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304화.
* * *
“이미지를 바꾸겠어요.”
“으응, 그래.”
“더 이상 야한 걸로 놀림 받는 구미호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미 유튜브 알고리즘을 정복한 아리아의 야한 엉덩이 무빙은 어떻게 할거야?
그리고 3D 아바타에 있는 전신 타이즈 그거, 원한다면 벗을 수 있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원신이라는 게임에서 나온 캐릭터가 너를 파쿠리했다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어떻게 덮어버리게?”
“그러니까, 논란을 논란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날
기어코 자신의 일러스트레이터를 헬스장으로 업고 가서 ‘함께 운동’을 하고 돌아온 유나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자신의 귀여운 동생을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질 정도로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나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일단 통상적으로 야한 이미지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게 뭘까요?”
“우리 사장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청초가 아닐까?”
나에는 이 문장을 말하는 데 헛웃음을 세 번 터트렸다.
그만큼 선라이즈 내에서 사장이 강조하는 청초라는 이미지는 개박살 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섹시하고 풍기문란한 이미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역시 청초였다.
“아니죠. 섹시한 것 하고 야한 건 다르다구요.”
“오호라, 그게 선라이즈 최고 처녀 *치인 아리아의 의견이야?”
“언니이이!!”
유나에게 얄밉게도 나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녀의 이런 손동작을 볼 때마다, 유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성적인 농담에 내성이 없는 동생을 놀리는 나에의 그 모습은 언니답지 못한 행동에 심술궂고 얄미운 마음만 들었다.
“미안 미안, 유나의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해버렸네.”
“저는 진짜진짜진짜 진지하다구요.”
나에는 진지한 유나의 음성에 헛기침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상담에 진지하게 어울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볼을 부풀린 그 모습이 무심코 사랑스러워서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도 캐릭터 해석의 대가인 탓인지
세계 최고 후원 랭킹을 누리고 있는 버튜버의 저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모양인지
나에는 곧장 대답해주었다.
“일단 캐릭터 디자인이 예상 밖으로 성적인 소잿거리가 많이 나와서 부담스럽다는 거잖아?
유나는 음, 생김새에 비해서 야한 이야기에 그렇게 능숙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야한 글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상의 괴문서 등 야한 소재를 다룬 기분 나쁜 글들을 잘 읽지 못하고.”
“네, 그런 편이죠.”
“으음, 이쪽 업계 일하는 사람치고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나...
그래, 네 말대로 섹시하게 생긴 것과 야한 토크 잘 하는건 다르지.
어찌보면 유나야말로 진짜 아이돌이 아닐까하는 정도로 갭모에가 터져나오니 말이야.”
오랜 동거자이면서도 서브 컬쳐의 코드를 꿰고 있는 나에는 그녀의 고민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제시한 것은 일본의 문화 코드를 꿰뚫는 단어였다.
“답은 여자력이야.
일본 여자들에게 늘상 따라다니는, TV 상의 배 나온 패널들이 여자들의 덕목을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늙다리들이 하는 말.”
“여자력이 높다는 건 그거죠?
가정적이고, 순종적이고, 지루하고...”
“뭐... 그렇게 보이는게 맞긴 해.
그래도 이 여자력이라는 단어는 꽤 핵심적인 내용이야.”
“네?”
“일단 서양인들이 일본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런 성질에 가깝긴 하지.
일본 여성이라고 하면 일단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귀여운 그런 이미지를 원하잖아?”
물론 이것들은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이다.
적어도 유나에게 있어서, 이런 가치관들은 구닥다리같고, 지루하고, 낡은,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발상이다.
하지만 지금 원치 않게 야하고 천박하게 생긴(적어도 유나의 기준에서는) 디자인을 지닌 주제에 야한 농담을 버티지 못한다는 환상적인 이 환장할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자력을 뒤집어 쓰라구요? 그런 구닥다리 이미지를?”
“어머나, 언니 초창기 청초 이미지를 잡아준 여자력인데, 그걸 무시하는 거야?”
“초창기의 유리아는 청초 이미지라기 보다는, 여자력과 거리가 먼 헤비 메탈 스크림...”
매니저 경력을 살려서 유리아의 방송 패턴을 입에 담던 유나는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나에의 눈꼬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결국은 청초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정적인 이미지
그런 이미지로 덧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런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가지고 싶지 않아서
당당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우아한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유나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날이 갈수록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버튜버 선배들(심지어 마나 그 빌어먹을 꼬맹이마저!)의 장난이 심해지는 지금 이 순간, 이미지를 바꾸지 않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에휴, 그럼 뭐부터 하죠?”
“유나가 잘하는 것.”
“저 잘 하는거 많잖아요.”
“흐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일단, 여성력하면 이거 아닐까?”
나에의 제안을 들은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붙은 그 음탕방자한 밈들을 떨쳐낼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는 들일 만 했다.
****
최근 아리아의 방송은 대단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3D 아바타 데뷔 라이브에 보여준 유나의 새로운 아바타는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무엇보다도 아리아가 지닌 자연스러운 웨이브와 그루브 덕분에 ‘선라이즈 최고의 춤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건 다 안다.
하지만 춤마저도 이렇게 잘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거기에 선라이즈에 출근하는 다른 버튜버들의 ‘아리아의 댄스 목격담’들을 들어본다면, 선라이즈 같은 대형 기획사의 댄스 트레이너들도 힘들어할 만큼 빡세게 춤추고 있다고 한다.
과연 아리아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그런 기대감이 가득했기에, 아리아의 3D 아바타 방송은 다른 방송보다 평균 시청자수가 1.5배 정도 더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온 것은 아리아의 야한 복장과 그것을 잘 활용하는 아리아의 섹시한 움직임이었다.
사회력 떨어지는 오타쿠들이 현실에서 목격했다면 ‘인싸의 포스’가 느껴진다며 싫어할 만한 춤이지만, 버츄얼 3D 아바타를 통해서 보니 그저 야할 뿐이었다.
아리아의 충직한 키리누키 채널들도 한 번쯤은 아리아의 3D 아바타를 관능적으로 표현하는 영상을 올릴 정도로 아리아는 한 때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섹시한 구미호’라는 이미지가 빠르게 붙었다.
문제는 그녀는 정작 섹시함을 추구하면서도, 의외로 청초한 면모가 강한 까닭에 동료 버튜버들의 야한 농담에 금세 항복한다.
심지어 한참 연하 동료인 미카엘의 돌직구도 버티지 못하고, GB 선배들의 서양식 특유의 걸쭉한 야한 이야기를 하면 고장이 날 정도로 솔직한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경험이 많아보이면서도 정작 경험이 하나도 없는 처녀*치라는 이미지 연출을 위해서 연기한다고 하기에는 안의 사람이 고장나는 일이 잦은 편이기에 ‘아리아는 사실 야한걸 못 견디는 유리 대포’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었다.
이따끔 뇌절 밈이라며 싫어할 때도 있지만,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구미호가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는 오타쿠들이 많은 까닭에 그녀의 방송은 패는 맛이 확실한 아리아의 리액션을 보기 위해 많이 찾아왔다.
그날의 방송을 찾는 팬들 또한 오늘은 어떤 시츄에이션으로 어떻게 아리아를 놀릴까 고민하며 그녀의 방송에 들어왔다.
오늘은 합동 방송이네
유리아인가? 마왕님 구미호 조합 좋지.
일단 도네이션부터 충전하자.
선라이즈 공식으로 굳혀진 커플인 유리아&아리아의 조합은 이제 일본어를 잘하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즐겨 시청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동안 매너리즘을 피하려고 옆 방의 두 사람은 합동 방송을 잘 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요즘엔 시청자들이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두 사람은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퍼먹어도 질리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아리아와 유리아의 방송이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방송은 조금 특이했다.
분할된 화면과 아기자기한 방송 인터페이스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이윽고 조그만 화면에 영상이 송출되고, 장갑을 낀 여성들의 손이 나타났다.
그것은 선라이즈의 팬들이라면 잘 알고 있는 익숙한 방송이었다.
뭐야 오늘은
요리 방송이네?
아리아 요리 잘함?
전직 메이드임
진짜?
손의 동작을 찍는 손캠과 버츄얼 아바타를 같이 움직이는 선라이즈 특유의 요리 방송을 시작하기 앞서 아리아가 말했다.
“공주님, 제가 최근 고민이 심한 거 알고 계시죠?”
“으응, 물론이도다. 최근 마계의 모든 수컷을 홀린 매혹적인 구미호 전설이 화자되고 있노라.”
“제가 많이 매력적이긴 하죠.”
“그리고 그 구미호의 허리놀림은, 마계 제일이라고 하더구나.”
“그러니까, 저는 그런 천박한 구미호 아니래도!”
화가 난 듯 손으로 책상을 탕탕 내려치는 그 모습에 시청자들은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서 놀림 받는 일이 잦아진 아리아는 리액션이 참 풍부해서 선라이즈 타격감 랭킹 5위 안에 빠르게 올라왔는데, 오늘의 방송도 결국 그 연장이었다.
“저처럼 조신하고 참한 구미호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몸을 주방으로 초대한 것이냐?”
“물론이죠! 본디 구미호라고 하면 가정의 수호신!
그 수호신에 걸맞게 저 또한 오랜 세월을 신부 수업에 할애했답니다.
지금은 먼 여행을 떠난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구요!”
“오호라.”
“본래 현모양처라고 함은 가산을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배우자의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좋은 어머니의 지혜를 가진 여성을 뜻하죠.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마트에서 산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하면 싸고 맛있게 요리를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호오라.”
“다시는 사람들이 저를 천박하고 야한 여우라고 놀릴 수 없도록, 이번 기회에 보여드리겠어요!”
“본 공주는 입이 짧다. 잘 알고 있겠지?”
“하, 마계 공주님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이겠습니다.”
“그거, 프로포즈인가?”
능글맞은 유리아의 대꾸에 아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잘 나가나 싶더니, 역공 한 방에 무너져내린 아리아의 모습에, 장갑을 끼고 있던 유리아가 다급히 아리아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벌써부터 로맨스
이게 백합 맛집이지.
이 커플 밀고 당기는 게 예술이네 ㅋㅋ
그렇게 아리아는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본인의 ‘여자력’을 뽐내기 위한 방송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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