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234화 (234/307)

〈 234화 〉 233화.

* * *

길고 길었지만, 마침내 이 순간이 왔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내 앞에 도착한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마이크는 아니었다.

머리에 붙이는 헤드셋도 아니었고, 음악 방송용 녹음을 위한 고급 기술이 들어간 방송용 마이크도 아니었다.

작고 귀여운 역기처럼 눕혀진 H모양을 한 독특한 마이크는 마이크라고 보기엔 정말로 우습게 보이는 생김새지만… 무려 몸값이 50만엔이 넘어가는 초호화 마이크다.

비록 내가 직접 산 게 아니고 누군가에게 의해서 받은거지만…

“어때, 긴장되나요?”

현실에서 보다 방송에서 자주 들은 목소리가 내 귀에 장난스럽게 바람을 불면서 말했다.

긴장하고 있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꺅!”

“후훗, 귀여우셔라.”

“아, 정말 마녀님!”

평소라면 집에서 녹음을 했겠지만

생에 첫 ASMR 방송 데뷔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조건을 생각해본 결과 최고로 적합한 곳은 마녀님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선라이즈에 소속된 방송인들 중에서 ASMR 분야로 치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버튜버 이전에 인터넷 방송인으로서 많은 방송을 진행해 본 적이 있는 프로였다.

어떻게 해야 사람의 청각세포를 효과적으로 자극하는지

어떤 트리거가 사람으로 하여금 반사신경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지

시청자들이 어떤 음에 환호하고, 어떤 음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지

청각의 자극에 대한 피로도와 긴장상태를 이해하고, 어떻게 조율을 해야 할 지

이 모든 경험치에 있어서 마녀 선배야 말로 사람의 귀를 지배하고 매혹하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내 첫 방송은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후에는 그녀가 손수 요리해주는 요리를 먹고, 서로 가볍게 수다를 떨다가 방송 시작 1시간 전부터 강의에 들어갔고 나는 이 비싼 마이크가 대충 어떤 매커니즘으로 음을 전달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녀가 방송에 피해야할 행동과, 도입을 할 때 괜찮은 행동들을 여러 개 소개해주었고 나는 그녀의 가르침을 가능한 많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결과, 초보 ASMR 유튜버로서 괜찮은 시작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ASMR 방송도 결국 방송일 뿐이고, 제가 옆에서 지켜봐드리고 있잖아요?”

“역시, 그렇겠죠?”

“아까 연습대로 했던 대로 한다면… 유나 씨가 원하는 이미지를 터득하실 수 있을 거라 저는 믿어요.”

그녀의 나긋나긋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오늘 있을 일에 대한 압박감이 풀려지는 게 느껴졌다.

하긴, 나는 어떤 버튜버도 해내지 못한 TV출연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는데, 처음 해본다는 이유로 이렇게 긴장을 가진다는 거는 조금 이상했다.

좋은 연기는 적절한 긴장에서 나온다는 요시노 여사님의 엄격한 가르침을 떠올린 나는 방송 시작버튼을 눌렀다.

**

일반적으로 아리아의 ‘찐 팬’들은 어둠의 메이드 단에서 활동해온 사람들이 많았다.

유리아의 방송에 목소리로만 나온 메이드 라에게 열광했던 사람들이 보이던 관심과 사랑은 아리아로 훌륭하게 이어졌고, 이윽고 ‘메이드 라’의 팬들은 아리아의 오랜 덕질을 이어나간 스스로에게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오랜 팬이라 할 수 있는 베네딕트는 마침내 불안전한 회선의 일본 지상파나 유튜버들이 만들어둔 ‘아리아의 지상파 출연 모음집’영상이 아닌 생방송에 들어와서 몹시 기뻤다.

“여러분, 좋은 아침, 점심 저녁이에요. 다들 저 많이 그리우셨죠?”

오랜 팬인 베네딕트는 늘 듣던 아리아의 인사말이 다르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항상 활기차고 귀엽게, 듣는 사람이 힘이 나게 에너지 넘치게 말했던 그녀의 인사말이, 지금은 마치 속삭이는 듯 부드럽게 들린다.

긍정적인 에너지, 활기찬 태양과도 같은 에너지 대신 차분한 밤의 요람에 잠기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작하는 인사말은 물에 녹아내리는 설탕처럼 달콤하게 들어왔다.

“저의 앨범 발표 이후로, 저는 느닷없는 성공을 하게 되었죠.

해외에 계신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수 있겠지만, 일본에 있어서 저의 활동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방송국까지 나아갔답니다.”

그녀의 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방송을 볼 정도로 일본 문화와 정서를 알고 있는 이들은 일본의 공중파에 출연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이들은 그녀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러면서도, 어찌 보면 서브 컬쳐라고 볼 수 있는 버튜버 문화에서 그녀가 정말 메인으로 데뷔를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때문에 베네딕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에게 많은 제안이 왔어요. 저에게 보다 폭넓은 기회를 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여러 제안을 해왔고, 저와 선라이즈는 많은 고민을 했었답니다.”

실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그녀였다.

당장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나와서 스타의 길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량을 그녀는 방송에서 자주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왜 이런 사람이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은 그녀의 방송을 본 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니 말이다.

“하지만 제가 있을 곳은 결국 여기랍니다.

후후, 걱정하셨어요? 긴장하셨어요? 구미호 아리아는… 여러분의 곁을 떠나지 않을거에요.”

­뭐야 사람 놀라게 하고 있네

­ㅋㅋㅋㅋㅋ 아리아의 장난이 너무…매콤해…

­그래, 가긴 어딜 가 ㅠㅠ 그동안 쉬었던 만큼 열심히 방송을 해야지!”

­오이오이 믿고 있었다구 젠장!

마치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평소와 다른 어조로 말을 해서 그런지 괜사리 긴장을 한 까닭일까?

시청자들은 평소보다 조금 뜨거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행여나 그녀의 심기가 나빠지지 않도록 얌전한 어투로 채팅을 보냈다.

“그래서 저를 기다려준 팬분들에게 꼭 해드리고 싶었던 방송이 있어요.

그리고 오늘 방송을 위해서 저에게 도움을 주신 선배분이 계신 까닭에 먼저 인사부터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선라이즈의 2기생 마녀입니다!”

아리아와 대비되는 서투른 발음의 일본어를 들은 베네딕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리아가 자신의 최애가 되기 전, 그전까지 몹시나 좋아했던 마녀가 아닌가!

좋아하는 버튜버들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합동 방송을 하다니!

“네, 마녀 선배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네네, 그래요. 제가 오늘 방송은 이어폰을 끼고 올 것을 필수라고 말했죠?”

­설마, 설마?

­아니 이 조합으로…그걸?

­ㅋㅋㅋ 아 미친 나 밖인데 어쩌지

­어쩐지 오늘 마이크부터 다르더라!

­목소리에서 꿀 떨어진다! 귀에 꿀 들어온다!

“네에, 그래요… 오늘의 방송은 ASMR 이랍니다.”

카리스마 있고 실력에 걸맞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늘 보여주던 아리아

그랬던 그녀가, 오늘만큼은 시청자들의 간을 빼먹겠다는 듯 여태 들려준 적 없는 부드러운 매혹의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베네딕트를 포함한 많은 팬들은 어째서 ASMR 방송이 밤에 진행되는 지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리아의 팬 커뮤니티는 뜨겁게 불타올랐다.

아니, 불타오르다 못해 모두 미쳐버린 듯 게시글을 투고했다.

[아리아보고 형이라고 부른 사람 머리 박아라]

일단 나부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시발, 영어로는 구조적으로 모에 보이스가 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영알못이었네요 ㅎㅎ!

­쯧쯧, 마나의 목소리를 듣고도 모에보이스가 존재한다는 걸 못믿어?

­근데 아리아의 목소리는… 이 목소리는 진짜 말이 안된다.

­그녀의 목소리를 숲 속에서 들으니 정말 여우가 다가오는 것 같았어… 어떻게 사람이 이런 몽환적인 목소리를 내지?

­웃음소리가 너무 사기야. 너무 사랑스러워.

아리아니키, 즉 아리아 형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던 이들의 단체 머리 박는 글들

[포르노 업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제가 제작했던 것들은 쓰레기들이었어요.

아리아는 어떻게 목소리 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죠?

인간의 욕구를 건드리는 듯한 이 밀고 당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죠?

­ㅁㅊ 형 정신차려ㅋㅋㅋ

­현업 성문화 종사자도 인정한 미친 목소리ㅋㅋ

­이거… 19금 걸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그런데 야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결국 방송 내용은 첫 ASMR 방송이라 우리 귀에다가 장난을 친거잖아?

­ASMR이 왜 일본에서 소리 페티시라고 하는 지 알 것 같아…

성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고찰하게 만드는 글들

[버튜버들 가치코이 하는 거 개 역겹다고 생각했는데]

유니콘들이 발작하는 거 보고 비웃었는데

아리아에게 다른 남자가 친하게 지낸다는 거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야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근데 시발 아리아가 대놓고 와서 꼬셨다고! 저 폭스가 그냥 내 귀에 매혹을 갈겼다고!

­와 근데 진짜 어제 방송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이런 야한 분위기를 내지?

­저 목소리로 동화를 읽으면 아동용이 아니라 성인용 동화가 될 거 같아.

­처음에는 부드럽게 들었다가 갈수록 피가 돔.

­ㄹㅇ 어제 방송 마지막 멘트 들으면 발기부전 환자들도 난리났을 듯

분명히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만으로도 방송이 위험한 분위기를 띄게 하는 유혹적인 목소리와 시청자들을 조교하는 듯한 밀당으로 인해서 연애감정이 든다는 고백 글들

[지금 빨리 픽십 들어가라]

아리아 짤 미쳤다.

어제 방송 들은 일러레들이 밤에 잠을 못 잔듯 ㅋㅋ

­링크 1 링크 2

­와 개쩐다 ㅋㅋㅋ

­아니 아리아 평소에도 이런 YABE한 짤 많긴 했는데 하룻 밤 사이에 얼마나 올라온거야?

­아, 일본은 저녁 시간대 방송되었으니 일본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밤에 그렸겠지 ㅋㅋ

어제 방송 이후 수상할 정도로 야한 그림이 많이 올라온 것을 알리는 글들

등등

다양한 글들이 투고가 되면서 커뮤니티는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이 여기다가 글을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글들이 투고되어가며 아리아의 인기가 높다는 것을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체감하고 있을 무렵

공지사항으로 한 글이 투고되었다.

[아리아 ASMR은 멤버쉽 한정으로 돌린다]

고 메인에서 말함.

확실히 이건 좀 그래 ㅋㅋ 유튜브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아리아 이러다가 노란 딱지 받는 거 아니야? 내용은 건전한데 목소리만 들으면 그냥… 아주… 어우…

­난 찬성일세

­아리아 유료 멤버쉽 아닌 흑우들은 없제?

­솔직히 이게 첫 ASMR 방송이었으면… 다음은…그 다음은… 그 다다음은…

­일단, 팬티를 옆에 두고 들어야 할 거 같아

­이 좋은 거 우리만 먹자고 제발ㅋㅋ

특정 콘텐츠들이 유료화 되는 것은 지지를 받기 아쉬운 일에 가까웠으나, 아리아의 ASMR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직 미숙한 방송이기 때문에 공개하기 싫다’라는 이유가 있지만, 사실은 이런 좋은 방송…그러니까, 혼자서 밤에 남에게 말을 하지 않고 즐기기에는 이만한 방송이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상파 출연으로 인기를 얻은 아리아가 이런 저속한… 아니, 저속하지는 않지만 저속한 분위기를 내는 것 같은 방송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그녀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아리아의 커뮤니티에서 아리아를 ‘형’이라고 부르는 팬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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