업적을 기념할 수 있는 날에 가깝다는 사실이 되었기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행복한 생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