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옆방엔 버튜버가 산다-264화 (264/307)

〈 264화 〉 263화.

* * *

평소에 엄두도 못내던 명품을 사는 것

그것은 소시민적인 감정을 가진 나에게 어마어마한 희열이었다.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

이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보상 심리, 만족감, 희열 그 모든게 휘물아쳤다.

“으아.”

언니도 살짝 질린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유나는 신용 카드가 있구나.”

“응, 대학생 1학년 시절 은행에서 만들어주더라.”

“으으 부럽다!”

유우키의 불만은 이해가 되었다.

일본은 의외로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어렵다.

수입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꾸준하게 증명할 수 없다면 신용카드 발급은 꿈에도 꾸지 못한다.

재산 증명서를 제출해도, 심지어 취업 증명서를 제출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려된다나 뭐라나?

하지만 우습게도, 명문대 1학년 재적중인 유학생에게는 발급을 해주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도 유나가 왜 명품을 사는 지 알 것 같아.”

“쿠로가와 언니 정말요?”

“응, 단순히 옷이 좋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뭐랄까 우리로 치면 고급 버튜버 아바타를 입는 기분이 들어.”

“바로 그거에요.”

스스로가 존귀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

비록 천박한 배금주의 사상이 짙게 들어간 생각이기는 해도, 결국 돈이란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함부로 돈을 쓰는 건 안 되지만, 나는 내가 이루어낸 성공을 온전히 사회적으로 느낄 수 없는 특수한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렇게 명품을 걸치는 게 속이 편하다.

“오타쿠들은 사람들이 왜 같은 셔츠가 아닌 명품을 사는 지 모르듯, 인싸들도 가챠를 위해 9만엔씩 돈을 쏟아 붓는 오타쿠들을 모를걸?”

“으음...”

“가령 우리가 지금 여기서 먹는 이 음식들도.”

나는 음식들을 가리켰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비싼 긴자의 백화점에 들어선 레스토랑이다.

파스타는 2500엔부터 시작했고, 음료수 한 잔에 700엔을 받는 어마무시한 레스토랑이다.

“내가 집에서 재현한다면 더 맛있게,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맛의 비결은 결국 감칠맛과 간이다.

물론 세세한 웍질이나 요리 스킬에 따라 맛이 차이가 나긴 해도 그게 1천엔으로 만들 수 있는 파스타를 3천엔을 주고 사먹는 차이를 만들진 못한다.

나의 파스타와 여기의 파스타가 2천엔 만큼의 차이가 있냐고 묻냐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맛에만 집중하지 말고 사회를 돌이켜봐.

여기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지?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경단련 상위 그룹에 속하는 도쿄의 엘리트들, 10년 넘게 건실한 기업에서 종사한 사내의 임원들이지.”

물론 과장이 좀 들어간 이야기다.

그래도 일본의 중심지에서 비싼 가격을 내고 식사하는 이들이 결코 사회적 위상이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밥을 먹고 있구나.”

“맞아, 우리도 그만큼 대단하고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사람들인거지.”

“그러면 돈은, 그런 자존감을 위해서 쓰는거야? 아, 내가 이런 중심지에서 이런 돈을 내고 식사할 수 있는 유우키다! 이런 느낌인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하지만 언니는 다르게 생각하는 듯 포크를 내려두며 말했다.

“물론 나도 감성적으로는 유우키에 조금 더 가깝긴 해.

이 돈을 내고 식사를 하는 것 보다 후지소바 같은 체인점에서 900엔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나머지 돈으로 가챠를 굴리거나, 굿즈를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언니의 말을 이해했다.

나도 결국 선라이즈 소속의 버튜버인 주제에, 선라이즈 공식에서 시행하는 뻔한 한정판 상술에 넘어가서 캐릭터 굿즈를 모았으니까.

“하지만 유나의 말대로 사회에 대고 이렇게 ‘나는 성공했어!’라고 말하는 느낌은 이해할 수 있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하루하루 죽을 생각만 하던 내가(언니는 창백해진 내 얼굴을 만지며 안심시켰다) 이렇게 빛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정말 큰 발전이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런 낭비는 보상이기도 하면서 족쇄이기도 해.”

“이런 삶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런 족쇄 말이야.

성공의 과실이 이렇게 달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는 이제 이 과실을 탐하기 위해서 더 노력하겠지.”

...

이게 내가 알던 언니가 맞는가?

요즘 들어서 언니에게 놀라는 일이 잦지만, 언니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왠지 눈이 매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도 이제 다 컸구나

매니저 유나는 이만 졸업해도 되지 않을까?

“솔직히 회사에 면접 합격하고 나서 저를 처음 봤던 쿠로가와 언니가 대뜸 시선을 피하고 울먹이신 적이 있었던 거 아시죠?

그랬던 쿠로가와 언니가 라이브를 위해서 노력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서 라이브 프로젝트 진행하시고, 또 이렇게 성공을 이야기 하시다니 참... 세상일은 모르네요.”

“그러게, 나도 놀라워.”

두 사람은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역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결국 내가 언니를 이렇게 바꾸었다니까?

왠지 장성한 자식을 둔 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실제로 내가 좀 더 나이가 들고 언니랑 똑같이 검은색 머리로 염색을 한다면 모녀관계로 보이지 않을까?

“유나 방금 불경한 생각 했지?”

“아니요. 절대로.”

역시 언니는 요괴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옷장을 정리했다.

관리가 필요한 고급 브랜드 옷에 시트를 씌우고, 옷장 안에 제습포를 넣어서 습기를 관리하는 식이었다.

뭐랄까

오타쿠 굿즈로 산 옷들과 한 벌에 8만엔이 넘어가는 옷들이 섞여있으니 참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유나 옷장은 정말 신기하네.”

“옷은 사람이 걸어온 흔적이라고 하잖아요.”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옛날 옷

일본에서 장학금 받기 전 떨이로 산 옷

장학금을 받고 난 이후 대학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산 옷

선라이즈에 들어오고 난 이후 산 조금 비싼 옷

오타쿠가 되고 난 이후 정신없이 모은 캐릭터 옷

그리고 내가 오늘 사온 고급 브랜드 옷

마치 나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유학생, 사회인, 버튜버, 오타쿠

나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들이다.

내 옷들을 복잡한 시선으로 만지작 거리던 언니가 말했다.

“이제 유나가 내 옷을 안 사줘도 괜찮아.”

“네, 그럴게요.”

“... 그래도 내가 이상한 옷 사면 말려줘.

솔직히 옷 고르는 거 정말 자신이 없긴 해.”

“패션은 원래 자신감이에요 언니. 솔직히 오늘 저희 커플룩도 언니가 골랐잖아요?”

“응...”

옷장을 한 번 열은 김에 우리는 옷정리를 시작했다.

마침 날씨도 슬슬 풀리기 시작했으니, 여름 옷들을 정리하고 가을옷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 일 년 사이에 엄청 바뀌긴 했구나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 내가 입원했던가?

작년에 입었던 옷들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린 나는 과거를 추억했다.

자퇴하고 선라이즈의 일에 몰입하고, 매니저로 언니의 방송을 위해 노력하긴 했지.

얼추 정리가 끝난 나는 언니 쪽을 바라보았다.

언니도 나처럼 과거를 추억하는 듯 무언가 아련한 시선으로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사일에 제법 익숙해진 언니는 옷을 착착 정리하면서 바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입을 리 없는 하얀 수영복에 시선을 두었다.

그 순간 나는 당시에 느꼈던 파도 소리를 떠올렸다.

동이 터 오르는 무렵, 붉게 떠오른 태양만큼이나 붉었던 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 여름, 잊을 수 없는 그 뜨거운 기억이 불청객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

“...”

우리들은 부끄러운 침묵을 주고받았다.

옆 방에 사는 이웃에서 매니저와 버튜버, 그리고 버튜버와 버튜버가 된 우리 관계

서로가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서로가 느낄 수 있는 거리감을 느꼈다.

“저기.”

“유나야.”

최악이다.

이게 무슨 드라마 속 장면도 아니고 서로 똑같이 말을 건네다니

언니의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언니의 수영복을 건넸다.

딸기보다 더욱 붉게 물든 얼굴로 우리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옷을 마저 정리했다.

하지만 한 번 조여진 긴장의 끈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더, 덥네, 에어컨 좀 키고 올게.”

“흠흠, 저는 슬슬 저녁 준비 할게요.”

침묵 만큼이나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은 우리는 도망치듯 방에 나왔다.

언니의 작은 체구가 움직이면서 내는 발소리

리모컨을 찾기 위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하는 요란한 행동에 알맞게 주방에선 나도 가능한 소음을 내면서 요리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주 오랜만에 냉장고가 비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을 본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

나는 뒷 말을 삼켰다.

장보러 갈래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지?

방송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둘이서 시장을 보러 갈때는 항상 자연스럽게 말했는데

나는 혀를 깨물었다.

거실에서 나의 눈치를 보던 언니 또한 상황을 알아차린 듯 어색하게 웃었다.

풀린 줄 알았던 긴장의 끈이 다시 조여진다.

하얀 수영복을 발견했을 때의 어색한 긴장감이 다시 멤도는 그 순간

띵 동

우리의 침묵을 구원해 준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하아.”

“후우.”

탄식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나와 언니는 문을 열었다.

“언니들! 사죄의 의미로 요리 해왔어요.”

“유나 언니, 저번에 정말 미안했어요!”

각자 냄비를 가져온 채 미안하다고 어필하는 츠유와 미우가 얼굴로 미안함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평소라면 반갑게 바라볼 두 얼굴이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간만에 오타쿠 유나가 아닌 유학생 유나로 돌아온 느낌을 받으며 나는 있는 힘껏 미소지으며 두 사람을 환대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돈을 쓴 날은 떠들썩한 파티로 마무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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