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270화.
* * *
녹음이 끝났다.
게임이 엎어진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부인하기라도 하는듯 애니메이션 제작팀은 있는 힘껏 수록을 마쳤다.
한 번에 2화 분량을 마친 후 (누군가는 일정에 따라서 차후 파트를 녹음하기도 했다) 마무리 하는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유후, 언니 대단했는데?”
“하아, 내가 이런 성우 분들이랑 같이 작업을 하다니… 너무 황송해 죽겠어.”
첫 녹음이었다.
버튜버 아리아를 연기하는 게 아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첫 경험은 모두 각별하기 그지없겠지만, 미우의 눈에 보이는 유나는 자신의 주변에 성우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한 사람의 성우 덕후로 보였다.
“자기도 성우면서, 자기도 더 예쁘면서.”
“응? 뭐라고 했니?”
“쳇, 아니에요.”
레코딩은 프로젝트 첫 녹음이라 그런지 캐릭터의 연기 톤을 잡느라 제법 오래 진행되었다.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끝난 시점은 오후 여섯 시 즈음이었다.
감독에게 인사를 올린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리기 위해 대기소로 들어갔다.
물론 자기 파트에 오케이를 받은 몇 성우는 다른 일을 위해 녹음실을 떠난 터라 처음에는 가득했던 대기소는 제법 비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 파트를 일찍 끝내고 기다리던 성우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성우계의 큰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야카와 아쥬가 있었다.
유명한 아이돌 게임에서 인기 캐릭터를 맡은 두 사람은 같은 게임 회사의 프로젝트에 같이 지원하게 되었고, 자신 만만한 게임 프로듀서의 신작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 온 두 성우는 두 버튜버에게 흥미가 생겼다.
성우와 버튜버
목소리로 타인을 매료시키는 직업은 같으나, 한 쪽은 여러 작품에 걸쳐서 캐릭터에 혼을 불어 넣는 창조자가 된다면, 다른 한 쪽은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 일생을 그 캐릭터와 함께한다.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그렇기에 흥미가 일어났다.
그리고 일류 성우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과 비교해서 이번 프로젝트에 온 두 버튜버는 절대 꿇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인지도나 캐릭터 쪽을 보면 버튜버 쪽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야카 선배님, 아쥬 선배님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도 고생 많이 하셨어요.”
유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고, 미우는 그런 유나의 옆구리를 툭 쳤다.
“괜찮으면 가볍게 식사 하실래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아쥬의 제안이었다.
유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고
“저야 당연히!”
미우는 철없는 언니에게 선약을 주지시켰다.
“언니, 오늘 선약 있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유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가 버튜버 아니라고 할까, 오프라인에서도 아리아와 클레스타인 특유의 티키타카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두 성우 선배는 물론이고, 다른 성우들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풉, 두 분 평소에도 그러세요? 하긴, 온라인 쪽에서는 유명한 그룹이다보니 확실히.”
“아하하하, 그게… 그러게요…”
“음,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식사 어떠세요?”
평소의 유나라면 업계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초면의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실례라는 걸 알고 있어서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우 덕후에게 있어서는 달랐다.
즉 성우 덕후의 유나는 사회성 좋은 유나의 양심을 누를 만큼 철면피가 되어있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노골적인 성우 덕후 특유의 불쾌한 추근거림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말한 외형의 사람이 성우라기 보다는 모델 분위기의 재능 넘치는 여성이라면 다르게 느껴졌다.
적어도 아야카가 느끼기엔 그랬고, 안쥬 또한 이런 낯선 모험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리스크 높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버튜버에 대한 호기심, 성우에 대한 과한 호기심과 환상,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미우 덕분에 네 사람은 의견을 조율했다.
“언니? 있지 오늘…”
셋이서 먹기로 한 저녁 식사를 다섯이서 먹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양해를 구한 유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 집에 성우가 온다’
성우 덕후로는 상상도 감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이루어냈다는 사실에 으쓱한 유나였다.
아야카와 아쥬 또한 매니저에게 보고를 올린 후, 두 사람은 버튜버들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
녹음실과 버튜버들이 사는 저택은 멀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수석에 앉은 유나는 냉장고의 사진을 보고 나에에게 음식 밑 준비를 시킬 수 있었고, 유나는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요리에 뛰어들었다.
한편 나에와 유나가 사는 집에 들어온 아야카와 아쥬는 아름다운 집 디자인에 놀랐다.
혼자 살기에는 넓다고 할 수 있고, 둘이 살기에도 조금 넓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이 비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언젠가 가구 백화점에서 본 좋은 소파와 섬세하게 관리한 실내 장식들이 우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배치가 좋았다.
적어도 거실만큼은 가족 드라마에 나올법한 여성 집 특유의 화사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 좁은 공간을 어떻게 해야 잘 꾸밀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가 보이는 정성넘치는 집이었다.
그리고 화원 속에 위치한 공주님처럼 귀여운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성우로 활동하고 있는 아쥬라고 합니다.”
“저는 아야카라고 해요.”
소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활기와 성숙한 어른의 눈이 어울리는 그녀는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쿠로가와 나에라고 합니다.”
사람과 만나기를 꺼려했던 옛날과 달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라이브를 소화한 쿠로가와 나에는 더 이상 낯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 동작을 따라 하면서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그녀는 마치 당당하고 기품있는 공주처럼 보였다.
‘이런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
두 성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으, 나에 언니!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사람을 초대해서...”
“응? 아니야 아니야, 나도 말로만 듣던 아야카 씨 하고 아쥬 씨를 보게 되어서 영광이야.
그러니까 부담 없이 식사를 즐기다가 가세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빈 손으로 오게 될 줄은 저희도 몰랐네요.”
“아니에요, 유나 저 바보가 보나마나 끌여들였겠죠.”
방송 경력은 길지 않으나 관록이 생길 정도는 되었고
인터넷 방송인이라 함은 온갖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초면의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아하, 그러니가 유나 씨에게 기본적인 캐릭터 연기가 들어간 게...”
“네, 전문 성우분들에 비하면 부끄럽지만 저희들은 캐릭터의 사고 회로를 따라해야하거든요.”
“어머나, 저희들도 긴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그런 식으로 캐릭터를 이해해요.
그러다가 이벤트가 생기게 되면...”
“맞아, 아쥬 선배님은 연기가 무너질 때 어떻게 다잡으세요? 저희는 어느 정도 실수가 용납 되는데 배역을 연기할 때는...”
“음, 저 같은 경우에는...”
네 사람의 공통 화젯거리는 당연히 캐릭터 연기였다.
서로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답게 그녀들의 본 기술에 대한 여러 노하우가 오가기 시작했다.
성우라고 한들 무조건 정해진 캐릭터 대사만 하는 건 아니었다.
유행한 애니메이션이나 보이스 드라마 시리즈에는 해당 캐릭터로 캐스팅 해서 라디오를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성우 분들 특유의 다양한 목소리 연기 폭은 정말... 특히 아야카 씨의 순진무구한 톤과 쿨톤의 격차나, 아쥬 씨의 활기찬 갸루 톤과 냉막한 흑막 톤은 정말...”
“어머 감사해요. 그런데 사실 저도 아리아씨의 고백 로그를 듣고는...”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이번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 거실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다들 식사하러 오세요~!”
카레를 위해 준비한 당근 감자 양파 돼지고기는 우유와 화이트 소스를 만나 스튜가 되었다.
오븐에서 향긋한 허브와 함께 기름을 쫙 빼고 나온 닭 다리 구이 옆에는 고기 육수와 레드 와인을 섞어 만든 소스가 자리했다.
마트에서 사온 밀 빵과 간단하게 볶은 토마토 파스타는 부족한 탄수화물을 채워주었고, 고온으로 겉면을 튀기듯 구워낸 간장을 끼얹은 양고기 모듬 구이 밑에 양배추와 숙주를 깔아 식감을 더했다.
최근 들어서 식재료에 돈을 아끼지 않는 두 사람의 냉장고에는 방구석 유튜브 쉐프들의 심장을 뛰게 할 재료와 향신료가 가득했기에 가능한 정찬이었다.
밑 준비는 나에가, 요리의 마무리는 유나가 한 우아한 합작이었다.
가족과 사느라 요리 할 일이 적은 아야카와 홀로 사느라 먹는 게 비교적 부실한 아쥬의 눈이 크게 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런 푸짐한 식탁은 고급 양식점에 가서나 볼 수 있는 메뉴들이었으니 말이다.
“... 혹시 요리용 유튜브 계정을 따로 개설하셨나요?”
아무래도 집 주인들이 버튜버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아니요? 그냥 취미에요.”
“유나랑 살다보면 이렇게 살이 쪄버린답니다.”
나에의 그 발언은 기만에 가까웠으나 매일 같이 이런 푸짐한 식사를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 대단하네요.”
가족과 살기에 요리할 기회가 적은 아야카는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집주인들을 바라보았다.
“히히, 이래서 가끔 배부르게 먹고 싶을 때는 언니들에게 연락해요.”
이어지는 미우의 말에 두 성우의 시선은 부러움으로 변했다.
돈을 크게 벌고 사회적 인망을 가진 두 성우들은 이런 푸짐하고 따스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 분위기를 잘 느끼는 아야카는 동료라고는 하지만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나, 미우, 쿠로가와가 서로를 편히 여긴다는 사실을 느꼈다.
처음에는 세 사람이 버튜버니까, 또한 성공한 인플루언서니까 무언가 유대감이 느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들은 친구 이상의 가족같은 사이였다.
서로가 폐를 끼치는 걸 조심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그걸 크게 민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 잘 대하는 인터넷 방송인이니까라고 하기에는, 인터넷 방송인들 모두가 방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을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럽다.’
가족끼리 살면 돈이 절약된다.
집을 구할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연애 사정에 민감한 회사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지만 가풍을 따라야 했고 집에 살고있는 이상 부모님의 시선과 눈치를 봐야하는 건 성공한 성우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끔 이런 일상을 동경했다.
자신이 녹음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맛있네요.”
보기 좋은 요리만큼이나 혀를 즐겁게 하는 요리였다.
하지만 기분 좋게 속을 덥히는 그 따스함에는 질투의 신맛이 살짝 깃들여 있었다.
“아아, 제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이후...”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화려한 미인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에게 친근감을 보이며 애교 아닌 애교를 피우기 시작했다.
업계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한 후배가 아니라, 마치 팬이 자신을 대하듯 느끼는 열망과 성격 좋은 사람 특유의 친절함이 섞인 그런 애교였다.
“풉, 유나 씨 그게 뭐에요.”
“그치만, 저는 ‘오늘도 힘낼게요!’라고 하는 시마무양의 그 활기찬 대사가 아니었다면, 저는 매니저를 할 때 일을 때려쳤다니까요.”
“아아, 우리 아야카 또 죄를 저질렀구나?”
“아쥬, 그러는 너도 클레스타인의 팬이라면서!”
“아야카! 그거 본인이 앞에 있는데 할 말이야?”
“어머나, 아쥬 선배님 설마 저를?”
그렇게 서로가 숨겨왔던 팬심을 밝히면서, 얼굴을 처음 보는 다섯 사람은 제법 늦은 시간까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분위기에 심취한 유나가 와인을 꺼내들었다가, 쿠로가와에게 제지를 당하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깊은 밤이 된 시간에 두 성우는 택시를 타고 그녀들의 집을 나섰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남으려고 하는 미우를 올려보낸 후 유나와 나에는 서로 어깨를 기대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언니 고마워요. 솔직히 오늘 되게 무례한 부탁이었는데.”
“응? 아니야, 나도 유나만큼 기분 나쁜 성우 오타쿠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했던 아이돌 시리즈는 정말 좋아했는 걸.”
“진짜 성우를 만나본 소감이 어때요?”
“글쎄, 2년전의 나는 선라이즈에 들어왔어도 저런 사람들이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 했어.
감히 나 따위가, 내가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겠어? 하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가득했지.”
옛날의 쿠로가와 나에는 분명히 그러했다.
낮은 자존감의 그녀는 감히 일류 성우를 보고 당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네.
내가 부럽다고 생각했던 성공한 성우의 삶과 나의 삶이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응? 아닌데요? 언니와 저 두 선배하고는 차이가 있는데요?”
“그게 뭔데?”
“그건 바로... 언니 옆에 바로 유나가 있다는 사실!”
“바보같아 정말.”
성우를 만나 기분이 좋은 유나에게 까치발을 해 가볍게 키스한 나에는 유나의 헛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설거지를 마무리 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만난 기분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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