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2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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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서 방송을 진행하는 술 방송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흑역사 제조기라고 불린다.
방송하면서 술을 마시게 된다면 평소 주량보다 훨씬 적게 마셔도 취기가 빨리 오는 편이기에, 이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 방송인들은 방송에서 쉽게 실수를 저지르는 편이었다.
청초 컨셉을 죽어도 유지할 것 같은 청순가련한 인물이 술을 한잔 걸치면 걸걸한 시장통 아저씨로 바뀌는 일도 종종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캐릭터 갭차이를 보여주며 인기몰이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 술 마시고 온전하게 진행하는 일은 드물었다.
선라이즈의 버튜버들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주당으로 자리잡아 술 방송을 즐겨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알콜 방송 = 매니저의 긴급대기 방송에 가까웠다.
음주 소통 방송은 방송인의 기량에 따라서 리턴 대비 리스크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위험한 방송으로 볼 수 있었기에, 아리아같이 튼튼한 커리어를 밟아가며 성장한 버튜버가 술 방송을, 그것도 마시는 모습을 인증하며 방송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그리고 술 들어간 아리아의 모습은...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정상적이었다.
355ml 맥주 한 캔과 직접 말은 하이볼 한 잔, 그리고 카쿠마사무네 200mL를 한 팩 들이켠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방송을 이어 나갔다.
“술이요? 술 좋아하죠.
숲에 있어 봐요, 즐길 게 술과 여자(버튜버)밖에 없는걸요?”
“아, 이걸로 살고 있는 지역이 공개 된거 아니냐구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구미호에요 구미호. 오늘 아침에 일본에서 사케를 마시고 밤에는 파리의 센 강에서 우아한 파리지엥처럼 지팡이를 손에 쥐고 걷는 우아한 구미호라니까요?”
“아이돌이 술을 마셔도 되냐구요?
에이, 구미호에게 있어서 술은 디젤 엔진의 엔진 오일이에요.
연료는 식사에서 나오지만, 이 연료를 효율적으로 태우는 데는 엔진 오일이 필요하다니까요?”
물론 평소보다 말이 조금 더 길었다.
술이 살짝 들어간 여성 특유의 1.25배 정도 빠른 화법으로
정확한 템포와 호흡으로 따박따박 말하던 평소의 아리아의 화법과 다르게, 늘어진듯한 농염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리아의 모습은 여태껏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이었고
그리고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조금 야했다.
물론 대놓고 시모네타, 즉 성(?)적인 주제를 토크하면서 야한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술을 마셔서 살짝 흐트러진 호흡을 의도적으로 마이크에 푸는 듯한 후하는 내쉬는 소리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움직이게 되는 목젖의 소리, 알코올이 기분 좋게 목젖을 때리고 난 후 키야하며 감상을 보이는 리액션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날것 그대로 다가왔다.
마치 거리감이 가까워진 누나(언니)가 수화기 너머로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듣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술... 잘 마시네요?
진 토닉 섞는 손짓 봐, 한 두 번 해본 게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지금까지 얼마나 마신 거지? 쌓여가는 캔 봐
일단 내 주량을 아득하게 넘어섰네ㅋㅋ
윗놈 허접ww
로씨아에서 저 정도는 기본이지
“주량이요? 으음, 딱히 카운트 해본 적은 없어요.”
“일단 저랑 마시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뻗어버리니까, 제가 뒷정리를 하는 역할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돈 걱정 없이 술 마신지는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아, 그래도 술에 안 취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보세요, 알콜이 들어가서 어깨춤을 추고 있다구요.”
아쉽게도 그녀의 방송 아바타는 어깨까지의 3D 모델링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깨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만 했다.
그래도 조그맣게 설정된 캠 사이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짓이, 보고만 있어도 귀여웠다.
그녀도 자신의 손 캠을 인식한 모양인지 마실 술을 조제하거나 마시지 않을 때는 그것을 상당히 의식했다.
“쁘이~”
“학~”
“콩콩~ 키츠네에요~”
기분이 좋아진 아리아는 손 캠을 켠 김에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손장난을 치면서 아이처럼 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완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던 아리아가 술에 살짝 걸치고 아이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 누나 왜이리 귀여워ㅋㅋ
술을 마시면 귀여워지는 타입이구나
매일 술 마시게 하고 싶다...
술 들어가서 그런지 영어하고 일본어가 섞여 나오네ㅋㅋ
워낙 야무진 이미지가 강했던 탓일까?
아니면 시청자들이 느끼기에 평소의 소통 방송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7개월이면 한 명의 인터넷 방송인을 아는 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술 방송에서 보이는 귀엽고 어설픈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 굉장한 귀여운 모습을 연출했다.
“새로운 방송기획이요? 글쎄요, 당분간 일본 선배들하고 놀고 싶은 마음이 커요.”
“GB 선배들을 버린 게 아니냐구요? 무슨 소리에요, 클라티에 선배님이랑 하는 그림 방송, 계속 이어가고 있잖아요? 저 이제 제법 그림도 잘 그린다구요!”
“가챠 방송? 당신 밴이야 밴! 어떻게 나보고 가챠 방송을 하라고 할 수 있어!!”
평소에 보여주는 감정의 폭이 적다고 해야할지
계산된 행동과 반응을 보인다는 평소 아리아답지 않게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면서 크게크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아 진짜 이 구미호 알면 알수록 새롭네ㅋㅋ
술 값에 보태라
진짜 인터넷 방송인 같아, 아니 원래 버튜버가 인터넷 방송인이긴 한데 이런거 너무 웃겨 ㅋㅋ
도네 닫기 전에 빨리 보내!
부끄러움 많은 아리아는 소통 방송에서 도네이션 러쉬가 이어지면 ‘돈을 더 소중한 데 쓰세요!’ 하는 뉘앙스로 도네를 닫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기에 기회다 싶은 그녀들의 팬들, 특히 어둠의 메이드 단 출신의 팬들은 도네이션 폭탄을 투여하며 그녀의 반응을 지켜봤다.
“크으, 술 맛이 좋네요.”
하지만 술이 들어간 그녀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부끄럽다면서, 부담스럽다면서 슈퍼 챗을 닫는 일이 잦았던 아리아는 딱히 그것을 막지 않았다.
“평소에는 음, 여러분들의 이런 정성과 사랑이 담긴 슈퍼챗을 보낼 때 마다 아, 내가 과연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는 걸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번 돈을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슈퍼챗을 부담스럽다고 닫는 건 소통의 단절 아닐까요?”
“그래서 그냥 이번 기회에, 아니 적어도 오늘 만큼은 딱히 안막으려구요”
“그래도 슈퍼챗이 너무 길게 이어져서 다른 분들 챗을 못 보면 알아서 조절할테니까 알아두세요.”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반전되는 모양인지 평소에는 부담스럽다고 닫았던 슈퍼챗마저 닫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 팬들은 환호했다.
수금 방송 좀 하라는 글들이 자주 올라왔건만, 기어코 바쁜 일정을 핑계로 안 하던 수금 방송을 이번 기회에 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돈으로 환호를 보냈다.
이놈들 미쳤네ㅋㅋ
위험한 거 아니야?
아리아 과금 기회가 드문 줄 알아? 닥치고 돈 보내ㅋㅋ
마치 초창기 데뷔 시절을 떠올릴만큼 쏟아지는 도네이션 러쉬에 시청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아리아는 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아예 반응이 없는 건 아니고, ‘앗싸 술 값 벌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술을 계속해서 들이켰다.
그녀가 사온 술들은 일본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이볼 용 위스키, 과일 맛이 들어간 보드카, 200mL에서 300mL 사이즈로 파는 팩으로 포장된 사케 등이었다.
편의점에서 한 종류씩 사온 술들을 연이어 까서 마신 그녀는 알코올 향이 진득하게 들어간 말투로 말했다.
“호로요이는 안 마시냐구요? 그거 달고 알콜이 약해서 안 마셔요.”
“그래서 맥주도 딱 하나만 샀잖아요? 프리미엄 몰츠, 맥주하면 프리미엄 몰츠죠.”
“에비스? 걔들은 한정판만 맛있지, 에반게리온 탈 거 아니면 안 마실거예요.”
“힘드냐구요? 요즘 들어서는 힘들긴 하네요. 아, 그래도 저는 항상 여러분들의 편인거 아시죠? 여러분들이 얼마나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오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 내색 잘 안 하려고 하는 거였어요.”
“오늘따라 왜 이리 상냥하냐구요? 왜요, 상냥해진 제가 싫어요?”
술이 들어갈수록 그녀는 솔직하게 반응했다.
평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은 그녀가 솔직한 말로 힘들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다고 굳게 믿는 강한 척 연기했던 그녀가 솔직하게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모습은 신선했다.
항상 강했던 여성이 술을 마시고 빈틈을 보인다고 해야 할가
지금의 아리아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완벽하고 우아한, 재능 넘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버튜버 시장을 선도하는 빛나는 별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고, 흐트러진 발음으로 힘들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상냥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하며 취중 애교를 부리는 그런 가녀린 여성 말이다.
평소 시청자들과 함께 으쌰으쌰 해나가거나, 시청자들의 센스 넘치는 채팅을 캐치해서 클립 각을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시청자들의 날선 반응에 분노로 대응하고 그들과 싸우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아픈 모습을 드러내는 약한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이어진 술 방송은 거의 두 시간을 넘어갔다.
한 시간에 술 한 병을 비우는 느린 템포가 아니라, 소주병으로 계산한다면 소주 네 병을 넘어가는 알코올 양이었다.
“아, 좋아하는 술안주요? 한국식 김이요 한국식 김, 짭조름하고 기름기 있고, 목 넘김도 좋고 그냥 맛있어요.”
“소주는 안 마시냐구요? 아 잠시만요... 여기 있다.”
“근데 여러분들은 술 안 마셔요? 왜 저만 마시는 기분 들지?”
외로움과 고뇌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푸념하던 그녀는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소주병을 까고, 잔이 살짝 흘러넘치게 부었다.
“예전에는 술에 의지해서 힘든 일을 풀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을 만나고 나서는 그러질 않네요.”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해요. 히히.”
게임을 주제로, 콘텐츠를 주제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일대일로, 한 명의 버튜버가 직통으로 시청자들에게 당신들 덕분에 행복하다고 말한 그녀는 소주 한 병을 빠르게 비워내는 것을 끝으로 방송을 마쳤다.
그녀의 첫 음주 방송은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다.
그러니까 위험하게 현실 관련된 정보를 말하거나, 아니면 평소의 얌전한 모습을 싹 버린 채 야한 말들을 줄줄이 내뱉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식으로 감정을 폭발하는 일 없이 끝났다.
키리누커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소재나 충격적인 진실 보도 없이 말이다.
허나 그런 꾸밈없는 그녀의 모습에 또다시 반한 팬들은 유튜브와 커뮤니티에 그녀의 온갖 짤들을 만들고 귀여움 넘치고 솔직하게 말하는 구미호의 매력적인 모습을 퍼트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날 트위터 트랜드는 ‘술 취한 구미호(っい九??)’가 검색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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