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2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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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인 유나가 생각하기에 일본어는 생각보다 계급이 나누어진 언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라온 그녀에게 귀족이라는 것은, 일종의 옛 시대에 나오는 계급을 칭하거나 혹은 그에 비등하는 권세를 누리는 현대의 부자들을 칭하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기론을 배울수록, 그리고 일본의 문화를 알게 될수록 한국어에 비해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언행에서 차이가 심하기 난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파고 들어간다면 일본의 황실에서 쓰이는 황실에서 쓰이는 표현, 정치 가문(놀랍게도 일본에서 거물 정치인들 가운데 가문을 이어서 정치를 하는 가문이 있다!)에서 쓰이는 교양 가득한 표현, 고대 중국 황가의 정치 다툼에서 보일법한 ‘그들만의 표현’ 등 생각보다 언어가 복잡하게 나뉘어졌다.
물론 오타쿠인 그녀가 그 세세한 디테일을 파고 들어 공부하는 일은 없었다.
언어 전공인들이나 알법한 복잡한 말들 보다는 미디어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편이 훨씬 확고한 편이었고, 매혹적인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섹시한목소리를 연기하기 위해 그녀가 배웠던 언행 가운데는 아가씨 언어가 있었다.
빈유 츤데레 양갈래 트윈머리 금발 다운펌 혹은 롤펌 캐릭터로 오타쿠 역사를 열어재낀 아가씨 캐릭터의 말투의 어미는 데스와(ですわ) 쿠다사루?(くださる?) 카시라(かしら) 어두에는 경어 접두사인 오(?)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인 것이군요, 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셨을까요? 등 부드럽고 격식있는 아가씨 어투를 표현하는 셈이었다.
“그, 유나 씨는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물론이죠. 저 이래 보여도 성우 교습을 받은 적 있답니다?”
방송 경력 반년 차, 성우 경력 1개월 차인 그녀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특정 캐릭터의 분위기를 따라낼 수 있었다.
성우들이 본다면 ‘재능충!’ 이라고 외칠 풍경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코토는 성우 경력을 받지 못해서 ‘아, 천재 유튜버가 말하니 저렇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각설하고, 아가씨를 지향하는 마코토에게 유나는 속성 성우 교육 및 말투 교육을 시작했다.
아가씨처럼 말하는 법, 아가씨처럼 생각하는 법, 아가씨처럼 게임하는 법, 아가씨처럼 일상을 꾸미고 표현하는 법 등을 말이다.
캐릭터 회의를 이어나가며 어떤 아가씨를 지향할 것인지, 어떤 식으로 방송을 할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들은 제법 긴 시간동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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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흑흑, 유나 씨... 정말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너무 다 고마워요.”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기본적인 캐릭터 교육을 마친 후 ‘이대로 아가씨 캐릭터로 가죠!’라는 느낌으로 결정이 났다.
라인 문고의 최신 트렌드 소설의 파악, 주요 독자층의 수요 및 지출 데이터를 확인한 결과 아가씨 캐릭터는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특정 사람들에게 강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는 악녀 캐릭터 대신, 흔히들 여주인공 캐릭터 내지는 로맨스 판타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귀족 아가씨 캐릭터는 생각보다 마코토에게 어울렸다.
문제는 이것을 윗사람과 동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활동했던 유튜버인 마코토에게 이런 체계적인 서류 작업은 지나치게 낯선 영역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대학을 졸업했다고는 하나 회사 내에서 통용되는 리포트를 쓰는 일은 또 달느 영역이었고, 자신이 아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글을 쓰고 체계적인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은 신입 버튜버이자 신입 회사원인 마코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지난한 영역이었다.
결국 그녀를 도운 것은 유나였다.
물론 단순하게 그녀가 착해서 도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 좋은 편인 유나지만, 돈과 책임이 얽힌 문제에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그녀에게도 꽤나 피곤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다음 연기 지향점을 라인 문고에 자주 등장하는 로맨스 판타지 아가씨, 정확하게는 한국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악녀 캐릭터를 노리고 있었다.
그쪽 회사의 사람과 조금 더 ‘친밀한’관계를 노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유나는 신입 회사원인 마코토를 조금 더 도왔다.
그 결과 마코토는 여름을 비추는 햇님 부럽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유나가 직접 작성해준 업무 보고서를 받아 들고 공장 기계처럼 인사를 박았다.
데뷔 반년 차 180만 구독자 인터넷 방송인과 풋내기 방송인인 자신은 소설 속 귀족과 평민처럼 크나큰 차이가 있는 존재인데도, 유나는 늘 상 친절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한국인인 그녀가 일본인인 자신보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어로 글을 잘 쓴다는 사실에 일본 국민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그녀는 입고 있는 붉은 가디건 보다도 빨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엽다고 생각하는 유나는 피식 웃으면서 악수를 건냈다.
시장을 조사하고 캐릭터를 연구하고 방송 컨셉과 포인트를 잡는 매니저 작업을 오랜만에 즐긴 유나는 오후 9시까지 이어진 회의와 야근도 달갑게 받아들일 만큼 기분이 좋았기에, 사회 초년생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선배의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 라인 문고쪽에는 이런 쪽으로 캐릭터를 잡아달라고 부탁할게요.
아마 대규모 프로젝트로 작업이 들어갈거니까, 캐릭터 시안과 모델링은 빠른 시간에 나올 것 같아요.”
“그, 그러겠죠?”
“네에, 그러니 당분간은 버튜버 방송들 보고, 듣고 연구하면서 열심히 노력해봐요.
말했죠? 저도 라인 문고의 웹소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 둘은 언젠가 좋은 파트너로 함께 방송을 하겠네요.”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끝까지 너무너무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 이래보여도 꽤 계산적인 사람이랍니다?
마코토 씨가 크게 성장한 다음, 라인 문고라는 대형 회사에 제 지인 심어두고 은밀하게 비리와 청탁을 부탁해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그렇게 말한 유나는 한쪽 눈을 살짝 감으며 매혹적으로 윙크했다.
180만 구독자를 지니고 라인 문고에서 도움을 구하는 업계의 선두주자가 자신에게 청탁이라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게... 네!”
결국 농담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마코토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부담감과 황송함이라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대단한 여인은, 채용 후 자신이 3일 동안 고민했던 목표에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주었다.
막연하게 생각한 ‘아가씨 캐릭터의 버튜버를 하고 싶어요’에 어울리는 캐릭터 지향점을 설정해주었다.
연기 예시를 제시하고 이런 캐릭터가 시장에 어떻게 비추어질지 자세한 분석도 해주었다.
비슷한 캐릭터를 하는 버튜버를 소개해주고, 그녀의 방송 패턴도 간략하게 훑어주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윗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오늘의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회사인의 기본 양식을 알려주었다.
개인 인터넷 방송인으로는 알 수 없는, 선라이즈같은 대기업의 매니저 경력을 보낸 사회 엘리트다운 그녀의 보고서는 같은 일본인이 봐도 ‘마코토를 아가씨 캐릭터 컨셉 버튜버를 시키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그래 마치, 소설속에 나올 법한 멋진 아가씨처럼 말이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정말이지 황송한 만남이었다.
예쁘고 친절하고, 유능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압도적인 재능을 지니고, 그것을 부드럽게 관철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
실패한 인터넷 방송인, 사회 초년생의 마코토에게 있어서 유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인생의 지향점이 되었다.
홀로 남은 마코토는 그녀와 함께했던 이 공간의 모든 추억을 머리에 담으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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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결국은 아가씨 캐릭터인거네?”
“네 언니, 아무래도 로맨스 판타지 하면 매력적인 귀족 아가씨 아닐까요?”
“그녀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으음... 글쎄요.”
집에 돌아온 유나는 나에와 함께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이 순간이야 말로 서로가 하루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못된 손장난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최근 방송인으로서 두 번째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유나와 나에는 당분간 침대에서 장난치는 것을 잠시 미루기로 했었다.
“그래도 라인은 라인이네... 그런 컨설팅에 관련된 일에 그만한 돈을 제시하다니.”
“물론 의무 숙제 방송이 있고, 그녀의 데뷔 방송 이후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녀 하기 나름이겠네요.”
“그게 인터넷 방송인이지 뭐.”
지능적인 PD의 환상적인 편집, 다른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하며 빛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TV속의 예능과는 다르다.
인터넷 방송인이란 결국 개인이 홀로 캠을 킨 다음 방송으로 사람들에게 매력 포인트를 가져오는 고독한 전장이니 말이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잘 이끌어줘도, 개인이 진행하는 방송을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본인의 솜씨니까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건 유나의 손에 달린 일이 아니다.
마코토라는 이름의 방송인이 홀로 이겨내야 하는 것.
“그녀가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잘 되게 해야죠. 제 이름이 걸린 일이거든요?”
“하긴, 유나는 폐인 같던 나를 고쳐 써서 이렇게 만든 사람이니까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에이, 언니도 알잖아요? 제가 언니를 그렇게 바꿀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언니에 대한 지고한 사랑 때문이라는 걸 말이죠.”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죠?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누군가를 바꾸는 것, 누군가를 성공한 버튜버로 만드는 것, 유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서로를 껴안아 체온을 나눈 두 사람은 슬슬 여름이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서 이렇게 밀착하고 있음에도 불쾌함이 들지 않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 말이다.
“참, 그러고보니 돈은 어떻게 되 가니?”
“안 그래도 목표 금액을 맞췄어요. 결국 저는 선라이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을 통해서 모델러를 구했어요.”
“으음, 그러고보니 서양의 아티스트라고 했었지?”
“네, 할리우드에서 모델링을 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으음, 하긴 2만5천 달러는 가벼운 금액이 아니긴 하지...”
선라이즈의 평균적인 3D 모델링 가격이 30만 엔에서 70만엔 사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열 배인 300만엔이라는 금액은 역대 최고 비용이라고 봐도 되었다.
저축을 많이 하고, 단가 높은 광고를 받고, 개인적으로 주식 투자도 소소하게 해서 큰 돈을 모아 둔 유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암... 그렇게 만든 모델로 한 다는 게 어머니에게 엿먹이기라니...”
적에게 자비 없는 유나다운 판단이었다.
물론 딸이 어머니를 적으로 여긴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건 결국 유나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닌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쿠로가와 나에는, 떠올리기 싫은 것을 떠올려 불편한 기분이 된 어린아이처럼 유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언제나처럼 언니의 어리광을 받아들이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준 유나는 창문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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