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263화 (263/307)

〈 263화 〉 262화.

* * *

유학 생활하면서 힘든 부분이 있었더라면 당연히 돈이다.

내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시간은 일주일에 20시간이 되지 않았고, 그것으로는 등록금을 내기는커녕 교통비와 통신비, 그리고 식비를 충당하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가 반대한 유학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나에게 용돈을 보내는 것에 미안함을 느꼈고

나의 유학비를 지탱해준 것은 다름아닌 동생이었다.

잘 나가는 동생의 통장에 빨대를 꼽는 몰염치한 유학생이 되기 싫었던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전액 장학금에 붙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나는 제법 생활에 여유가 생겨서 백화점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패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생각 덕분에 직접 옷을 사지 않고 친구들과 윈도우쇼핑만 하러 다녀도 즐거웠다.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패턴, 새로운 옷감, 새로운 유행

심심할 때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었던 패션 잡지의 아이템을 발견하러 돌아다니기도 했고

이름 모를 가게에서 취향 그 자체인 옷들을 찾기도 했다.

한국에서 버블티로 잘 알려진 타피오카 밀크티를 하나 손에 들고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이런 나의 애환이 담긴 유학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용사 에이아의 유우키 아오이가 눈을 일자로 치켜뜨며 말했다

“그래서 유나야, 내가 불러온 이유가... 짐꾼이야?”

“응, 숙녀를 에스코트 하는 게 용사의 의무잖아?”

“용사, 파업합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유우키 아오이

선라이즈 최고의 멋쟁이인 그녀는 버튜버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멋진 기사님이다.

오늘만 하더라도 나의 뜬금없는 호출에 어울려주지 않는 착한 친구가 아닌가?

“안녕 유우키.”

“안녕하세요, 쿠로가와 나에님!”

묘하게 기합이 들어간 그녀의 인사말에 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송할때처럼 편하게 부르면 안 돼?”

“아하하, 현실에서는 기합이 들어가버린다고 해야할까.”

어째 유우키가 묘하게 언니를 무서워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무튼 나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팔을 잡아당겼다.

“아, 알았어! 도망 안 갈테니까 제발 손 좀 놓아!”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듯한 그녀의 절규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

쳇, 오늘따라 겁먹은 오리같잖아.

왜 저러지?

아무튼 묘하게 경계하는 듯한 유우키를 이끌고 나는 긴자 시내로 걸어갔다.

정확하게 내가 향한 곳은 다카시마야 백화점이었다.

그리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 나는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후아, 비싼 백화점 냄새.”

아무리 윈도우 쇼핑이 좋다고는 해도, 일본에서 두 번째로 비싼 동네인 긴자에서 감히 윈도우 쇼핑을 할 깜냥이 안된 나는 난생 처음 들어온 긴자의 백화점에 살짝 긴장했다.

다른 곳에서 똑같이 파는 상품이라도 긴자에서 판다면 왠지 모르게 5~10% 비싸보이는 건 내 기분일까?

하지만 30분간 이 곳을 정찰한 결과, 여기도 결국 다른 데와 다를 바 없는 백화점이었다.

입점한 물품들의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으아아, 살 떨린다. 어떻게 옷 하나에 5만엔이 넘지?”

“그렇게 말하는 유우키는 저번달에 40만엔 짜리 컴퓨터 맞췄잖아?”

“그건 일 때문에 그런거고! 어떻게 옷이랑 같어!”

그렇게 외치는 유우키에게 어울리는 옷을 가져다 대었다.

요지 야마모토

전체적으로 루즈한 핏에 유우키가 좋아 죽는 검은색을 환상적으로 다루는 브랜드다.

부담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유우키는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댄 검은색의 우아한 원피스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판타지 세계관의 사제들이 입을법한 롱 원피스는 한쪽 다리를 과감하게 드러내어 섹시함을 가미시켰다.

톰보이인척 남성적인 패션을 좋아하는 유우키지만 사실은 오늘만 하더라도 내가 저번에 선물한 원피스를 입고 나온 순진한 여성이었다.

“어울리지?”

“으...응.”

옷잘알 답게 빠르게 인정하는군

좋아.

“이건 내가 사줄 게, 얼마 하는 거 아니야.”

세금 포함 14만엔

예전의 두 달 생활비에 가까운 가격이었지만 나는 개의치않았다.

비싼 90만 구독자 버튜버를 짐꾼으로 부리는 데 이정도면 적당하지 뭐

“그, 그래?”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이기에 길게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어도 덥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에어컨이 돌아가는 이런 백화점에서는 입을만한 옷이지.

그녀를 의상실로 집어넣은 나는 직원분에게 속닥거렸다.

“나중에 저 친구 나와서 얼마냐고 물으면, 할인해서 1만5천엔이라고 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꼭이에요!”

그렇게 당부의 말을 남긴 나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따분하거나 혹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언니는 이제 옷에 대해서 제법 관심이 생겼는지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했다.

“유나 나 깨달았어.”

“뭘요?”

“나 키 굉장히 작구나.”

새삼스럽지만 진짜였다.

일본 여성이 작다고는 하나, 내가 만나본 평균적인 작은 키의 일본인들은 151 정도였다.

하지만 저번에 병원에서 잰 언니의 신장은 145

많게 쳐줘야 고등학생이었다.

일본의 평균 신장이 155에서 158정도였기 때문에 언니는 확실히 평균 이하의 키였다.

“입고 싶은 옷이 있으시나요?”

“치마는 싫어. 나도 유나처럼 당당하게 멋진 바지 입고 싶어.”

나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 패션은 다리의 라인을 부각하는 패션이다.

키가 작은 언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도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수 있을까

나는 언니에게 맞는 패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나 땡큐.”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우키가 수줍어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옷이 마음에 드는 지 헤실헤실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역시 용사도 암컷이구나­하는 인터넷 밈을 무의식으로 떠올렸다.

“그나저나 둘이서 무슨 고민이야?”

“언니에게 어울리는 브랜드 뭐 없나 생각하고 있었어.”

“유나는 늘 나에게 치마만 입히고 싶어해.”

“아하, 하긴 유나는 쿠로가와 언니를 인형처럼 꾸미려고 하긴 하지.”

생각해보니 그렇네

내가 언니 옷을 고를 때는 어떻게 해야 귀여운 언니를 더 귀엽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많으니 자연스럽게 프릴이 달린 스커트나 치마류들을 고르게 되었다.

“후후, 역시 쿠로가와 언니도 제 패션을 동경하는거군요?”

딱히 그런건 아닌 것 같은데

원피스를 입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여성스러워진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제가 유나만큼 여성의류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제가 또 남녀 공용 브랜드에 관심이 많죠.”

휴대폰을 켜서 백화점의 지도를 켠 그녀는 잠시 후 꽤 넓은 매장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브랜드 이름을 본 나는 감탄했다.

“이거 그거지? 스티브 잡스가 즐겨 입었던 검은색 옷.”

“네, 잇세이라면 언니에게 아방가르드함을 선사할 수 있죠.”

아방가르드한 언니라

그러니까 전형적인 귀여운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 하는 걸까?

키가 작고 얼굴이 곱다.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돌고 피부는 새하얗다.

밤하늘의 요정처럼 신비한 매력이 넘치는 언니가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는 걸까?

오만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원래 옷이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버튜버가 아바타를 통해저 자신을 드러내듯,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옷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하지만 매니저 시절부터 언니의 옷을 샀던 나는 아직까지도 언니의 옷을 내가 직접 사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까 나는 언니에게 무의식적으로 ‘언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니 왠지 모르게 언니에게 미안해졌다.

언니는 더 이상 과거의 무력한 언니가 아니었는데

자꾸만 내가 언니에게 ‘내가 생각하는 언니 이미지’를 강요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다.

상념이 깊어진 내 앞에 나타난 언니는 나에게 옷을 내밀었다.

“자, 이건 유나 꺼.”

“어, 네?”

“네?는 무슨, 오늘은 유나가 쇼핑하는 날 아니야?”

옷이라고는 오타쿠 패션밖에 몰랐던 언니가 나에게 옷을 건냈다.

주름 가공이 된 이 브랜드 특유의 천으로 만든 바지

그리고 고급 양탄자를 연상하게 하는 화려한 패턴이 박힌 상의

내가 절대 고르지 않는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의 옷이었다.

“자자, 갈아입고 오자.”

“어, 네.”

언니의 묘한 강요에 따라서 나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역시 명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착용감을 느끼면서도

언니의 돌발 행동에 나는 살짝 고장이 난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언니는 어떻게 내 옷 사이즈를 잘 알고 있지?

설마 세탁할 때 확인을 했나?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솔직히 말해서, 과장없이 말하자면 나는 핏이 좋다.

일본 방송에 나오는 어지간한 여성들보다 비율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는 나의 또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어울렸다.

아방가르드 패션이라고 하면 패션쇼에 나오는 강렬하다 못해 ‘저거 입고 일상생활이 되나?’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옷들이 많았지만

이 브랜드는 디자인과 색감이 어디 가서 보기 힘든 패션이었지, 옷 자체는 고급 소재를 쓴 덕분에 몸에 딱 맞는것처럼 편안했다.

그렇게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은 모델 그 자체였다.

“으으, 사기적인 비율 봐, 넌 왜 모델 안하고 여기에 있냐.”

“그런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100만 버튜버를 찍었지.”

“재수없긴 한데 예쁘니까 봐준다.”

“뭐래.”

자기도 예쁜 주제에 또 남 칭찬 하나 만큼은 기가막히게 하는 유우키는 얄밉게 내 볼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그녀를 응징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나는 언니를 볼 수 있었다.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언니

잠옷을 입을 때 말고 처음으로 보는 언니의 바지 패션은

예술이었다.

숨이 멎는다.

저 작은 팔다리에서 기백이 느껴진다.

귀여운 외형 속에 감추어진 열정이 옷을 타고 흐른다.

나와 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나는 그냥 비율이 좋다, 보기 좋은 정도라면

언니는 강렬했다.

작은 체구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방가르드 패션 의미 그대로 언니는 기존의 귀엽고 예쁜, 내가 멋대로 규정해둔 귀여운 이미지를 탈피한 멋진 여성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언니는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멋진 여성이기도 했구나.

바보같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언니에게 귀여운 옷들만 입혔고...

“어때, 어울리지?”

수줍어하며 자신의 옷을 물었던 과거의 언니와

당당한 얼굴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물어보는 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말했다.

“찬미하고싶을 정도네요.”

정말이다.

어떻게 극한으로 귀여운 사람이 극한으로 멋질 수 있지?

갭 모에 따위가 아닌 완전 반전매력 아닌가?

귀엽고 수동적인 언니가 아니라, 멋지고 활발한 언니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씨익 웃었다.

“반할 거 같아요.”

“이미 반해놓고서는.”

구토하는 시늉을 하는 유우키의 발등을 살짝 밟은 나는 언니와 팔짱을 꼈다.

똑같은 옷과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우리를 향해 사람들이 시선을 둔다.

매장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할 정도로 나와 언니는 정말 궁합이 잘 맞았다.

“유나야.”

“네.”

“돈 쓰러 가자.”

FLEX하자는 말이 이렇게 심장 두근거리는 말이었나

괜히 래퍼들이 돈 많이 벌었다고 가사를 쓰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심장이 쿵 하는 대사일줄이야.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신만만하게 카드를 꺼냈다.

오늘은 소비세 내는 날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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