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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조는 외조모와 살았다. 외조모는 70에 가까운 고령의 노인으로 괄괄하고 괴팍하고 또……여하튼 성미가 좋지 않았다. 이보다 젊은 시절에는 퍽 괜찮은 사람이었다고들 했는데 주정뱅이 남편과 씨름하며 생활고를 감당하느라 시집올 적의 유순한 성정은 죄 까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주정뱅이 남편이 객사했다. 팔자가 피는 줄 알았으나 3년 뒤 애지중지 길렀던 외동딸이 집을 나갔다. 말도 없이 짐을 싸고 나간 딸은 장롱 제일 밑 칸에 꿍쳐둔 비상금을 훔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그리고 그 일이 10년도 전의 일이었다. 그 딸이, 그 몹쓸 계집애가 다시 찾아왔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노인은 바라지도 않은 외손자의 흰 얼굴을 응시했다. 밥풀같이 희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노인은 그 얼굴에 핀 발그스름한 입술이 딸을 닮아 퍽 새침하다고 느꼈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이 애가 누구의 아들인지, 허파에 바람만 찬 제 딸애가 누구의 씨를 받아 이 허여멀건 놈을 디밀어 놓고 떠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너 유복자냐?’ 하고 물었다. 그러나 어린 것은 입을 잠그고 바닥만 더듬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생활비를 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뜸해졌으나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몇 달에 한 번이라도 새벽녘 돈 봉투를 밀어 넣고 갔었다. 그래서 버리지 않은 줄 알았다. 여의치 않으면 주변 사람을 통해 얼마간이라도 내밀었으니까. 그러나 몇 년 전, 그마저도 끊겼다. 제 한 입 먹고 살기 힘든 처지였다. 어렵게 살았고 앞으로도 어려울 예정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리 버겁고 힘들 예정이었다.
그리 어렵게 키웠는데 뉘의 씨인지도 모를 자식을 배고 와 제게 고물을 던져두고 가듯 던져 놓고 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고만고만 커오던 손주가 더는 귀엽지 않았다. 종종 좋지 않은 버릇을 고치기 위해 하던 손찌검에 악의가 실렸던 것은 그때쯤이었다. 어린 것은 반항하지 않았다. 손찌검하며 딸을 떠올렸다. 악만 찌든 여편네라고 동네에서 욕을 들어도 노인은 죽지 않았다.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노인은 종종 남편의 장례를 치르던 날을 떠올렸다.
딸이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 객사한 남편. 장례를 치르며 웃었다. 웃으며 다 끝났다. 이제는 좋은 일만 남았다. 그렇게 여겼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하나 있는 딸자식은 주정뱅이 남편만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노인은 밥풀같이 허연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손주를 응시했다. 열꽃이 핀 양 발그스름한 눈가와 개암 색 눈동자…….
차라리 낳지나 말지. 제 새끼 제힘으로 키우지도 못해 키우던 개를 버리고 가듯 자식을 던져 놓고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올 건지 귀띔도 하지 않은 채.
그게 기조가 외조모에게 맞고 사는 이유였다. 외조모를 떠나면 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조가 외조모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앵벌이라도 하려 길바닥에 나앉아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맞고 사느니 앵벌이가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빌어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구걸은 죽느니만 못한 삶이었다. 그러니 손속이 맵고 성미가 괴팍하다고 해도 이 지긋지긋한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코가 깨져라, 맞고 사는 것이다.
“너, 이놈 또 애 괴롭혔담서? 엉?”
외조모가 지팡이로 쿡쿡 등을 찔렀다. 노인은 순무처럼 하얗게 센 머리에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이다. 비단 주름이 자글자글 박힌 피부뿐만 아니라 눈코입마저 그 얄쌍하게 예쁘던 모친과는 달랐다. 기조는 무시했다. 마룻바닥에 앉아 며칠째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어데서 어른 말에…….”
“안 때렸어.”
“뭐? 안 때렸는데 선생한테 왜 전화가 와!”
노인이 악을 질렀다. 지르며 날아오는 손이 솥뚜껑 같았다. 기조는 일어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그 손을 견뎠다. 등에 다시 벌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코를 깨지 않아서. 코를 깨고 가면 학교에서 우스워질 것이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맞는 것보다 우스워 보이는 게 싫었다. 기조는 날아오는 손찌검을 받아내며 대답했다.
“안 괴롭혔어. 진짜야.”
“그럼 선생이 거짓말했냐? 엉?”
인정하지 않자 지팡이가 날아왔다. 노인의 눈이 벌겋게 번득거렸다. 외조모에게 기조는 살림을 축내는 벌레일 뿐이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랬다. 귀하게 여겨준 적도 없고 어화둥둥 우리 손주 예뻐해 준 적도 없다. 방 한구석에 처박아 놓고 밥때가 되어 기어 나오기 전에는 세상에 없는 아이였다.
그리하여 기조는 노인에게 ‘할머니’하고 부르는 일이 어려웠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부터 치아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했다. 학교에서 전화가 온 일 말이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걸린 선생은 툭하면 전화해서 문제 학생이니 주의시켜야 한다며 나발을 불어댔다.
제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말도 걸지 않는 노인이니 매타작을 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것은 아닐 터였다. 굳이 이 문제가 아니라도 매타작하고 싶은 날이면 이 산 송장은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살갗이 터지도록 찜질했다.
“네가 계집애 하나 밀었다며! 그 계집애 엄마가…….”
기조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떠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뒤 작게 읊조렸다.
“아, 생각났어.”
“너 또 이 새끼 깡패 짓 하고 다녀?”
“주의할게.”
2절이 시작되기 전에 묵묵히 인정했다. 계집애라고 하니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비 오는 밖을 쳐다보며 매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외조모는 지팡이를 들면 살갗이 벌겋게 부어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가 꼭 찢어지거나 터져 피를 봐야 지팡이를 거두어들였다. 하나뿐인 손주에 대한 처사치곤 잔인했다. 기조는 그걸 알면서도 견뎠다. 매를 피해 도망가지 않는 건 갈 곳이 없어서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도망가지 않는 건, 그냥 도망가고 싶지 않아서다. 기조는 누구와 마주해도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소년이었다.