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272화.
* * *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말이 있었다.
현대 사회에 사람 갈아 넣는 곳은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그중 몇 군데를 고르자면 게임 회사, 그것도 프로젝트 런칭 이전의 회사다.
그에 못지않게 갈리는 곳은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다.
그것도 변동 사항이 생긴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는 농담삼아 병원을 전세낸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가 맞물린다면?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다.
현재 우마무스메의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P.A.워크스는 지옥불에 구워지고 있었다.
“수정사항이 떨어졌습니다! 캐릭터 분량 조절!”
“성우 마시노 씨의 향후 프로젝트 참가가 불투명! 비중을 줄여야 합니다!”
시나리오팀이 갈려 나간다.
이번 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보수도 점점 올랐다.
그만큼 퇴근해서 아이들과 아내를 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퀄러티가 떨어진다면 해고가 아니라 야쿠자가 총을 들고 찾아오겠다는 무서운 농담이 오가는 장소인데.
론칭 단계에서 캐릭터 비중을 조절해야 나중에 가서 딴말이 안 나온다.
그래도 큰 틀이 바뀌는 게 아니라 조연 캐릭터들의 비중이 달라질 뿐이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을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농담뿐이었다.
“게임 쪽 또 엎어졌데.”
“그래?”
“응, 캐릭터 비중이 달라지면서, 향후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기획된 이벤트, 녹음 일정, 캐릭터에 따른 파워 밸런스 변화, 서포트 카드 출시일 변경...”
“어우, 미쳤다. 정말.”
이미 몇 번 손발을 맞춘 만큼 게임 개발자들하고 친숙했다.
그래서 P.A.워크스의 사람들은 게임 회사 사람들에게 애도를 보냈다.
지옥을 거닐고 있지만 자신보다 더한 지옥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으로 사람은 안심할 수 있는 생명체였다.
오늘도 힘내세요! 당신은 잘하고 있답니다. 하루 열심히 이겨낸다면 후후, 제가 밤에 귀를 쓰다듬어 드릴게요.
버튜버가 판 상품 중에서는 이런 녹음 파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살이나 약물이 마려울 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1분에 달하는 녹음 파일이다.
떨어져 가는 자존감을 그것으로 회복한 남자는 커피 캔을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평소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막혀서 튕겨져 나오는 커피 캔은 왠일인지 한 번에 들어갔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프로젝트 성공해야지.”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답게 오타쿠 스티커가 붙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사내는 다시 지옥으로 들어갔다.
****
“생각보다 분량이 늘어났네요?”
유나는 조금 두꺼워진 대본을 훑었다.
작중에서 유나가 맡은 캐릭터는 트레이너의 보조를 담당하는 캐릭터다.
즉 직접적으로 레이스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캐릭터가 아닌 학원을 안내하는 정도의 캐릭터였다.
작품 안에서는 중요한 캐릭터지만 거기서 거기인 캐릭터
대형 프로젝트에 끼어있는 편한 엑스트라같은 존재였다.
그랬는데 수정 후 대사 분량이 상당히 늘었다.
힘들어하는 트레이너의 정신적인 버팀목...까지는 안 되었다.
대신 중간마다 튀어나와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녹음 비용에 대한 조정에 대해서 말인데요...”
“아뇨, 딱히 돈을 보고 하는 업무는 아니에요. 이번 기회에 성우분들이랑 교류할 수 있어서 더 이득이었어요.”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돈을 보고 살았으면 유나는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폭넓은 경험을 쌓고 싶은 유나에게 있어서 성우 활동이란 천금을 주고도 하기 어려운 기회였기에 오히려 고마워했다.
제작 쪽은 돈 아껴서 좋고 자신은 경험 쌓을 수 있어서 좋고
그야말로 윈윈이다.
유나는 제법 많이 수정된 스토리를 보고 감탄했다.
전반적인 수정사항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애니메이션이 만들어 지는 도중에 이런 수정이 될 수 있지?
새로운 장면도 그리고 스토리도 점검해야 했는데, 어떻게 초반부 녹음 과정 이후에 스토리 라인이 수정될 수 있을까?
커리어가 비교적 짧은 신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미리 정한 거 아닐까요?”
“원래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할 때는 원작과 어느 정도 차별을 두긴 하니까요.”
“그런데 이번 애니메이션은 오리지날 스토리 아니에요? 참조할 원작이 있나?”
“경마가 원작 아닐까요?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성우들은 캐릭터 이해를 위해 벌써 경마 이야기를 찾게 되었고, 경마를 모르던 그녀들은 경마에 대해서 제법 잘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있는 미우는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사람 갈아넣은 거 아니에요?”
“원래 애니메이션 쪽이 사람 갈아 넣기로 유명하다고는 한데... 설마요?”
“저희가 지금 4화 녹음을 하고있는 지금에도 그 사람들은 6화 채색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전개였다.
지옥의 크런치, 강행군!
현대 사회의 어둠과도 같은 노동 착취 현장 바로 코앞에 있는 그녀들은 말을 아꼈다.
대기실에서는 그들의 안타까움을 애도하는 침묵이 흘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암울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듯 누군가가 일어나서 당당하게 외쳤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도 열심히 해야죠! 단순히 캐릭터 녹음이 아니라, 캐릭터 송도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랬다.
비록 짧은 파트 혹은 단체 곡의 목소리에 묻혀서 조명을 받기 힘들긴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캐릭터 연기와 캐릭터 송, 나아가서는 게임에 수록될 음악까지 녹음해야 했다.
물론 노래라는 게 어느 정도 키가 높아지게 된다면 캐릭터 연기의 색이 옅어지긴 했지만, 캐릭터 연기를 위한 발성과 노래를 위한 발성은 다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인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흘렀다.
그 와중에 이번 애니메이션의 주역을 맡아 이 모임에서 선배격이라 할 수 있는 사오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분들도 계시고, 코로나로 일정도 조금 한가한 데, 끝나고 가라오케 어떠세요?”
2012년부터 꾸준히 활동해 온 그녀는 이번 녹음 모임에서 사회적 인지도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흠잡을 데 없는 선배였기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되었다.
도저히 일정이 맞지 않아서 양해를 구한 사람을 빼고 참여하게 되는 분위기에 유나의 눈이 빛났다.
“오오닛시 선배님의 뛰어난 가창을 배울 수 있는 겁니까?”
“푸훕, 좋아요.”
워낙 사람 좋기로 유명하고 사람이었다.
이미 수십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답게 능숙하게 사람을 이끄는 분위기에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다.
성우라고 꼭 사회력이 충만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대인관계에는 문제없지만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이끌린 덕분인지 일이 끝나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숨겼던 감정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 확실한 맹세를 손에!”
“강해져야 할 이유를 찾았어, 앞으로 나아가~!”
“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현대의 일본 성우들에게 있어서 가창력은 필수 요소였다.
탄탄한 캐릭터 연기는 기본이었다.
캐릭터 송을 통한 어필과 라디오에 부르는 라이브 캐스트야 말로 자신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사무소에서도 꾸준히 보컬 트레이닝을 시키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경력이 긴 성우들은 관록과 실력을 바탕으로, 경력이 짧은 성우들은 그만큼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갈고 닦은 솜씨로 노래 솜씨를 선보였다.
대다수가 애니메이션 주제가였지만, 그 외도 가끔 대중가요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 사이에 있는 유나는 모든 곡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너무 예쁜 외모 덕분에 부담감을 느끼던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주고 저렇게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성우들은 더 편하게 임할 수 있었다.
실상은 성우들 사이에서 그녀들의 프리한 가창을 듣는 성공한 성우 오타쿠의 즐거운 비명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유나 씨 한 곡 어때요?”
“좋아요!”
선배의 권유에 빠질 수가 있나?
애초에 유나야말로 이런 놀자판 분위기를 즐기는 인싸 아니었던가!
올해 일본의 가요계를 뒤흔들었던 그녀가 마이크를 잡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부족하지만 선배님들의 위명에 힘입어 이번 일에 들어온 막내 유나라고 합니다.”
이곳에 있는 신인 성우들 가운데 가장 경력이 적은 성우도 최소한 10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한다. 비록 그게 엑스트라일지라도, 그런 성장통을 겪고 온 신인 성우들에게 있어서 버튜버라는 이색적인 경력으로 온 유나는 엄밀히 말해서 텃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낙하산이라고 보면 어떠한가?
알게 모르게 눈을 흘긴다면 뭐 어쩌겠는가?
짧지만 밀도 있는 수라장을 겪어온 유나에게 있어서 성우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귀여운 애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 본명보다도 아무래도 아티스트 이름이 유명하죠. 네, 아리아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해외에서도 인기가 있는 특이한 버튜버
그녀의 입꼬리가 악동처럼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그러니까, 아리아 인증곡을 한 번 불러줘야겠죠?”
그녀의 첫 합동 앨범 ‘푸른 혜성에 빌어’
노래 좀 부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간의 한계를 쥐어짜는 곡’
실력파라고 자부하는 가요계 출신 연예인들이 부르기를 제일 싫어하는 곡
하지만 그녀의 팬들은 그녀의 메인 곡을 ‘아리아 인증곡’ 이라고 불렀다.
“녹아 내려가는 하늘 아래, 머나먼 저편에 있는 그대에게 노래할게.
바람아, 내 목소리를 싣고 나아가!”
54키에 달하는 넓은 음역
남자의 저음부터 여자의 고음에 해당하는 음역을 소화하는 것부터 이 노래는 시작된다.
호흡이 까다로워 폐활량을 요구했고, 치고 올라가는 부분은 강하게 치고 올라가야 했다.
하이라이트 부분을 부드럽게 부르느냐, 록을 하듯 강하게 부르느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당신과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우니까, 나는 당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어!”
아무리 시설이 좋은 노래방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이라이트 시점에 들어온 그녀는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노래가 귀에 때려박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좌중을 지배하는 마력이 있었다.
만약 버튜버를 하지 않았고, 춤도 추지 않는 상태로 가요계에 데뷔하면 어떨까?
유나의 무대, 아니 아리아의 무대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고음과 그것을 받쳐주는 파워
그야말로 인간의 성대를 한계로 시험하는 곡이었다.
서브 컬쳐에서 태어나 메인 컬쳐를 잡아먹은 괴물같은 곡을 소화했다.
노래 자체는 멜로디가 강한 록 계열이라서 분명히 즐거운 곡이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괴물이었다.
노래가 주는 흥겨움보다 눈앞에 선 여인의 실력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비교를 거부하는 실력’
캐릭터 연기가 완벽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대사량에 고민하는 그녀는 분명히 신인 성우였다.
하지만 성우라는 안경을 빼고 본 그녀는 그냥 거물이었다.
묘한 경계와 질투를 부숴버리는 그녀의 진면목을 본 사람들은 신경을 세우는 걸 포기했다.
“그러면, 불민한 후배가 한 곡 더 바치겠습니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그녀는 거침없이 다음 곡을 눌렀다.
도대체 또 어떤 곡으로 좌중을 압도할까? 하는 생각을 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L.O.V.E 나는 당신을 사랑해~! 알럽,알럽, 러브러브 러브유!”
경쾌한 리듬, 따라하기 쉬운 가사
그리고 한 손에 마이크를 쥔 채 세상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앙증맞게 움직이는 무빙
나에 언니의 라이브를 위해 축적한 데이터에 뽑아온 아이돌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며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큰 힘을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귀여운 동작을 때려 박은 동작으로 선배에게 끼를 발산하는 후배로 돌아온 유나의 태도에 분위기가 또 달라졌다.
“정말이지, 언니 때문에 내가 못산다니까.”
그사이에 낀 미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유나 언니는 성우를 좋아하는 성덕이기는 해도, 낙하산 취급받으면서 눈칫밥을 먹을 바에는 당당하게 승부를 보는 사람이었다.
어중간한 격차면 ‘쟤 뭔데 잘난 척 하냐’는 식의 시기를 받지만, 그녀는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걸 좋아하는 승부사였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캐릭터 연기 기본도 갖춰져있고...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성우를 안 하고 있을까요?”
“어, 음... 해외 법인에서 버는 돈이 많으니까?”
하늘 같은 선배의 중얼거림에 그렇게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방송 수익 도네이션도 그렇지만, 캐릭터 굿즈 로열티나, 광고 수익이 제법 되긴 하거든요. 저 언니는 돈 버는것도 쓰는것도 좋아하니 그런 거 아닐까요...?”
“흐응, 버튜버라...”
깜찍하게 윙크하며 춤추는 유나를 바라보던 성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새로운 변화’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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